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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이슈/시장상황

계란은 언제나 옳다

by 큰바위얼굴. 2017. 4. 26.

계란은 언제나 옳다


한국일보 2017.4.26



스페인 식료품점. 천운영 제공



계란은 완전 식품이라고 배웠다. 그것만 먹고도 살아갈 수 있는 음식이라고 이해했다. 단 한가지 음식만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계란이라면? 누군가는 생각만 해도 닭똥 냄새 난다며 고개를 흔들겠지만, 나로서는 대환영이다.


계란은 언제나 옳으니까.


학창시절 점심도시락은 늘 계란말이었다. 계란말이가 안 되면, 밥 위에 계란 프라이 하나. 열 반찬이 안 부러웠다. 계란은 혼자서도 완벽하지만, 다른 재료를 변신하게 만드는 훌륭한 조력자이기도 하다. 굳은 식빵에 계란을 입혀 구우면 프렌치의 옷을 입은 토스트가 되지 않는가. 프렌치 토스트. 어릴 적 가장 처음 한 요리가 아마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술 먹은 다음날에는 무조건 계란 프라이로 해장을 한다. 눈도 채 못 뜬 상태에서 불을 올리고 기름을 두르고 계란을 깨고, 반숙 노른자를 호로록 들이마신 후에야 눈이 떠지고 제정신이 돌아온다. 계란 노른자에 숙취에 좋은 성분이 들어 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쌀은 떨어져도 냉장고에 계란은 안 떨어진다.


           

스페인 대표 음식인 감자 또르띠야. 천운영 제공



내 할머니는 계란을 쌀독에 넣어 두었다. 계란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해서라고도 했고, 쌀벌레가 생기지 않기 위한 방편이라고도 했다. 정말 그런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할머니가 쌀독에서 계란을 꺼낼 때면, 왠지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만은 명확하다. 무언가 비밀스럽고 소중한 것을 먹는 기분. 어미 닭이 잠깐 둥지를 비운 사이 훔쳐 나온 계란처럼, 약간 설레고 약간 죄스럽다.

아버지는 직접 닭을 키운다. 대여섯 마리밖에 안 되지만, 계란을 얻어 먹기에는 충분하다. 하루에 두어 알, 암탉이 품기 전에 얼른 훔쳐 모아 두었다가, 한 달에 두어 번 내게 보내온다. 아버지의 계란은 노른자가 노랑색이 아니라 주황색이다. 거의 붉은색에 가깝다. 노른자 색은 닭이 무얼 먹고 사느냐가 결정한다. 곡식사료를 먹은 닭의 알은 병아리색에 가깝고, 벌레 잡아먹고 사는 닭의 알은 붉은색에 가깝다. 싸돌아 다니며 벌레 사냥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인 녀석들이니 붉은 노른자 알을 낳을밖에. 이런 계란은 그냥 반숙으로 삶아 먹는 게 최고다. 소금도 찍지 말고 순전한 계란 맛만으로, 순정하게.


          

레부엘토. 천운영 제공



계란 없이 지낸 때가 딱 한번 있었는데 그런 고행이 없었다. 부산 금정산의 작은 암자. 어찌 어찌한 인연으로 공양보살 비슷하게 지내며 소설을 쓰러 들어갔다. 술도 고기도 없이 지낸 시절이지만, 내 기억엔 계란도 없이 지냈던 시절로 각인되어 있다. 스님이 되려던 것도 아닌데. 계란 프라이 없는 비빔밥이라니. 뭐 대단한 소설 쓰겠다고, 그냥 내려가자 싶었다. 때마침 공양보살이 나를 데리고 장을 보러 시내에 데려갔는데, 어물전 정육점 다 지나치는 장보기가 재미있을 리가 없고, 뭣 좀 먹고 가자며 기름 냄새 고기 냄새 밴 골목을 헤매다 들어간 곳이 콩나물 국밥집이었으니, 체면이고 뭐고 그냥 기회 봐서 터미널로 직행할 생각이었다. 따라 나온 수란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국밥에 따라 나온 수란 하나. 아름다웠다. 위대했다. 그리고 강력했다. 그 한 알로 절에서 한 달을 더 버틸 수 있었던 걸 보면.

그래서 식당을 시작할 때 메뉴에 계란 요리를 네 가지나 넣었더랬다. 스페인음식의 대표라 할 만한 또르띠야는 물론이고, 스페인식 오믈렛 레부엘토와 후식으로 또리하스까지. 계란에 대한 나름의 경의 표현이었다. 사람들도 유난히 좋아라 했다. 근처 가게에 계란이 바닥난 걸 확인한 후에야, 그 모든 게 계란 파동의 여파였던 것을 알았다. 음식을 내놓았을 때, 이런 귀한 계란을, 이라며 반가워했던 연유를 뒤늦게 알았다. 파동 중에, 껍질 색이 어떠니 수입을 하니 마니 뭐가 다르니 같니, 하는 수많은 진단을 뒤늦게 읽었다. 논란과는 상관없이 그냥 마음이 아팠다. 삶이라는 게 참.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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