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 거침없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김성호.
주진형 전 한화증권 대표가 전망한 내년 한국경제
[인터뷰]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
오마이뉴스 2018.12.05 08:42
문재인 정부 1년, 촛불이 어둠을 몰아내고 세운 민주 정권에서도 재벌개혁은 더디고 우리네 살림살이는 여전히 팍팍하기만 하다. 경제 개혁의 방향타는 어느새 갈 곳을 잃은 듯하다. 이 난국에 우리는 어떤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지난 11월 16일, 서울 강남구에서 만난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 이사 역시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과 정부 주도의 일자리 창출, 소극적 금융개혁 등 각종 경제 현안에 대해 가장 책임이 있는 정부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경제는 중병 증상이 심해지고 있는데 문제 진단을 피상적으로 했다"는 것이 그의 촌평이다. 그에게 각종 경제 현안과 평가를 물었다.
"지금 공정위에서 바뀐 건 수장 하나다"
- 지난 11월 14일, 증권선물위원회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2015년 회계처리를 '고의 분식회계'로 결론 내렸다. 한화투자증권 대표 시절, 유일하게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반대 보고서를 쓰기도 했는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단순히 삼성 총수, 조직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나라 권력 엘리트, 언론 엘리트, 경제 엘리트들이 다 같이 암묵적으로 가담한 사건이다. 당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때 금융위원회나 금융감독원이 조금만 상식적인 판단과 행동을 했어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불가능했다.
아직도 왜 굳이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상장하려고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재용(삼성전자 부회장)씨는 박근혜 정권 하에서 (경영권 승계 문제를) 후다닥 처리하려고 하다가 되레 큰 덫에 걸린 거다. 그걸 우리나라 엘리트들이 어디까지 밝혀낼지 관건이다. 과거 이건희 수사 때도 마찬가지지만 중간에 타협하고 돈으로 얼버무리려는 버릇은 한국사회의 고질이다. 두고 봐야 할 일이다."
- 일각에서는 현 정부가 우클릭하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
"정부가 '우클릭'한다는 소리를 듣는 가장 큰 이유는 재벌개혁에 적극적인 움직임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재벌 개혁을 하려면 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면 공정거래위원회가 몇 가지 규칙을 바꾸면 되지 않느냐고들 말하지만, 지금 공정위에서 바뀐 건 수장 하나다.
공정위는 수십 년 동안 선후배끼리 뭉쳐서 낙하산으로 먹고 살아온 관료 조직이다. 그래서 정권 초기마다 개혁 인사를 공정거래위원장으로 보냈지만 알다시피 잘 안 바뀐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지금의 폐쇄적인 관료제에 장관 하나 보내서 개혁하겠단 생각 자체가 안이한 거다. 개혁을 하려면 그 개혁의 근본적인, 구조적인 틀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파악해서 틀을 바꾸는 시도를 해야 한다."
- 어떤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보는 건가.
"첫 번째는 권력 집중의 문제다. 행정부 관료에게 지나친 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재벌에게는 경제력이 집중되어 있고, 언론도 미디어 권력이 장악하고 있다.
두 번째는 투명성 문제다. 이제는 '경제민주화'라는 말이 식상해졌다고 하지만, 사실 경제민주화의 포인트는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는 거다. 그 분산의 대상이 첫 번째가 관료고 그다음이 재벌인 거다. 재벌 개혁에는 공정위와 금융위라는 두 개의 칼이 있는데, 금융위가 지금 할 수 있는 걸 제대로 안 하고 있다. 삼성생명 문제만 보더라도, 보험법 시행규칙만 바꾸면 되는데 안 바꾸고 있지 않나."
주 전 대표의 대중 인지도가 높아진 건 지난 2016년 12월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 때였다. 한화투자증권 대표 이사 시절 유일하게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반대 보고서를 쓴 그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바로 뒷자리에서 "우리나라 재벌들이 다 그렇지만 조폭 운영 방식과 같아서 누구라도 한마디 거역하면 확실하게 응징해야 다른 사람들이 따라간다는 논리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한겨레> 지면에 현 정부 경제 정책에 대해 칼럼을 쓰고 있다.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에만 맡기지 말자'(6월 13일자),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늪에 빠졌다'(9월 5일자), '거시경제 불균형, 보고만 있을 것인가'(10월 10일자) 등. 그는 지난 6월 13일자 칼럼에서 "나는 소득주도성장론에 회의적이다.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만원으로 올리자는 것에도 반대한다. 소위 속도조절론자"라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혁신하려는 사람은 혁신의 느린 속도까지 각오하고 시작해야"
▲ "혁신을 하려는 사람은 혁신의 느린 속도까지 감안하고 각오하고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혁신을 해본 사람은 혁신을 팔고다니지 못한다. 왜냐면 혁신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까. 아주 작은 것 하나를 바꾸는 데도 굉장히 힘든 거다." ⓒ 참여사회
- 문재인 정부 1년 6개월이 지났다. 정부의 경제 정책에 총평을 한다면.
