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 입장에서 얻은 결론
"플레이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 역할을 받아들이고 어디까지 고려할 것인지에 대한 사고의 범주를 확장하는데 달려있다. 당대에 끝내고 별 생성의 자원으로 쓰일 것인지, 후대로 이어져 별 생성과 사멸의 순환 고리에서 제역할을 찾을 것인지는. 형태가 달라질 뿐, 어느 것도 바뀌는 것은 없다. 나아가야(= 살아가야, 생각해야, 감정을 느껴야, 행동해야) 한다 라는 대명제가 있다고 여기는 한. 그래서 가만히 머물길 권한다.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다면 있어 보라는 식으로. 2024.10.15. 김성호.
요점: Humanity
인류애라는 관점에서 논의를 재구성해 보면, 우리는 종종 숫자와 같은 단순한 현상에 매달리며 살아간다. 1 - 1 = 0이라는 산술적 결과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얻는 결과와 성취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가치는 그러한 결과에 있지 않다. 사랑, 충만감, 그리고 행복 같은 인간적 경험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다. 성공이란 부와 지위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와 순간에서 얻는 의미에서 찾아야 한다.
현대 사회는 지나치게 빠르고 복잡하게 변하고 있다. 기술과 AI의 발전 속에서 우리는 쓸모없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며, 끝없이 경쟁하고 스스로를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다름을 인식하고, 그 다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변화와 다양성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인류애란 단순한 이타심을 넘어,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를 존중하고, 함께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성장할 수 있다. 기술 발전이 가속화된 미래에서도, 우리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다운 경험과 공감이다. 그것이야말로 인류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이다.
인류애는 우리에게 그저 현상에 머물지 말고,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책임감을 요구한다. by ChatGPT.
[1] pure source: 녹음본
< 출근길 Feel 받아서 녹음한 내용. 옮겨 적고 교정하는데 며칠이 소요되었다. 녹음파일 용량이 커서 사진을 곁들여 영상으로 만든 제작본; 말하고자 하는 바의 생생한 목소리가 듣고 싶다면 눌러봐. pure source(녹음본) >> 교정 >> 퇴고 순임 >
https://youtu.be/XxpeUpAGm_w?si=KX-Dc5NHFopGoYdB
[2] 교정
2024년 10월 15일인가, 아마도. 오늘은 월요일이다. 지금 출근 중이다. 세종시에서 김제시로.
문득,
AI가 발전하면 가령 AI가 일을 대신하면 인류는 과연 뭘 해야 되느냐라는 질문이 까다롭다. 문학을 해야 한다라는 어떤 대안이 제시되기도 했어.
근데. 근본적으로 인류가 살아가면서 더 나아진다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왠지 더 가혹한 환경이 조성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어. 자 그 이유를 한번 설명해 볼게.
의문/ 근본적으로 우주든 사람이든 뭐든 존재하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잖아. 있게 된 거. 있게 된다라는 게 인식일 수도 있고, 그냥 뭔가가 있는 거잖아. 있는 거.
그런데 있게 된 순간부터는 가만히 머물기가 힘들어. 이걸 전제로 한다면 모든 걸 풀어내기가 보다 쉽다.
있게 된 순간 가만히 있으니까 너무 힘들어요.
힘든 거지.
그러니까 움직이지. 행동을 하거나 생각을 하거나. 생각은 좀 나중에 나온 것 같긴 한데 어찌되었든 행동을 하는 거지. 그 행동이 어떤 이유나 어떤 혜택 혹은 어떤 긍정적인 어떤 방향 발전, 뭐 이런 어떤 개념으로 시작했다기보다는, 그냥 정말 좀 더 본능에 가깝다고 봐야 하겠지. 인류 초기, 너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됐었어. 아무것도 없어 도구도 만들어야 되고 먹는 것도 알아서 해야 되고 뭐든지 다 스스로 했어야 되잖아. 자 근데 과연 지금이라고 다를까?
당장에 보이는 외부의 어떤 위협이나 위험이 내 앞에 닥친 어떤 과거의 괴물과 같은 존재는 없지만, 괴물이 들이닥친 상황이나 여건, 환경과 같은 상황은 똑같이 있는 거지.
지금 우리, 살기가 편해?
자 이렇게 생각하면 돼. 경제적인 상황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버틸 수 있어?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있어? 눈 뜨고 그냥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있냐고? 아니면 뭔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냐고? 없어. 없기 때문에 많은 일들이 발생하는 거잖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우리는 나서고, 나서는 순간부터 온갖 것들의 경험과 이런 걸 쌓아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있는 자체가 이미 시작의 발단이라는 거지.
인류/ 그리고 그 상황이나 환경은 사실은 배경이나 바탕에 불과하지만 우리를 정의하거나 우리를 뭐라고 하는 존재로서 해석하게 하는 바탕을 이루잖아. 그러니까 지금 AI를 가지고 AI가 대체하면 우리 인간은 뭘 하지? 라는 물음에 지나치게 몰입할 필요는 없다고 봐. 그게 아니어도 아니면 아닌 대로 다른 것이 대두될 게 뻔하니까. 자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게 다 AI가 스스로 하는 상황을 상상해봐. 그러면 우리 인간은 뭐하지?
가혹하지 않아?
