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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궁극에의

● (Guide) 패신저스 (2016)

by 큰바위얼굴. 2022. 6. 27.

90년이 걸린다. 중간에 깨어났다. 혼자.

뭐든 해본다. 먹기, 놀기, 노래하기, 춤추기, 농구하기, 우주탐험...

그런데 재미가 없다.

이상형을 깨울 지 한참을 고뇌하고 결국 결행한다.

그녀가 알게 된다.

 

그리고, 한참 후 알게 된다. 우주선에 이상이 생겨 그 부분을 고치게 하기 위하여 깨운 것임을.

그리고, 선택하게 한다. 다시 잠들 것인가? 함께 살아 갈 것인가?

 

그녀의 선택은?

 

...

 

 

홀로 살아가는 외로움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함께 할 누군가 필요하다. A.I.는 아니다.

인생은 잠들어 있을 때 가능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지금까지 그런 시각이 지배적이다. 잠든 상태는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 잠든 세상과 현실은 연결되지 못한다. 그렇게 본다.

 

만약, 잠든 세상과 현실을 연결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긍정인가?

부정인가?

 

판도라의 상자인가?

가야할 길인가?

 

수행의 끝에 신선이 된다.

잠들기 때문에 잠들어서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현실을 살아갈 만하다. 그런데 잠을 뒤척이면 현실에도 영향을 끼친다. 잠에서 꿈이라도 꾸면 그 꿈은 이어지지 않지만 그 피로감이나 혹은 그 '경험'은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 잠들기 때문에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라면 잠을 현실로 연결하면 안 된다. 

 

잠 < 현실, 연결하지 않는다.

잠 > 현실, 연결하지 않는다.

 

잠들기 때문에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면, 잠을 현실에 연결하지 않는다.

현실이 있기 때문에 잠을 자야 한다면, 현실을 잠에 연결하지 않는다.

이처럼, 잠과 현실이 상호 인과관계에 속해 있다면 연결하지 않는다.

 

'잠' = '현실', 연결한다.

 

그렇지만, 잠과 현실이 각각 영향을 끼치지만 독립되어 있다면 잠은 잠이고, 현실은 현실이라고 본다면 - 물론 잠들지 아니한 현실이 있을 수 없고, 현실에서 잠들지 않을 수 없지만 - 잠과 현실은 연결해도 무방하다. 

 

잠과 현실이 독립적이어야 한다.

잠과 현실이 연결되어도 이전과 같은 기능은 동일해야 한다.

다시말해, 잠과 현실을 연결해도 그 파장이 긍정적이어야 한다.

 

자, 그렇다면 잠과 현실을 연결한다는 것은 뭘까?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잠을 통해야만 현실을 살아갈 수 있고, 현실에서 잠을 자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잠'은 어떤 걸 말하는 걸까?

현실과 잠이 상호 연관된 그 휴식과 치유에 가까운 그 잠은 잠의 3단계 정도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여기에선.

 

그렇다면, 꿈을 꾸는 잠의 4단계는 가끔 혹은 종종 닿는다. 휴식 보다는 체험, 드라마, 인상깊은, 두려운 어떤 경험과 같은 순간이다. 찰라일 수도 긴 시간일수도 있는 시간의 길이는 무의미하다. 또한, 공간도 찰라에 생길 수도 긴 시간을 들여 만들어낼 수도 있어 공간의 범위는 무의미하다. 시공간이 의미가 없다. 꿈에서 시공간은 큰 요소가 아니다. 떠오르는 것, 특징적인 것, 인상적인 것에 가까운 어떤 무의식적으로 겪게 되거나 겪는 경험에 근접한다.