"병으로 치면 한국경제는 중병을 앓고 있다고 본다. 점점 그 증상이 심해지고 있는데, 진단을 좀 피상적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국민소득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내려간다' '소득양극화가 심해진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임금 격차가 크다' '청년들 취업이 안 된다' 같은 건 병 자체라기보다 '혈압이 높다' '체온이 올랐다'처럼 어떤 증상에 가깝다. 그 증상 뒤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원인을 찾아내서 치료해야 하는데 지금은 보이는 증상에 맞춰 혈압강하제나 해열제만 처방한다. 왜 그런 일이 있을까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하고 대증적인 요법만 남발하는 거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일자리가 부족하면 정부가 고용하겠다고 하고, 임금 낮은 사람이 많으면 최저임금 올려서 맞춘다는 식이다. 임상경험이 없는 의사들, 어떻게 보면 책으로만 의학을 배운 사람들 같다. 그런 면에서 매우 어설프고, 지지층 사이에서도 그런 인식이 늘어나고 있는 걸 느낀다."
- 특히 소득주도성장을 두고 논란이 많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소득주도성장을 각자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있다. 콘텐츠 없는 구호가 돼 버렸다.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 말고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내놓은 것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은 실상 우리 경제에서는 제로섬 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 한 주머니에서 다른 주머니로 옮겨놓는 게 과연 소득주도성장인가.
소득주도성장의 포인트는 사회보장 제도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부분은 약하다. 대선 때 노인들 기초연금 30만 원 이야기했지만 1년 반이 지나고 나서야 25만 원부터 시작했다. 많은 진보 경제학자들이 최저임금보다 훨씬 낫다고 말하는 근로장려금은 왜 작년이 아니라 올해부터 하는가."
-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에 줄곧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왔는데.
"기존 파라미터 안에서 움직이던 시스템이 있단 사실은 존중해야 한다. 여러 경제 활동이 이미 조직돼 있는 시스템 말이다. 낮은 임금의 저생산성 노동을 기반으로 운영하는 비즈니스가 많다는 걸 무시하고 임금만 올려놓으면 (고용 위축으로) 노동자들은 자리를 잃게 된다.
(최저임금 수혜를 입는) 23%의 노동자들의 생산 활동은 그 자체로 다양한 것인데, 그걸 조정이 불가능하게 일괄해버리는 건 위험하고 졸속이다. 노동시간 단축도 마찬가지다. 1월 입법해서 7월 시행했는데 법 취지를 아무리 동조하는 기업인이라고 해도 나서기 어렵다. 왜? 아무도 안 해봤잖아. 아무도 안 가본 길이니까. 바꾸려고 한다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바꾸는 게 맞다.
혁신을 하려는 사람은 혁신의 느린 속도까지 감안하고 각오하고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혁신을 해본 사람은 혁신을 팔고다니지 못한다. 왜냐면 혁신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까. 아주 작은 것 하나를 바꾸는 데도 굉장히 힘든 거다."
"정보공개법 바꾸고 투명성의 책무 부과해야"
- 내년 한국경제는 어떻게 전망하나.
"더 어려울 거다. 자신들이 지른 불을 끄는 데 시간을 써야 할 판이다. 최저임금은 내년에도 두 자릿수로 오른다. 그 불을 끄느라 정신이 하나 없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개혁 동력을 차츰 잃어갈 것이다. 부동산과 금융 개혁은 제대로 못 해보고 사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무마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을는지. 물론 새 정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2%대 성장은 예견되던 바였다.
최경환 같은 사람들이 억지로 쥐어짜 부동산 경기를 일으키고, 반도체 성장으로 반짝한 면이 있을 뿐이지 저성장은 현 구조에서 당연하다. 다만 신뢰는 금이 가고 나면 회복하기 어렵다.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지도자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매우 중요하다."
- 결국 경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바라보는 시민의 역할이 중요하겠다. 시민들이 경제에 대한 눈을 키울 수 있는 왕도가 있다면 가르쳐달라.
"그 질문을 참 많이 듣는데, 뾰족한 답을 못해드린다. 다만 한국 사회에서 경제를 보는 시각에 커다란 왜곡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진보층의 경우, 지나치게 시장경제에 대해 적대적인 측면이 있다. 시장경제의 건설적인 기여는 '경쟁'인데, 그 역할이 있다는 것에 대해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또 보수층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경제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뭔가 해결해줄 거라고 믿는다. 특정 인물을 팍팍 밀어주면 경제가 다시 좋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미망이 굉장히 강하다. 그러니 진보든, 보수든 다 무슨 문제만 터지면 정부가 나서길 바란다. 그런데 결국 정부가 또 누구인가. 관료다. 법제적으로 관료의 책임과 권한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의 재량권만 올라가는 쪽으로 시스템이 공고화한다. 그런 면에서 시급한 것이 정보공개법 바꾸고 그들에게 투명성의 책무를 부과해야 한다."