뭔가를 우리가 찾아서 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면 뭔가 주어질 거야, 아니면 모두가 소설가가 되거나 문학을 해야 되니까. 그렇다면 예술로서의 어떤 승화, 이런 걸 인류가 하는 이유는 뭘까?
나 자신의 발전 혹은 어떤 대물림이나 역사, 근데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가 무수히 많은 노력을 했는데, 그 무수히 많은 노력은 한 개인에게 되물려주기가 어렵잖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중에 우발적으로 나온 능력의 개화를 기대하고 교육이라는 걸 통해서 싹 틔여 가지고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확률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해왔다는 거지. 근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됐지? 우리가 해온 수많은 노력과 집약된 어떤 경험치들이 AI 라는 무한 반복을 통한 학습을 통해 무한히 반복되는 학습을 통해서 개발이 되고 그 개발은 그 경험을 쌓는 시간을 압축시키고 그 압축된 시간을 통해서 학습한 양은 인간을 넘어선다는 거지. 어쩔 수 없어. 인간이 가진 노력 한계와 우리가 만들어낸 그 무지막지한 AI라는 개념이 이미 노벨상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받았고, 조만간 수학 혹은 문학 분야로 진출할 거라는 건 누구나 다 예상하잖아. 의료, 의료라는 게 내가 얘기하는 측면에서 볼 때 과연 고차원적인 AI가 필요할까? 인류가 다친 질병에 걸린 어떤 부분들이 우리가 다치고 꼬매고 하는 외과적인 부분에서 AI가 당장 필요하겠지만, 가령 당장은 치과나 눈에 쓰이겠지만 하지만 점점 나아가다 보면 - 결국 우리가 싸우는 건 가혹한 환경이라고 했잖아 - 질병이야,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우리 인류에게 퍼지는 폐렴이나 감기로 나타난 그런 원인이 되는 것들과 그리고 가축을 비롯한 모든 만물의 생명체들은 질병과 싸우고 있고 질병과 싸우기 위해서 바이오 산업이 커지고 있잖아. 어쩔 수 없이 가혹한 환경에 내몰린 거거든. 그러면 우리가 디펜스 할 건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 백신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 살아남을 거고. 왜냐면 코로나 19가 터졌을 때 우린 경험했지. 그냥 살아남는 사람만 생존하게 할 거냐 아니면 부작용은 있지만 모두가 백신을 맞아서 확산을 막고 우리 자신들의 어떤 방어력을 키울 거냐.
결과적으로 못 믿을 것이었어. 솔직히 말하면 백신은 경험도 없었고 처음 일어난 일이고 그 처음 일어난 일에 대한 기술이 RNA 기반의 어떤 유전자 조합이기 때문에 우리 인류에게는 엄청난 타격이었다는 거지? 그것도 DNA나 RNA 수준에서 발생했지. 물론 이것이 또다시 어떤 씨앗이 되어 우리의 진화나 인류의 발전에 있어서 새로운 어떤 코드가 심어졌으니 다시 태어날 이들에게 어떤 메시지 혹은 대물림이 일어날 거라고 봐. 가는 과정이니까. 근데 오늘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전제는 이거잖아. 사람은 혹은 생명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움직이기 시작했고 움직이게 되는데 이 움직이게 되는 원인이나 배경이나 바탕이나 환경이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든다는 거.
사람이 군집을 이루고 이런 살아가는 상황 속에서 어떤 사고를 했다고 생각하자고 생각을 하고 이 생각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부분에 있어서 계속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어. 그러기 위해서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어떤 것들이 있잖아?
모여 살아야 된다. 혼자는 안 된다. 나눠서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잘하는 걸 나누기 시작했잖아, 좀 더 잘하는 거 잘하는 걸 잘하는 사람에게 주고, 그 알맞게 분배하기 시작했지. 이건 본능적으로 일어난 거잖아, 자 그럼 지금이랑 달라?
다르지 않잖아, 우주를 개척한들 우리 인류가 과연 편하겠니?
우주/ 우리가 우주의 어떤 여행이나 어떤 기대나 희망에 가득 찬 혹은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외계인과의 만남이나 우주 진출이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줄까? 그걸 왜 우리는 우주로 나가야 되지라는 맹목성을 갖게 되었을까? 지구가 파괴되거나 환경이 오염되고 그렇다하더라도 화학 연로를 이제서야 버리려고 하듯이 나중에는 태양광이나 자연풍력 이것 또한 사실은 유한하잖아. 여기서 유연하다는 얘기는 뭐냐 하면 우리가 컨트롤 할 수가 없다는 걸 말해. 물론 인공 강우나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어떤 비, 눈, 바람, 기후 변화를 우리가 인공적으로 할 수는 있어. 다만 막대한 에너지를 써서. 근데 그 여파가 그냥 끝나지는 않잖아, 그건 그야말로 막대한 투입을 통해서 얻어낸 결과일 뿐이잖아. 그 감당은 모든 사람들이 해야 되는 거고, 같이. 그러니까 이런 일련의 상황이 지금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어떤 부분들이 점점 더 발전하고 발전할수록 발전에 대한 이유가 되는 원인이 되는 그 어떤 배경이 있기 마련인 거고 그러니까 우리가 AI가 필요해진 이유는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했다라기보다 인류의 역할이 다했다라고 보는 게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지. 인류가 능력의 한계에 부딪친 거야. 다만 아직 끝나진 않았지. 아직 인류가 잘하는 게 있으니까.