 

꿈을 꾸면 신난다. 격정이 인다. 잔향이 남는다. 서서히 잊혀간다. 대체로 모든 걸 기억해낼 수 없다. 그 여운만 남는다. 마치 과거에 겪은 경험이 추억이 되어 잔향으로 남겨진 것처럼 꿈은 그렇게 멀고 먼 찰라에 겪었음에도 그렇게나 멀게 느껴진다. 생생히 기억해낼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내겐 그 경험이 아직 없다. 단지, 수많은 경험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어떤 과정이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는 정도는 겪어 보았다.

 

꿈을 현실과 연결한다는 건 뭘 말하는 것일까?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니 굳이 접근해야 하니 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기술을 이용한 가상체험이 보다 실현가능하다고 말한다. 꿈에 기술은 없다. 현실 또한 살아가기 위한 기술이 있을 뿐 주어져 있다. 그리고 그 매개는 나다. 꿈을 꾸고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다. 그렇다면 그 매개에서 어떤 생각의 전환이라거나 깨달음이라거나 보는 방식을 달리한다거나 수양을 쌓는다면 꿈과 현실을 연결할 수 있을까? 아니, 다시말해 꿈의 영역과 현실의 영역의 교집합을 확장할 수 있을까?

 

지금, 꿈을 꾸고 현실을 살아가는 나란 매개체란 교집합이 있기 때문이다. 물질은 아니다. 꿈이 열린다. 꿈이 현실에서 열린다면? 혹은, 현실이 꿈에서 열린다면? 그건 어떤 상황이나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꿈은 꿈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 꿈은 현실과 다른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만약, 궁극적으로 꿈과 현실이 동일선에 놓인다면 내겐 꿈인가? 현실인가? 하나로 통일된 꿈의 생인가? 현실의 생인가? 꿈은 꿈이어야 그 의미를 다하듯이 현실은 현실로서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 맞는가?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수많은 노력들이 결국 얻어낸 것은 뭘까? 영생은 아니다. 죽음에 가깝다. 축적된 경험의 전승이라고 봐야 할까? 경험은 과정에 가깝다. 경험의 끝에 닿는 그 것이거나 그 곳, 그 시간은 뭘까? 그럼에도, 다시 돌이켜보면 시공간이 의미가 없는 꿈이란 세상을 안다는 것부터 다시 접근해보자. 경험의 끝이 닿는 것은 흔히 말하는 시간이나 공간적인 개념은 아닐 것으로 본다. 찰라여도 좋고 긴 시간이 걸려도 좋다. 여기어도 좋고 거기어도 좋다. 시간이 만들거나 공간이 만들어준 환경은 배경에 가깝다. 경험이 지루하지 않도록 쉬이 지치지 않도록 하는 도구에 가깝다. 경험은 과정에 가깝다고 말하였다. 경험은 목표가 될 수 없다. 과정이니까. 그렇다면 이런 경험, 다시말해 현실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수많은 업적이라 칭하는 일들을 해내고 기뻐하고 열정을 다하면서 즐기고 때로 아픔을 겪고 힘들고 지치고 포기하는 그 수많은 경험들이 결국 쌓이고 쌓여 축적된다면 그 쌓인 경험들은 그 자체로서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을 수 있겠고, 이는 실험자의 입장을 말한다. 실험자는 실험을 한다. 그 실험은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이며 실험자는 신이거나 전능한 무엇으로 여겨지고 있다. 꿈은 몽롱하다. 오감이 없다. 혼이라 칭할 어떤 정신상태만 있다. 육(신체, 물질)이 힘을 쓰지 못한다. 현실은 뚜렷하다. 오감을 활용한다. 신체에 이성을 덧붙여 감정을 담아 살아간다. 육(신체, 물질)이 힘을 쓴다. 정신(마법, 정령)이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런데 판타지 세상이 열렸다. 현실세상에서 정신(마법, 정령)을 쓴다. 정신의 힘은 꿈에서 가능하다. 다시말해, 꿈에 연결하여 현실에서 발휘한다. 다시말하면, 현실에서 바람이 꿈에서 사실그대로 느끼는 체감이 가능하게 된다. 

