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 삽입 없이 농작물 유전자 교정 성공
경향신문 2015.10.20
국내 연구진이 DNA를 집어넣지 않은 ‘유전자 편집’ 기술을 통해 농작물 유전자를 교정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외부 DNA를 사용한 유전자 변형이 아닌 까닭에 유전자변형식물(GMO) 논란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래창조과학부는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 김진수 단장(왼쪽 사진)과 서울대 생명과학부 최성화 교수(오른쪽)팀이 공동 연구에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CRISPR/Cas9)을 이용해 식물 유전자를 교정하는 데 성공했다고 19일 밝혔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유전자의 특정 부위를 절단해 교정을 가능하게 하는 RNA 기반 인공 제한 효소다. 미생물 면역체계에서 비롯되었으며 DNA를 자르는 Cas9과 DNA를 인식하는 가이드 RNA로 구성된다. 이번 연구에서 연구진은 상추에서 식물 생장·발달 조절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교정해 스트레스에 강한 성질을 가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담배의 식물 호르몬 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도 교정했다.
그간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는 외부 DNA의 사용 여부를 기준으로 GMO를 판단해왔다. 연구진은 “이들 식물체는 자연적 변이와 구별할 수 없는 작은 변이만 가지고 있어 GMO와 다르다”고 설명했다. 연구결과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 온라인판에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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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병 유전자만 싹둑, 세포 치료제 개발 가속도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 혁명
중앙선데이 2015.10.18
50년 전만 해도 바나나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 크고 껍질이 두껍고 단맛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바나나를 찾아볼 수 없다. 1960년대 곰팡이 ‘TR1’이 일으킨 ‘파나마병’으로 불과 반세기 만에 이 품종이 지구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바나나는 뿌리만 땅에 옮겨 심어도 쑥쑥 자란다. 바나나의 맛과 모양이 일정한 이유다. 대량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다양성 없는 ‘복제품’ 바나나는 단 하나의 곰팡이에도 속수무책 당할 운명을 안고 있다. 지금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TR1’에 내성을 갖는 상업재배 품종이다.
이마저도 최근 강력한 변종 곰팡이(TR4)의 등장으로 멸종 위기를 맞았다. 식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바나나, 구할 방법은 없을까?
DNA(유전체)는 4개의 염기(A·T·G·C)로 구성된 유전 암호다. 이 중에서 생명 현상에 직접 관여하는 부분을 유전자라고 한다. 인간의 경우, 각 세포는 30억 개가량의 염기가 있는데, 지금까지 찾아낸 유전자는 2만 개가량이다. DNA를 전부 ‘해독’해도 각각에 담긴 정보를 확인하거나 바꾸는 일이 어려웠다.
그러나 유전자 가위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유전자를 잘라내면 세포는 생존을 위해 손상된 유전자를 스스로 보수(repair)한다. 이 과정에서 염기가 들어가기도 하고, 순서가 바뀌거나 심지어 빠질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세포의 변화를 일으키고, 이를 분석하면 해당 유전자가 품고 있는 ‘비밀’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 김진수(서울대 화학과) 단장은 “유전자 가위를 통해 진화의 산물인 인간이 진화의 방향을 설계할 ‘프로그래머’로 거듭나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테리아 유전자서 찾은 기술
이 유전자 가위가 바로 ‘바나나 암(TR4)’에 맞설 인류의 ‘무기’다.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바나나 구하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IBS 유전체교정연구단 김상규 박사는 “오늘날 바나나 품종은 1만 년 동안 품종개량을 통해 얻었지만, 지금은 유전자 가위를 활용해 짧은 시간에 ‘TR4’ 내성 품종을 확보할 수 있다”며 “외부에서 유전자를 넣지 않고 내부 유전자에 변화를 일으켜 기능을 확보하기 때문에 유전자변형작물(GMO) 논란에서도 자유롭다”고 말했다.
유전자 가위는 말 그대로 유전자를 자르는 기술이다. 현재까지 개발된 유전자 가위는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2003년 개발됐다. 1세대 징크핑거 유전자 가위는 ‘징크핑거’라는 단백질이 유전자를 인식하고, 이와 연결된 제한효소(Fok1)가 유전자를 자른다. 징크핑거 단백질 1개는 염기 3개를 인식한다. 유전자 가위가 원하는 유전자에 붙으려면 9~18개의 염기를 인식해야 한다. 징크핑거 유전자 가위는 레고 블록처럼 조립할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단백질의 성질이 달라지기도 하고 제작 비용도 높아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탈렌’은 2세대 유전자 가위다. TALE 단백질이 1개의 염기를 인식하고 제한효소(Fok1)가 유전자를 자른다. 1세대보다 더 정밀하지만 단백질 조립이 더 복잡하다. 이러면 유전자 가위의 크기가 커져 세포 속에 넣기가 어렵다. 특정 유전자 염기에 맞춰 단백질을 매번 설계하는 것 역시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기술이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다. 크리스퍼는 본래 박테리아 유전자에서 반복하는 특이한 염기 구조(팔린드롬, 기러기처럼 염기 순서가 앞뒤로 같은 부분)를 가리키는 말이다. 20년 넘도록 기능이 밝혀지지 않았다가 2007년에서야 비로소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박테리아의 ‘유전자 각인’이란 사실이 확인됐다.