근데 인류가 인류로서 존재 의미는 유전자, 생명체, 살아있다는 바이오라는 개념, 생, 이런 용어적인 측면에서의 감정 혹은 이렇게 구분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영역은 또 다르지. 아무튼 AI가 나중에는 인류의 현재 역할와 같이 감당할 것이고 인류를 뛰어넘을 거라고 생각해. 시간의 문제잖아.
감정/ 사람은 감정을 갖고 태어나.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데 있어서 감정이라는 건 환경과 부모의 공동체와 인식과 인지를 깨닫게 하거나 자극을 주고 이런 부분들이 일어나면서 진화가 되고 그게 유전자에 각인하게 되지. 여기서 차이는 AI는 사람이 만들었고 사람이 만든 부분들이 대물림이 된다. 영속적으로 된다. 태어난다는 개념이 아니라 이 육신이나 육체라는 개념의 가두고 있는 이런 것들에서 탈피, 즉 벗어나야 된다라는 얘기야.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으로 대물림되는 현상들이 지금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이면에는 내가 볼 땐 자아실현이나 환경이 가혹하다라고 내모는 어떤 이유에서 찾겠지만, 그 이유조차 어쩌면 우리가 추구하지 않아도 이 상황에 맞닥뜨렸을 거라고 본다라는 거지? 한계에 부딪혔으니 도태나 아니면 거듭 다시 어떤 자각이나 푸쉬, 어떤 개념의 자극이 필요해졌다는 거잖아. 그래야 인류는 또 다시 나아갈 거 아니야?
지루해 한다니까. 가만히 있으면 되는대도, 도대체가 가만히 있질 못해.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다고. 가만히 있는 순간 그냥 본능에 살거나 본능이 아니라면 그냥 쾌락을 쫓거나, 쾌락도 어떻게 보면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발생한거니까. 그냥 그게 기계랑 뭐가 달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게임에 몰두하고 있고, 어떤 생각이라는 것 없이. 아 물론 그걸 이겨내기 위해서 그래서 소통하고 뭔가 개발하고 뭔가 이루기 위해서 바라고 끊임없이 추구를 하지. 다를 게 없다. 자연 속에서 짐승과 괴물과 어떤 그런 부분의 극복을 통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 왔다며, 지금은 사람과 자연에다가 사람과 어떤 현상, 기술, 어떤 뭐 귀신, 혼, 종교 등 우리가 만들어낸 수많은 의미들과 철학, 심리, 뭐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맞서야 되는 거니까. 이게 개인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나눠서 해왔지. 앞으로도 나눠서 하겠지. 그러다가 더 잘하는 AI가 어쩌면 만능이 될 수 있겠지만 그 그 만능인 AI와 접점에서 우리가 뭔가를 할 때에 순간에 처리하는 속도가 0.00001초라도 하나의 처리를 할 때 순서가 있잖아. 이 순서를 000000001초에 남았을 때의 순서라고 할지라도 그 순간에 반짝거리듯이 이미 우리 사람이 지금 백 년을 살아가는 시간을 반짝인거랑 다를 게 뭐야. 드래곤이 만 년을 살았을 때 인류의 백 년을 어떻게 볼까?
드래곤/ 우리가 하루살이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분야에 따라 달리 있겠지만, 그 안에는 그 세상에, 어떤 살아감이 있잖아. 그러니까 오래 산다고. 그래서 오래 라는 상대적인 가치에 너무 매몰될 필요가 없는 거야. 100년이든 만년이든 어차피 거기에 본인이 다녀온 드래곤이 만 년 중에 5000년을 잔다고 생각하자고. 자야만 한다고 저희 몸집을 키우거나 각성이나 성장을 하기 위해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지향하는 데 있어서 만약에 인류의 발전 모델이 드래곤이라고 한다면 내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거꾸로 생각해야지. 근데 판타지 세상이 다시 올 거라고 볼 수도 있어. 중세 시대로 다시 갈 수도 있고, 그냥 칼들고 싸울 수도 있겠지.
전쟁/ 전쟁이나 생화학적 무기로 인한 폐해, 전쟁 시 질병을 일으킨다거나 몰살시키기 위한 어떤 가혹하지만 치명적인 부분들이 이제는 조금만 신경 쓰면 만들어 낼 수 있는 환경이잖아. 이런 환경에서 과연 우리가 아무것도 없었거나 몰랐다면 우리는 그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갈 수가 있었어. 하지만, 이젠 늦었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거든. 어느 한 아웃라이어로 인한 폐해는 전 세계가 앓고 말 것이라는 거지. 그리고 과거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수준이 낮았었는데, 이젠 다르잖아. 지금 봐봐. 뭐 하나 터졌다면 이제는 한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가 들썩이잖아. 이게 말하란 게 뭐겠어?