- 유일한 저서가 <경제를 알아야 바꾼다>더라. 금융 관련 전문서적이 아닌 경제 입문서를 낸 이유가 궁금하다.
"시민들이 경제가 내용이 어렵다고 하니까 그걸 좀 쉽게 알리고 싶었다. 단순히 증권 시장의 이해니 이런 것보다 경제가 우리 실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고 우리나라 경제가 어떤 설계가 잘못되어서 이렇게 병에 걸렸는지 설명하자고 생각했다. 복잡한 경제 얘기를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고 설명하는 역할이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페북 라이브 '경제알바'를 함께 진행한) 손혜원 의원과는 방송 시작하기 이틀 전에 주제를 정했다. 경제 문외한인 그가 뭘 물어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도 미리 준비할 수 없었다. 그냥 즉흥적으로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상당히 논리정연하고 이해하기 쉽다는 얘기들을 많이 해주셨다. 그걸 책으로 엮은 거다."
-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학자의 길을 가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원래 선생을 하고 싶었는데 학위를 못 끝냈다. 그래도 머릿속에서는 내 아이덴티티가 학자인 것처럼 여기고 학자 같은 행동을 하며 사는 게 익숙하다. 사람들이 내가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자랑이 아니라 나도 옛날부터 조금 느꼈던 바다. 그냥 한번 생각하는 걸로 끝내지 않고 계속 오랫동안 붙잡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소위 그것의 정수를 찾게 되는 것 같다."
"어디 얼굴 비추고 자리 찾아다니는 스타일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을 대표하는 농업 경제학자다. 지난 11월 22일은 고 주종환 동국대학교 명예교수(1929~2014)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되던 날이었다. 1997년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 초대 이사장을 맡으며 시민사회 운동에도 족적을 남긴 주종환 교수는 '재벌경제론', '토지정책론' 등의 저작에서 재벌 체제 문제점을 분석 비판했고 토지공개념을 주장하며 시대를 앞선 통찰을 보여줬다. 평소 소신을 밝히고 권력 비판에 주저하지 않는 그의 기질이 아버지 영향인지 궁금했다. 주 대표에게 주종환 교수 질문을 하자 그는 복받친 감정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아버님은 굉장히 리버럴한 분이었다. 밝고 명랑하고 굉장히 자유주의적이었다. 아버지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계셨다. 서울대 문리대 예과를 가셨다가 몰래 밀항을 하고 일본에 가서 동경대를 고학해서 다니셨다. 미국 유학 갈 기회가 있었는데도 안 가시고 다시 한국에 오셔서 당시 우리나라 빈곤층이 농부들이니까 농업경제학을 전공으로 삼으셨다.
가정적으로는 굉장히 자상하고 자유주의적인 아버지였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혜택 받은 환경에서 자랐는지 모르고 자랐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 소위 말하는 권위주의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나 사회 분위기 속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부작용도 있었던 것 같다."
- 아버지께서는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 초대 이사장으로 작년엔 명예회원에 위촉되기도 하셨다.
"당시 경실련이 지나치게 명망가나 학자 위주로 가고, 노동 문제에 적극적으로 안 나선다는 불만을 갖고 계셨다. 그래서 참여사회연구소의 취지에 적극 동감해서 활동하셨던 것으로 안다. 어쨌든 아버지는 권력이나 돈 가진 거 이런 것을 아주 우습게 보는 분이셨다.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의무, 두 번째로는 자기 독립성에 대한 강한 자존심, 그런 것을 갖고 계셨다고 생각한다."
- 앞으로 행보에 궁금한 이들이 많을 것 같다. 계획이 있다면 들려달라.
"글쎄. 특별히 계획하고 있는 건 없다."
- 혹 정부나 관련 단체에서 함께 해보자는 제안이 온다면?
"그건 권력을 가진 사람이 신임을 갖고 내게 부탁할 때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아닌가. 나 혼자서 이야기하는 건 무의미하다. 어디 얼굴을 비추고 자리를 찾아다니고 그런 스타일은 아니다. 게으르고 오만한 편이다.(웃음) 누구한테 날 써달라고 이야기해본 적 없다. 뜻을 같이할 수 있으면 하고 아니면 같이 하지 않으면 된다. 좋게 말하면 무위도식, 나쁘게 말하면 허송세월, 그게 나한테 딱 맞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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