 

꿈에선 사실그대로 체감할 수 없다. 체감은 육체가 느끼는 감정이니 당연하다. 꿈은 육체가 없다.

현실에선 정신의 힘을 쓸 수 없다. 육체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정신의 힘이 약하다. 아니, 지극히 미약하다. 그 힘이 발휘될 틈이 없다. 익히기 조차 어렵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꿈과 현실을 연결한다는 것은 판타지 세상을 연다는 말인가?

목적이 무엇일까? 그냥, 하다보니 닿은 것일까? 누군가의 게입인가? 아니면 순리인가? 가는대로 가는, 우려는 쓸데없는.

 

꿈을 꾸며 바라고바란다. 무엇을. 간절히 원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기억하겠어 라는 주문 보다는 그 정신에 대한 힘(현실에선 기술에 가깝다) 이라기 보다는 꿈에서 발휘되는 그 근원, 꿈에 닿아 있는 상태에서 바라고 바랄 수 있는 그것.

 

현실을 살며 바라고바란다. 무엇을. 간절히 원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기억하겠어 라는 주문 보다는 그 육체에 대한 힘(정신에선 기술에 가깝다) 이라기 보다는 현실에서 발취되는 그 근원, 현실에 닿아 있는 상태에서 바라고 바랄 수 있는 그것.

 

즉, 현실을 살며 바라고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달려있다. 

기술인가? 삶의 목적인가? 과정인가? 사실, 나열된 기술, 목적, 과정은 모두 경험에 해당하며 그 자체는 실험자의 몫이다. 난 실험자가 아니다. 실험체는 경험을 한다. 실험자는 경험하지만 축적되는 실적이 한정적이다. 실험체는 경험한다. 어떤 경험을 할지, 주어진 배경에서 활략을 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냥 살다보면 되어진다. 의미를 갖든 의미를 놓쳤든 누군가에게 기회가 되었든 기회를 맞이했든 그 결과 경험 중에 성공이라 칭하든 실패라고 칭하든 멈추지 아니한다면 결국 실험체로서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실험체, 실험의 목적에 부합하려면 실험체로서 역할을 다하면 된다. 우주, 지구, 바다, 육지, 그리고 시대, 반복, 그 속에 하나에 불과한 부속품. 길어야 100년을 하는, 과거 50년이었다면 50년을 더 늘린, 실험체로서 주어진 역할을 다하는 방향에서 수명을 늘린 만큼 경험을 쌓는, 실험자와 실험체 모두에게 이로운, 그렇다면 수명을 연장하는 활동이나 그 역할이 실험의 목적일까? 우주개척을 해내면 그것이 끝일까? 우주 너머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다면, 패신저스처럼 100년이 걸려 잠들어 있다가 그곳에서 다시 생을 이어간다면 멈추었던, 멈춘, 잠이 든, 그 시간, 그 멈춘 시간은 단지 살아갈 새로운 경험을 위한 잠이 든 것일까? 목적을 위해 잠든 사람들, 동 시대에 살지 못한, 살아가는 사람들과 헤어진, 주인공이 찾은 그 사랑은 단 1명만 다시 잠들 수 있다는 조건에 부딪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헤어짐, 이별, 죽음, 사라짐 이런 말들이 안타까움을 일으키면서 경건하게 만든다. 함께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말은 즐거우면서 행복감을 일으킨다. 둘 모두 곁에 있다. 어느 하나가 빠진다면 어색해질 만큼 각각의 소중함을 알게 한다. 결국, 그 키는 감정에 달려있다.