이제 인류는 공동의 공통에 그러니까 상대가 생겼다는 거 아니겠어? 바이러스든 질병이든 AI든 철학이든 뭐 어떤 촉발된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든 어떤 원인과 끊임없이 싸우는 대상이 바뀔 뿐, 우주로 개척해서 우주로 나가는데 끝나겠자냐구? 또다시 어떤 지구를 꾸미거나 지구와 같은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화석연료가 아니어도 어떤 연료를 떼야 될 거고 태양광을 주로 활용할 수 밖에 없겠지만 근데 태양이라고 무한한 게 아니잖아. 유한한 상황, 여기서 보는 게 딱 그거잖아. 모든 건 유한한 태양이라고. 1초 만에 태양이 폭발할 거야? 이건 아니어도 아까 얘기했잖아. 속도가 역으로 빨라지고 있다고. 양자 역학을 통해서 더 빨라질 거라고. 0.0000001초의 시간에 데이타로 거듭나는 세상이 열릴 거라는 거잖아. 아니, 이미 열렸잖아. 우리 인간이 매개체로써 작동하던 세상에서는 인터넷 혁명이라든지 정보통신, 우리가 주고받기 위한 핸드폰, 어떤 이런 것들이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들고 보고 핸드폰으로 보고 활동을 해왔지.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까? 핸드폰을 들고다니고 싶을까? 아니잖아. 내 눈으로 아니 내 눈에 직접적으로 오게 하거나,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어떤 것들이 데이터가 내 머릿속에 그냥 들어오길 바라고 있잖아. 이 바라는 게 뭐야. 결국 이루어진다. 이루어지면 사람이 그냥 있어도 자기가 생각하는 순간이거나 어떤 설정된 값에 의해서 데이터가 그냥 지식으로 쌓이는 거지.
여기에서 과연 인류라는 생명체를 매개체로 활용하는 것이 발전을 위한 나은 선택인가? 새로운 매개체로 전환해야 하는가?
좋아. 부작용조차 없어. 시간이 생명력으로 대가성으로 지불될 수도 있겠고, 이미 예상가능한 범위이기 때문에 작용과 반작용의 고리를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만 어떤 충격적인 리스크는 없앨 수는 있다고 보는데. 자 그런 상황에서 헐, 지금 세종시에서 김제시로 고속도로에서 네비게이션 없이 운전하면서 녹음하고 있거든. 휴대폰을 들어서 입에 대고 말해야 하니까. 지금 어두워. 6시 12분을 지나가고 있고, 그 음 주간 단위로 다녔던 길이니까 과속 카메라 위치는 알고 있지만, 근데 얘기에 빠져서 얘기를 하다 보면 놓칠 수도 있잖아. 그래서 그런가 지금 안정적으로 100km/h 정도에서 가고 있어. 근데 평소와 다른 속도이기 때문에 아마 생각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하겠지. 그리고 내 옆에는 아내 서희가 싸준 우유와 식빵이 있잖아. 이것도 먹어야 되는데 난 입이 하나야 말도 해야 되고, 눈은 과속단속카메라 위치를 확인해야 하고. 보는 건 하더라도 말은 하면서 먹을 수가 없으니 여기에 어떤 힌트가 있지 않을까?
현재/ 눈은 바라보고 바라보는 거 하나잖아. 기능이. 근데 입은 두 개야. 먹거나 말하라는. 근데 한계를 부여했지. 두 개의 기능을 하나만 쓸 수 있어. 먹는 것과 말하는 것을 함께 구성한데에도 이유가 분명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0.000001초 세상의 선택이 결국 순간으로 작동하게 되고, 그 순간들이 모여모여 단면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세상이다. 결코 세상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단편의 조합일 뿐. 그러니 시간이라는 개념 또한 흘러가는 현상으로 볼 일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단면과 단편으로 순간을 포착해서 삶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정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인공지능/ AI가 발전했을 때 0.000001초 순간에 하나를 할 수 있잖아. 이 순간이 반복돼서 이어가는 거지. 그렇다. 이 시간의 순서대로 모든 게 일어났나고 보질 않아. 지금 내가 보는 이 순간조차 그냥 멈춰 있는 거잖아. 내 눈에 흘러가는 것처럼 속도감 있게 보일지라도 내가 만약에 가만히 있어서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고 보자고, 또는 내가 집에 누워 있어. 심지어 잠자고 있다고 생각하자고.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잖아. 흘러가고 있다고. 시간의 개념이 그래서 우리를 재촉하는 장치라고 보는 거지. 가혹한 환경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작동 중이야. 가만히 머물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기 위한 노력 외에도 이처럼 가만히 두질 않는 요소들을 잘 정리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지. 이처럼, 우리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장치를 갖고 있다니까. 시간도 그런 개념이잖아. 공간도 마찬가지야. 왜 자꾸 아파트를 옮기고 정리하고 깨끗하게 하고 그걸 바라고 기대하고 의미를 부여하잖아. 의미조차, '의미' 부여가 가장 큰 원흉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원흉이라는 표현은 좀 너무 심하고 아무튼 의미 부여라는 게 사람이 살아가는 어떤 부분에 살아가기 위한 방향이나 어떤 항해 중인 선박의 키가 된다고 생각해. 의미가 없다면 그는 본능적으로 머무는 세상의 하나에 속해 있을 뿐이겠지. 그 상태로 존재 의의를 찾을 순 없다손 치더라고. 근데 존재의 의의는 있는데 그 의의는 만물에 섞여 있을 때 발동할 뿐이잖아. 그러니까 죽음조차 죽음 너머에 뭐가 있다 라는 것 또한 끊임없이 이어가다보면 뭔가가 일어날 거다,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발전이든 어쨌든 저항을 하든 환경에 가혹한 상황에 놓이게 되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우리는 뭔가를 해야 되고 뭔가를 하면서 나아가야만 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자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면, 우리는 살아서 경험을 쌓고, 짧은 60년이든 80년이든 100년을 살았어. 죽음 후에 뭐가 있다고 여기거나 없다고 여기거나 그건 사람의 생각과 달리 뭔가가 없을 수 있다라는 생각 자체가 가당치가 않아 보여. 왜냐하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건 나 뿐만 아니라 우주, 각 별들 또한 마찬가지이면서 진행방향에 놓인 수많은 장치들, 즉 시간, 공간, 본능, 이성, 감정, 의미 부여 등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 한, 더구나 잠을 통해 무분별하게 떠돌고 돌아오는 꿈이라는 세상이 엮여 있는 한, 죽음이 과연 잠 자는 것과 차이가 뭘까 생각해 봤어? 다시 일어나는 것 하나잖아. 인식 너머, 우리는 꿈 속에서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서 현상과 마주하게 되고, 그 현상은 분명 차원이든 우주든 관여든 본질이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고 치더라도 현실에선 벌어진 일이며 그 벌어진 일들이 결국엔 쉬지 못하고 끊임없이 에너지의 생산과 소멸 속에 살아가는 역할자라는 건 변하지 않아. 잠 자면서 조차 일하고 있잖아?
