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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이슈/K-Food· ODA

음식, 잘 포용한 나라가 '소유권' 갖는다

by 큰바위얼굴. 2015. 5. 7.

음식, 잘 포용한 나라가 '소유권' 갖는다

조선일보 2015.5.7

 

 

原豆 생산 않고 가공 능력으로 커피 강국 된 스위스·이탈리아
남미産 고추를 김치에 활용해 매운맛 元祖로 인식되는 한식
정통·퓨전 韓食 따질 게 아니라 우리 것으로 소화·再창조해야

 
지난 1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개막한 세계 박람회 '2015 밀라노 엑스포'에서 스위스관은 가장 눈에 띄는 국가관 중 하나다. 세계 박람회는 1851년 런던 만국 박람회로 시작해 각국의 산업화를 자랑하기 위한 공산품 전시 행사였지만 이제는 인류가 당면한 이슈를 주제로 전 세계에서 지혜를 모으는 축제이자 참가국의 문화 전반을 선보이는 '문화 올림픽'이다.

이번 엑스포의 주제는 '음식'이다. '인류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제공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각 참가국이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해 관람객에게 선보이는지가 관전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스위스가 자국 파빌리온(Pavillion· 국가관)에서 내세운 음식 중 하나는 커피였다. 스위스관에서 관람객을 안내하던 가이드는 "커피는 스위스가 가장 많이 수출하는 식품"이라고 말했다.

단 한 톨의 커피 원두도 생산하지 못하는 스위스가 주요 커피 수출국이라니? 물론 인스턴트 커피를 세계 최초로 대량생산한 나라가 스위스다. 인스턴트 커피는 1901년 일본계 미국인 과학자 가토 사토리가 발명했지만 생산 원리를 찾아낸 데 불과했다. 이후 1938년 커피 과잉생산으로 허덕이던 브라질 정부는 스위스 다국적기업 네슬레(Nestle)에 "커피 재고를 처리할 방안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네슬레는 인스턴트 커피 '네스카페'를 개발해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인스턴트 커피가 전 세계에 빠르게 보급된 계기였다.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캡슐 커피의 원조 '네스프레소' 역시 네슬레가 개발했다.

그래도 의아해서 자료를 찾아봤다. 국제무역센터(ITC)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스위스는 4만7908t의 로스트 커피를 수출했다. 물량으로 보면 독일·이탈리아·미국·폴란드에 이어 세계 5위였다. 하지만 가치로 따지면 19억8000만달러로 1위였다. 스위스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엄청난 커피 수출국인 것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커피 원두를 생산하지 못하지만 세계 커피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로는 이탈리아도 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커피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따라서 커피 원두를 아라비아반도나 남아메리카, 북아프리카의 커피 생산국에서 100% 수입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이탈리아 커피'라고 말했을 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스위스 커피' '이탈리아 커피'라고 했을 때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커피는 원자재인 커피 원두가 어디서 생산됐느냐만큼이나 어느 나라에서 로스팅(roasting), 즉 가공됐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커피 원두를 수확해 바로 먹으면 별다른 맛이 없다. 원두를 뜨거운 불에 볶는 로스팅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우리가 아는 씁쓸하면서도 구수한 커피 특유의 맛과 향을 갖게 된다.

커피를 얼마나 로스팅하느냐는 로스팅이 이뤄지는 나라 국민의 입맛이나 커피를 즐기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뜨거운 물을 많이 부어 양이 많고 부드러운 커피를 선호하는 북유럽에서는 로스팅을 연하게 한다. 그래서 스위스나 독일·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에서 로스팅한 커피는 상대적으로 옅은 갈색이다. 반면 이탈리아는 적지만 강렬하고 진한 커피를 선호한다. 그래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개발했고, 에스프레소에 최적화된 강하게 로스팅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일리(illy), 라바차(Lavazza) 등 이탈리아 커피회사의 커피 원두가 검정에 가까운 짙은 갈색을 띠는 이유이다.

게다가 이탈리아에서는 에스프레소에 우유나 우유거품을 더한 카푸치노, 라테 등 다양한 커피 음료를 개발했다. 이탈리아식(式) 커피 문화가 스타벅스라는 미국 기업을 통해 전 세계로 퍼졌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이탈리아 커피'라고 했을 때 이상하게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커피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음식은 식재료의 원산지가 어디냐보다는 누가 더 잘 받아들여 자기만의 문화로 창조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고추만 해도 원래 한반도에서 자생한 식물이 아니라 남미대륙에서 스페인을 거쳐 한국에 전해졌지만 그 어느 나라보다 훌륭하게 한식에 통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고추의 매운맛' 하면 한국이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나라가 됐다.

식재료뿐 아니라 음식도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보다는 누가 더 훌륭한 문화로 발전시키는지에 따라 '소유권'이 판가름 날 수 있다. 세계 요리업계 전문가들이 선정하는 '세계 50대 식당'에서 지난해 1위를 차지한 덴마크 코펜하겐 '노마' 레스토랑의 오너셰프(주방장 겸 주인) 르네 레드제피(Redzepi)를 최근 만났을 때 그는 "한국 김치는 유럽 피클처럼 단순 절임이 아니라 젖산발효를 거친 복합적이고 훌륭한 발효음식"이라고 했다. 이 덴마크 셰프가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김치에 대해 더 잘 아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만큼 세계적인 셰프들이 한국 발효 음식을 주목하고 연구하고 있다. 그들이 한국 음식으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면 그들의 음식이지 더 이상 한식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도 정통 한식이니 퓨전이니 따지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외국 음식을 받아들여 우리만의 것으로 소화해 새로운 한식을 계속 창조해 나가야 한다. 고추를 기꺼이 받아들여 한식의 일부로 만든 우리 조상들처럼.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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