 

감정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꿈에서 겪은 경험 또한 감정을 산물로 얻는다. 감정은 꿈과 현실을 잇는 공통점이다. 지극히 강하게 간절하게 바라고바란 감정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닿는다. 꿈에서 느낀 감정을 현실에서 느낀다. 현실에서 느낀 감정을 꿈에서 느낀다. 상황에 따라 경험하는 정도에 따라 감정을 느끼는 차이가 난다. 결국, 일을 하거나 사랑을 하거나 함께 하면서 외롭지 아니하도록 하거나 하는 일련의 활동은, 살아나감은 감정 때문이다. 감정을 얻고 감정을 쓰고 살아간다. 감정은 삶을 살아가는 산물이면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동기가 된다. 그래서 우린 수양을 한다. 그 중에 정신수양은 감정을 추수리거나 숨기거나 아닌 척하거나 현실과 괴리감을 두는 쪽으로 유인한다. 감정을 다스린다. 현실과 잇는다. 수양을 한다. 감정을 다스리고 현실을 잇는다. 꿈을 꾸메 감정을 누리니 이 보다 좋을 수가 없다. 깨어난 현실이 꿈과 같다. 이는 마음에 달린 일이라고 한다. 마음은 근간이다. 감정을, 현실을, 꿈을 갖게 하고 갖고자 하며 버리고 버리고자 하는 비우고 채우고 채운 것을 다시 비우는 반복을 통해 수련하게 만든다. 마음을 다스려 감정을 통하여 꿈과 현실을 잇는다. 함께 함을 인지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꿈인가! 현실인가!

 

 

 

  • 스스로 `自`2022.06.27 16:34

    퇴근시간이다. 단초만 남긴다. 여운처럼.
    다시 빠져들 그 때, 여럿 단초를 갖고 다시 빠져들어 보겠다.
    과연 내가 바라는 것이 기술(경험, 육체의 힘, 정신의 힘)인가?
    실험체로서 그것 외에 더 바랄 게 있을까?
    실험을 이어나가기 위한, 다르게 본다면 실험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에 대한 접근은 없다.
    받아들였다. 나이가 드니, 얼토당토함 또한 육체에 기반하게 된다. 결국 숙명처럼, 실험체는 각성이라는 힘과 깨달음이라는 돌파구가 있음에도 나이라는 제약 또한 있다.

    실험체로서 수많은 경험을 쌓을 수는 없다. 혼자. 그러니 여럿이 수행한다.
    그 힘을 키운다.

    실험체에게 각성이란 힘이 주어졌다.
    깨달음을 얻는다. 마음의 평안, 육체의 힘, 바라봄, 느낌, 안도감, 열정, 꿈에의, 신선이 되는, 천국에 가는, 흩날리는, 이어지는, 소망, 혹은 색이 없는, 형체가 없고, 바람도 없는, 생각의 범주가 시공간을 배제한, 생각조차 없는, 무의 공간. 무는 망이 아니라, 몽에 가깝다. 몽하면 꿈을 얻는다. 망하면 무에 가깝다. 선택의 문제인가? 둘 모두를 갖고 있기 때문에 겪는 혼선인가? 꿈과 현실이 나란 매개로 함께 하고 있듯이 무와 망과 몽은 이어져 있다. 아니라면 없겠지. (모른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고 바라는 바는 무엇인가?
    필요한 일을 할 것인가?
    바라는 일을 할 것인가?
    탐구할 것인가?
    수행을 통해 나아감에 있어 각성을, 깨달음을 좇을 것인가?
    잊기 위한, 잊음에 대한 아픔을 견디기 위함인가?
    도망인가? 회피인가?
    온전히 간직하기 위함인가? 후회인가? 한계인가?

    답을 알고 있는 듯, 없는 듯. 평안한 것이 욕심이 없으니, 이 또한 하지않는 것이 아님에도 흥이 나듯, 찰라 성격을 바꿀 수 있듯, 아니될 무엇도 없듯이, 되고 되는 그것을 바라는 욕심이 한켠에 있듯이, 그런들 하면서도 그러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이 한켠에 있듯이, 아닌들 무엇이 괴로운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한다면 아니오 라고 바로 답할 것이면서, 나의 변화에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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