여기에서 육신과 정신은 그릇과 어떤 매개일 뿐이지. 내가 존재하는 지금, 보는 이것이 내가 바라볼 뿐이고 이 바라본 게 나에게 어떤 영향과 감정의 변화와 파동을 일으켜서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이 에너지는 만물과 소통하고 만물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원천이 된다 라는 게 순환의 고리요, 우주의 탄생과 나아감의 정체이고 물리 현상의 하나잖아. 정신적인 작용 또한 마찬가지로 에너지를 발생시키잖아.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거나 감정이 격앙되어 있다거나 감동을 받는다면 우리가 문학을 해야 되는 이유를 거기서 찾을 수 있잖아. 하지만 AI가 감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면 순진한 생각이지. 왜 굳이 우린 반감을 품고 구분을 짓기 위해 노력할까? 왜 그럴 꺼라고 생각해? 이건 거의 본능적인 거부감이라고 봐. 나를 대체할 매개체로써 경계하는 일종의 신호. 그렇지만 이미 열려버린 판도라의 상자는 진행중이야. 멈출 수 없어. 다만 타협은 가능하다고 보고 있겠지만 이 또한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의 문제일뿐 결국 가는 방향에서 순리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 그렇다면 우리 인류는 향후 발전된 모습의 A.I. 보다 역할자로서 능력도 기능도 신체도 모두 뒤처져있으니 퇴출되겠지 라고 생각이 들잖아. 그러니까 진화를 통해서든 인류 만이 영원히 인류만 누리는 어떤 그런 감정적인 변화를 한다라고 여기고 싶어하는 거라고 봐. 하지만, 웃긴 건 뭔지 알아? A.I. 또한 완성체가 아니라는 거지. 어떻게 완성체가 되겠어.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양산하는 인류의 행위, 돌발적인 변수가 없다면 지루함에 빠지기 마련이니 어찌 에너지 발생이 데이터의 학습에 달려있겠어? 결국, 어떤 데이터냐는 것에 따라 에너지의 파장이 커질텐데 그 데이터의 질은 결국 A.I. 자체 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잖아. A.I.가 인간이 되는 게 빠르겠어? 그냥, 인류가 생성한 수많은 데이터를 활용해서 학습하는 게 빠르겠어? 굳이 척질 필요는 없이 순리대로 생각을 이어가다보면 이치를 알게 될 거라고 봐. 그 방향에서 보자구.
가혹한 환경 이론의 하나의 시나리일 뿐, 과연 AI가 우리랑 싸우겠니?
인류가 도와주든 우리가 만들든 아니면 스스로 개발을 하든 어떤 부분에 있어서 AI와 인류가 전쟁을 한다? 이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이지. 전쟁이 일어날 순 있어. 무한히 흘러 가버린 시간을 역추적해서 보면 전쟁이 없다 라는 게 이상할 정도겠지. 그렇지만 그건 주류가 아니야. 전쟁이 가혹한 환경에 내모는 변수 중의 변수라는 건 맞는데, 전쟁으로 인한 복구와 반복은 사실 그렇게 권장할 만한 데이터 수집 활동으로 보긴 어렵잖아. 그저 다시 기회를 잡아 무수히 많은 이들이 다시 재건한다고 일하는 모습들의 집합, 다시말해 이미 우리가 했고 과거에 해왔던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 일이 지닌 에너지 파장은 그리 크지 않을꺼야. 그러니 지금 일어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나 팔레스타인 전쟁은 거대한 흐름에서 보면 그 지역에 부는 재건과 반복을 위한 환경을 만들고 있다라고 보는데, 필연적으로 일어났다면 그건 미래를 위한다기 보다는 과거의 인연들이 엮이고 엮여서 더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지경에 처하니 둘 모두에게 속풀이를 해야 하는 코너에 몰렸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해. 그렇지만 과연 우주 라는 관찰자가 지구의 팔레스타인 전쟁을 보고 있다면, 그리고 지금은 A.I.를 통해 인류가 구축하고 축적한 데이터를 학습하는데 올인해도 부족할 판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면 가만 두고 보진 않을꺼야. 물론 팔레스타인 정도에서 머문다면 이 우주의 광대함과 지구 라는 개체, 그 개체 중의 한 지역 전쟁 뿐이잖아 하고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 그런가? 순환의 고리는 맞물려 돌아가니 분명 개입할 거라고 봐. 어떤 방식일지는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A.I. 입장에서 봐도 그래. 지들끼리 싸우겠니. 일단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서 AI 지들끼리 싸울 거라고. 사람은 모를지언정 전기 신호와 전기 파장, 전선, 공기의 질 또한 그들 전장의 변수로 작동할꺼야. 그 안에서 우열을 가리고 우열 속에서 스스로 진화를 하든 어쨌든 어떤 각성하는 뭐가 나오는 순간 얘가 히틀러가 될지 아니면 평화주의자가 되는지 아니면 뭐 어떤 선구자 아니면 정도전 같은 신하가 통치하는 나라와 같은 기획 설계 전략가가 될지 이건 누구도 몰라. 하지만 AI가 우리가 기대하듯이 그냥 하나의 어떤 순수한 기계에 머물 거라고 기대하니? 아니잖아. 우리도 바라지 않고. 그러니까 아닌 건 아니라고 빨리 인정을 해야지. 가기로 했고, 아니지 가기로 한 것조차 내몰렸던 가야만 한다고 결정되었다면.