이런 능력을 어떻게 유전자 가위에 활용할까. 박테리아는 과거 자신을 위협한 바이러스 유전정보를 자신의 크리스퍼 유전자에 ‘각인’시켜 후손에게 물려준다. 만일 비슷한 유전자를 지닌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박테리아는 이 ‘각인’에서 ‘가이드 RNA’를 만들어 바이러스 유전자를 인식하고, 제한효소(CAS9)로 잘라 돌연변이를 만들거나 죽여버린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이 가이드 RNA와 제한효소로 구성된다. ‘각인’이 아닌 특정 유전자에 붙게끔 가이드 RNA를 바꿔가며 활용하는 것이다.
유전자 가위 대량생산 길 터
가이드 RNA는 1개가 20개의 염기를 인식해 정확도가 높고 효율적이다. RNA는 DNA와 비슷한 구조라 단백질보다 유전자에 접근해 달라붙기도 쉽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 가지 유전자 가위를 모두 상업화한 ㈜툴젠의 김석중 소장은 “모든 유전자 가위는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전부 잘라내는데, 1, 2세대는 제작하기 어려운 단백질을 활용하는 데다 쌍으로 만들어야 해 기술장벽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가이드 RNA만 교체해도 손쉽게 새로운 유전자 가위를 만들고, 대량생산이 가능해 유전자 다중 변형을 일으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김 단장 역시 “가이드 RNA는 100달러로 2~3일이면 만들 수 있다”며 “같은 일을 1000달러를 들여 3개월에 하는 과학자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2013년 우리나라와 미국에서 처음 발표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은 불과 2년 만에 수천 개의 실험실로 퍼졌고, 적용 모델도 제브라피시·생쥐 등 작은 동물에서 소·돼지·원숭이 등 큰 동물과 벼, 옥수수 등 식물에까지 확대됐다. 세계적인 과학학술지 사이언스가 이런 흐름을 ‘크리스퍼 혁명’이라 표현했을 만큼 압도적인 전파다.
100달러로 2~3일 만에 만들어
유전자 가위 기술은 특히 의학 분야에서 적극 도입하고 있다. 유전자 치료는 1990년 선천성 면역결핍증 환자를 대상으로 처음 시도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건강한 유전자를 플라스미드 DNA(고리 모양의 DNA)나 벡터(독성을 없앤 바이러스)에 실어 인체에 집어넣는 것에 불과했다. 효과도 짧았고, 삽입된 유전자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원하는 유전자를 골라 자르고, 나아가 세포의 수선 시스템을 활용해 특정 유전자를 더하거나 빼는 것도 가능해졌다. CCR5 유전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대표적이다. 이 유전자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가 세포를 감염시킬 수 있는 문(수용체) 역할을 한다. 미국 생명공학 회사 상가모(Sangamo Biosciences)는 에이즈 환자의 면역세포(T-Cell)를 분리한 뒤, 징크핑거 유전자 가위로 CCR5 유전자를 없애고 다시 투여하는 방식으로 면역체계를 회복하는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이 밖에 기존에 만들어진 벡터와 유전자 가위 기술을 융합해 혈우병·헌터증후군 등 유전병 치료에 활용하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동물 수준에서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유전자 기능이 드러나는 질환은 낭성섬유증, 겸상적혈구빈혈증 등 다양하다. 이 연구가 발전하면 인간의 유전병 치료에 활용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우리나라도 지난 7월, IBS와 연세대 공동 연구팀이 혈우병 환자에게서 떼어낸 체세포를 활용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치료 효과를 생쥐 모델에서 입증하기도 했다. 김 단장은 “IBS를 중심으로 줄기세포, 세포 및 유전자 치료, 신규 유전자 발굴 연구 등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대규모 융·복합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용 가이드라인 마련 필요
하지만 일각에서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유전자 가위 기술의 진보가 너무 빠른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4월, 중국 중산대 과학자들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을 인간 수정란에 사용하면서 이런 논란은 더욱 심해졌다. 비록 연구팀은 연구 목적으로 폐기 수정란을 활용했지만 교정 성공률이 30%대에 불과했다. 게다가 과학계에서 금기시하던 ‘배아 유전자 조작’을 별다른 제재 없이 수행했다. 김 소장은 “성인 유전자 교정은 그 세대에 국한되지만 배아 유전자를 교정하면 대대로 자손에게 전달된다. 유전병 치료에는 획기적인 대안이나 우생학적 관점에서 보면 난제”라고 설명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영화 ‘가타카’에서 등장하는 ‘맞춤형 아기’나 기존에 없던 돌연변이가 등장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게 일부 과학자들의 생각이다. 여기에 생태계 균형을 파괴하거나 유전자 변형이 새로운 ‘생물학적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분별한 사용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유전자 가위 기술을 올해 기술영향평가 대상 기술로 선정하고 경제·사회·윤리 분야에 미칠 영향력을 진단한 뒤 올해 말 발표할 예정이다. 김 단장은 “생명공학 역사상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처럼 빠른 시간 안에 폭넓게 확산된 실험 기법은 없었다. 이제라도 안전장치를 도입하고 기대되는 이익과 위험을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단장은 “단, 현재 정부는 생명윤리법을 통해 대부분 유전자 치료를 금지하고 있는데, 이러면 기술은 우리가 개발하고 시장은 해외 기업이 모두 장악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며 정책 개선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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