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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전달하기(교육강의, 2014.1.~)

저도 말해도 될까요

by 큰바위얼굴. 2022. 11. 7.


무대만 서면 덜 덜 덜, 방금 격한 수다 떨던 그 사람 맞나

무대에 서면…나의 이야기가 입체가 된다.한겨레 2022-11-06 08:00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65894.html

 

무대만 서면 덜 덜 덜, 방금 격한 수다 떨던 그 사람 맞나

[한겨레S] 양다솔의 저도 말해도 될까요이야기들은 어디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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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양다솔의 저도 말해도 될까요


이야기들은 어디로 갈까

말하기 워크숍의 원칙은 단 한가지다. “무슨 말이든 해 봐.” 한명도 빠짐없이 5분 동안 무대에 올라야 한다. 무슨 이야기든 상관없다. 필요한 것은 공간과 사람뿐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이면 그곳이 무대가 된다. 그 시선의 한가운데 선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 사람이 입을 떼기 시작하면 나머지는 관객이 된다. 이 모임의 메커니즘은 오로지 모두가 무대에 선다는 공평함의 원칙에 기대어 있다. 그것은 워크숍을 도와주러 오는 외부 스태프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 프로그램 스태프가 방문 지원 예정입니다’라는 문자를 받으면 나는 답한다. ‘그럼 그분도 당연히 무대를 하시겠지요?’ 그 덕에 워크숍은 매번 외부의 도움 일절 없이 몹시 단출하다.

어느 날부터 나는 말하는 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너무나 중요한 일인데 아무도 하지 않아서다. 말하기를 하는 워크숍이라니, 그런 게 진짜 있나 싶고 웅변대회나 토론대회를 준비하거나 스피치를 배우는가 싶겠지만, 모두 아니다. 3년 동안 격주에 한번씩 모여 서로 돌아가며 무대에 오르는 스탠드업 코미디 모임을 운영하며 느낀 것은 우리 모두에게 무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핵심은 하나, 자기 이야기로 무대에 서는 것이다.
일단 무대 위에 선 사람은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지고 목소리를 떨기 시작한다. 마치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공간과 다시 마주한 것처럼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방금까지 테이블에 앉아서 정신없이 수다를 떨던 그 사람이 맞나 싶다. 주어진 것은 위치와 역할뿐인데 공간의 역학관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속내를 털어놓는다. “제가 지금 굉장히 떨리는데요.” 쏟아지는 눈빛, 가득 찬 침묵, 울리는 목소리, 흘러가는 시간. 그 속에서 아무 말이나 할 수는 없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한가지 사실을 마주한다. 바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얼굴들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얼굴’은 내가 무대에서 가장 자주 마주친 얼굴이다. 오는 길에 버스가 막혔던 일이나 어제 먹었던 맛집의 서비스, 요즘 사고 싶은 물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무대에서 내려가지만, 그것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라는 걸 곧 깨닫는다. 눈치챈 순간 자신이 무대 한가운데에서 돌부리도 없이 넘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최초의 화자는 방황을 시작한다. 무대라는 공적 공간과 말하는 이의 사적 언어가 충돌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 무대에 선 사람은 자신이 화자로 무대에 선 경험이 놀라울 만큼 전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대에 올라본 적이 없고, 그렇기에 자연히 무대에서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고민한 적이 없고, 삶의 어떤 것이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난 삶의 무대들을 돌아보자. 과제 발표, 반장 선거, 토론대회, 프레젠테이션, 피칭…. 그 외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지극히 보편적인 경우다. 살면서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기회는 무척 제한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모종의 자격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이 사회 안에서 생기는 이야기의 장은 성공한 자가 오르는 성공담의 무대, 이념을 말하기 위한 종교 혹은 정치적 무대, 배움과 가르침을 주는 무대에 국한되어 있다. 이 세 공간을 권력이라는 단어와 떼어 설명하기란 어렵다. 누군가는 평생을 청자로 산다는 뜻이다.


언어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도구다. 우리는 몇 글자 안에 같은 뜻을 담기로 약속하고 즐거움을 느낀다. 표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묵언을 ‘수행’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신나게 이야기하는 공간은 어디일까. 절친한 친구와의 전화 통화, 한껏 분위기가 오른 술자리, 가족들과의 편안한 대화들 속에서 우리는 좀처럼 할 말이 마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말하기 워크숍의 무대는 강단과 술자리 사이 그 어디쯤에 있을까?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무대에 서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이 아주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과제나 성과를 발표하는 등의 목적이 없이, 오롯이 자신의 이름으로 자기 삶의 이야기를 펼쳐본 사람 말이다. 그것은 마치 문맹과 문맹 아닌 것의 차이만큼 크다. 무대에 오른 사람은 말하기를 거듭하며 조금씩 목격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가장 사적인 이야기 속에 희미하게 교차하고 있는 공적인 순간들을. 성 정체성과 종교, 결혼과 육아, 부모와 학력, 가정폭력과 성폭행, 계층과 지역, 세대와 노동이 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 있다는 사실을. 나의 이야기는 오롯이 나의 이야기였던 적이 한번도 없음을 알게 된다. 내 안에서는 단면으로만 존재했던 이야기가 무대에서 입체가 되는 경험을 한다.

낯선 타인의 세계에 통용될 언어


처음으로 낯선 관객들을 마주한다. 친구나 가족이 아닌, 내 삶의 맥락이나 배경을 전혀 모르는 불특정 다수다. 나에게는 몹시 익숙하고 편하게 쓰이는 단어가 그들에게는 전혀 다른 뜻과 뉘앙스로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우리가 사실은 모두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낯선 타인이라는 다른 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언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그 사이에서 웃음이 피어나는 순간은 그 우연한 접점을 찾은 순간이다.


삶에는 그저 몇번의 수다로 털고 넘어갈 수 없는 희비극이 있다. 누군가에게 비밀처럼 털어놓으면 “혼자 듣기 아깝다”는 답이 돌아오는 이야기들. 시간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고, 아무리 말해도 지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몇번의 수다로 발화되고 사라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빛을 보아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나라는 사람을 대표하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이전부터 궁금했다. 그런 이야기들은 어디로 갈까. 그 귀한 순간들이 가야 하는 무대는 어디일까.


아찔한 첫 무대의 방황은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는다. 그것을 수치심으로 부르지 않기로 한 사람들만이 다음 워크숍에 모습을 드러낸다. 회차를 거듭할 때마다 라운드가 올라가는 것처럼 사람들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무대 위에 선 그들은 어쩌면 ‘절대 무대에서 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부류의 사람’에 가깝다. 놀라운 것은 그런 그들이 서 있는 그 순간이 무척 무대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간혹 어떤 순간 완전히 방황을 멈춘다. 바로 그때 이야기는 제자리를 찾는다.


양다솔 _ 글쓰고 말하는 사람이다. 에세이집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유료 뉴스레터 ‘격일간 다솔’을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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