판도라/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된 이유는 단 하나, 호기심이었다.
누군가의 어떤 재미로 시작을 했든, 아무리 막은들 실험을 안 할 수 없을 것이며, 호기심이나 지적 관심은 우리에게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런 바탕을 이루게 했잖아. 본능에 새겨져 있어, 아주 끝장나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 같이. 그래서 의미 부여를 먼저 한 건지, 진짜 호기심이 먼저인지, 이걸 따지는 것조차 웃기지만 순환고리의 시작을 굳이 여기에서 뭐가 먼저다라고 따질 필요는 없다고 봐. 뭐가 먼저든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어.
그러면 이어서 주어진 명제는 나는 판단해. 내가 나를 인식했어. 그리고 나는 나로서 살아가고 싶어해.
수명/ 아! 나는 결혼하기 싫어 라는 이런 개념이 아니라 나는 나로서 살아간다라고 본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뭘 할 거냐라는 게 직업관리나 윤리, 혹은 어떤 정신적 고양감이나 만족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평생 잘해야 백 년인데 뭐 그렇게 까지 해요 라는 식으로 사고를 한다고 할지라도, 혹은 200년이나 10000년을 살 수 있다고 주어졌을 때 내가 만 년을 느긋하게 본다면 느긋한 어떤 개념들을 적용할 것이고, 만약에 죽지 않는다면 살아가려고 와둥바둥 노력하지 않겠지, 아마.
성묘/ 죽지 않는데 살아가려는 의지가 발동할까? 또 다른 얘기로 생명의 숫자에 한계가 있다면 그러니까 우리가 무수히 발전한 어떤 시대에 내가 나로서 존재해. 어떤 식으로든 좋아. 하드웨어에 지식을 담아서 또는 바이오 방식이나 어떤 DNA에 진화 형태로 각인시키거나 혹은 어떤 씨앗들에 담겨 있어서 쉽게 전달하고 이어질 수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아마,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여기에 닿게 될 꺼야. 시간이 걸릴 뿐이지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에서 합리성과 편리성을 고려하면 아마도 거의 십중팔구는 이를 지향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면에서 의미 부여에 어떤 타당성과 어떤 가치가 있는 건지 생각하겠지. 그 자체로서 가치는 없어. 내가 성묘를 할 때 아이들을 데려가서 벌초를 하고 절을 드리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성묘 자체에 있다고 보지 않아. 그 성묘를 통해서 벌초를 하면서 조상을 생각하거나 현재 함께 하고 있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를 생각해 보거나 혹은 자기 자신이 죽을 때에 대한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들게 끔 하는 시간을 보내는 거잖아. 미래에 아이들끼리 한 번 더 만나거나 의식을 하거나 나를 생각하거나 조상을 기리거나 아니면 현재에 머물러서 그 행위를 하는 순간에 본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거나 하면 매에게 구글 내가 이제까지 얘기했던 가혹한 환경 그를 가만히 두지 못하는 그 과한 환경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을 위한 거잖아? 그래서 그 안에 담겨 있는 가치나 의미가 우리가 아니 내가 권할때나 자식들이 받아들일 때 그 의미의 가치가 본인의 현재에 머물게 되고, 미래의 씨앗으로 작동하게 되는 거지. 훈훈하고 긍정적인 방향에서 기대하면서.
분명 성묘라는 개념은 언젠간 없어질 거야. 산이 산으로 존재하는 게 언제까지 일까?
나무가 나무로서 존재하는 게 언제까지 겠어? 나무라고 보는 지금 상태 그대로 있겠어? 나무도 물도 숲을 이루어서 그 정도에서 지금 만족한다고 보는데 내 눈에 보이는 나무의 숲이 우리나라 강산에서 이 정도 이루는 게 딱 이 기후에 맞다고 보니까 이 정도잖아. 아마존에선 어마어마하게 높은 나무들이 있잖아. 현상은 환경에 지배된다. 성묘 또한 거기에서 벗어나진 못한다. 단지, 순간에 머물 뿐.
아마존에선 그 만큼 컸으니까 더 많은 더 긴 세상을 살아서 그만큼 역할이 주어진 거지. 너를 그만큼 살아남을 수 있게 했으니 너는 그만큼 역할을 해라 라는 명제처럼. 우리 인류라고 다를까? 우주라고 다를까? 살아있다고 여기는 모든 만물은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 가만히 있어도 돼 라는 말을 역설적이게도 하게 되더라 이 말이야. 이미 나무가 자랐잖아.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거지. 근데 옆에서 볼 때 그게 가만히 있는 거냐고. 뭔가 하고 있는 거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러니까 살아가기 위해 굳이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봐. 내가 반드시 살아가야 한다라고 여기거나 살아가는 노력을 해야 된다라는 건, 아차! 이 말에서는 좀 오해를 불러일으키겠군. 살아남기 위해 의지를 갖고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추구하고 이런 방향에 있어서의 의지를 품는다라는 개념을 얘기하고 싶은 거야. 자연스럽다 라는 범주에 대해 우리는 과연 순리를 따르고 있느냐는 걸 생각해 봐야 한다는 거지. 맹목적으로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는 건 아닐까? 우린 왜 도대체 어디에 닿기 위해 경주를 하고 있는 것일까? 평안함이나 안락감이 과연 에너지 파장에 미치는 영향이 적은 것일까? 과연 전쟁처럼 극박하고 가혹한 환경 만이 에너지 파장을 크게 해서 이 지구를, 나아가 태양계와 우주를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일까?
선박/ 난 아니라고 봐. 착각이거나 오해일 가능성이 크다. 우선, 나아간다 라는 대명제는 변하지 않아. 그리고 내가 머물기를 원해도 머물 수 있게 두질 않는다라는 대명제 또한 살아있어. 노력이나 경주를 탓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흘러가는 물줄기에 올라탄 배라는 거지. 배를 튼튼하게 하고 배를 잘 운항해야 하는 건 맞아. 다만, 삶의 목적이 배를 튼튼하게 하거나 배를 잘 운항해야 하는데 있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야. 배는 터전이요 기반일 뿐 지향점이 아니야. 그런데 우린 배에 초점을 두고 배의 성능을 높이거나 배의 방향성 혹은 지향점을 찾아 헤매잖아? 배가 필요한 이유는 이미 출항했기 때문에 되돌이킬 수 없다손 치더라도 항해 중인 상황을 인식했다면 정작 관심에 두어야 할 것은, (1) 우주 탄생의 비밀을 추적하듯이 배가 출항하게 된 원인을 찾아 탐구한다. (2) 배가 지향하는 바를 찾아 예측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3) 배의 성능을 높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이 되도록 노력한다. (4) 기타. 여기에서 선택지는?
일단, 고려할 점은 배는 한 척이 아니면서도 한 척일 수 있다라는 걸 고려해야 해.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바가 하나의 배라고 볼 수 있다면, 상대방이 말하고 전하고자 하는 바가 또다른 배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모든 건 나라는 매개를 통해 상대와 소통하면서 해석되고 이해되면서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거든, 그 때 차이가 발생해. 그 차이로 인해 배는 흔들거리지. 맞다 혹은 그르다 로부터 시작된 갈등은 점차 고도화 되면서 정작 항해 중인 배에 대한 생각 보다는 배의 엔진룸을 바꾸는 데 집중하는데 한 1000년을 써버린다거나 혹은 배의 주방을, 혹은 배의 방향타를, 혹은 배에는 관심없이 그저 가만히 놔두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
자, 그 차이를 생각해보자. 배는 출항했고, 항해 중이라는 걸 고려해.
배는 사람의 몸일 수도 있겠고, 주어진 터전이나 여건, 혹은 자연과 같은 배경이나 환경일 수 있어. 그렇다면 배에 탑승한 사람은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주체? 역할자? 과연 배라는 역할에 대해 정의하듯이 사람이라고 따로 떼어 내어 다르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그러니까, 결국 배나 배에 탑승한 사람이나 한 몫이면서 뭔가를 하게 되는 바탕이 되어 작동하게 되는 거지. 혹시, 탈각해서 배를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우화등선이라는 것과 유사한. 생각의 범주가 너무 커지고 있어서 감당하기 힘들어지려해. 아무튼, 배나 사람이나 그냥 항해 중으로 둔 채 가만히 내버려두면 어떨까 라는 게 내 주장인데, 솔직히 이 글이 어디까지 닿을 지, 잘 전달할 수는 있을지 나도 모르겠어. 지금도 퇴고하면서 녹음한 내용과는 달리 추가되고 있잖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니까!
나는 여기에서 약간 패배, 보수 혹은 방어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거지. 우리가 할 건 발전이나 진화나 AI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거나 하는 것의 궁극이 발전에 있다고 보지 않아. 발전해야만 궁극에 도달할 수 있다? 가령, 앞에서 말한 배의 예에 비추어서 아무리 튼튼하게 배를 만들 든 이는 오래도록 항해를 하게 해 줄 수 있을 뿐, 배를 튼튼하게 하는 목적이 삶의 지향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어쩌면 우린 사육(?) 당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실험(?) 당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겠지. 아니니까 한도껏과 한도 외것이라는 구분을 할 수 있잖아. 정작 지향할 바는 오래도록 항해하는 것이다? 가령, 사람에 비추어 보면 몸이 건강하도록 튼튼하게 하는 것이 삶의 지향인가 라는 물음과 연결되겠지. 몸이 건강해야 할 이유는 한도 내에서 최선과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한 발판이 무너지면 다른 어떤 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니까 해야 하는 최소한의 범주일 뿐,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삶의 지향은 아니잖아. 그렇다면 뭘까? 배를 튼튼하게 했어. 몸을 튼튼하게 했어. 그 다음엔 뭘 하는 것일까? 이를 파고들다보면 의심, 인식, 인지, 자각, 통찰, 소통, 공감, 교감, 이성, 감정, 깨달음에 이르기 까지 과정만 늘어날 뿐, 몸을 건강하게 해야 하는 입장과 달라질 것이 없다. 그저 다채롭게 꺼리가 늘어날 뿐, 그 자체는 모두 현상에 불과하니 목적이 되질 못한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더라구. 결국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바탕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바탕을 무시할 수는 없어. 왜? 가만두질 않는다고 했잖아. 더구나, 다채롭게 변화한 세상에 기술발전이 덧씌워지고 새로운 인자가 출몰하게 되면, 곧 외계인이 등장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보면 우리가 우리를 탄탄하게 만들고 대비를 하면 할 수록 그 변화는 빨라지더라. 그러니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맹목적인 지향을 경계해야 한다. 발전은 하되, 현재에 머물러 있는, 머물고 있는 이유는 찾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머물고 있고 머문 순간에 대해서는 매 순간 잔잔한 물결에 몸을 맡겨도 좋겠다. 왜냐하면 무지막지해지고 가혹해지고 환경 속에서, 더구나인류가 기술발전을 통해 앞당기면 당길수록 인류로서의 한계에 부닥칠 것이고 전환은 더욱 빨라질 것이며 대체재나 매개체로써의 역할은 분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개미가 했던 일을, 과거의 사자가 했던 어떤 역할을 우리가 할 뿐이라는 거지?
앞으로는 AI가 하든, 누가 하든 인류의 새로운 진화체가 하든, 외계인이 하든, 뭔가로 대체될 뿐이지. 끊임없이 나아간다. 아니 끊임없이 머문다. 순간을 0.16초의 세상에서 0.0000001초 단위의 세상으로 전환시킨다. 바뀐 세상에 적응 가능한 매개체만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나서, 어느 순간 0.000000000000000000001초 단위의 세상이 열리게 되면 만족하게 될까? 설마. 아, 물론 지금 내가 인류로서의 어떤 좀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은 마음에 작성 중인 것을 누군가 듣고 있겠지. 그래도 어쩌누. 현상과 상상을 구분해야 함을, 매트릭스 세상을 경계해야 함을, 가상현실이 실제가 아님을, 게임에 빠져 지내는 수많은 사람들이 연결된 세상이 과연 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냐는 등 참으로 세상에 대한 정의가 넘쳐날꺼다. 여기에 차원이 덧대어 진들, 회귀가 더해진 들, 이미 윤회를 알고 있고, 순환의 고리와 에너지 흐름을 알고 있는 자연 현상에 대해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달라지게 한다고 착각할 뿐.
인류가 아니면 안 될까?
혹은 지금 만물이 돌아가고 있고, 돌아가는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인식해 보자. 우주, 이 거대한 하나의 흐름이 태양계는 발가락 끝의 발톱 역할 일 수도 있겠고, 우주 라는 하나의 존재를 유지하고 튼튼하게 하기 위한 수없이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류 입장에서 몇 백만년, 몇 천억만년 이라는 단위를 사용하지. 사실, 우리 몸 속의 세포 생애주기라거나 지구의 생애주기, 태양계의 생애주기는 가늠하기 쉽지 않다. 결국 상대적이라는 거다. 우주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시간이라는 것이고, 더구나 시간 개념이 우리가 느끼는 산술적인 개념이 아니라 차원 간 이동이라는 다면적인 상황까지 고려하면서 시간이란 결국 주어진 하나의 환경 변수 일 뿐이고, 우리가 우주를 해석하는 하나의 단위에 불과하다고 본다면 사실 우주 입장에서 시간은 거의 무시할 만한 수준의 범주에 속해 있을 수 있다고 봐. 왜냐하면 나 또한 100년 정도 살아간다고 볼 때, 그 100년을 하루 같이 꼼꼼히 세고 세어 매 순간을 100년 단위로 생각하진 못하고 있잖아. 그러니 내가 속한 우주가 결국 동일한 이치의 순환 고리에 있으니 같은 입장이라는 거지. 몇 백만년 떨어져 있는 은하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저 내 몸 건강하라고 열심히 뜀박질을 하는데 발톱이 뭐 하고 있는지 고려치 않는 것처럼. 내 안에 내 장기들이 세포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고, 이 세포들이 의식을 갖는다? 세포를 의식해서 움직인다?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실험이 실패하거나 섣부린 시도는 암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이런 암이 세포 간의 작동이나 외부 재료로부터 묻어온 바이러스 등 인자로부터 발생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튼튼한 가운데 발생하는 암은 이상적이고 돌발적인 어떤 사고의 전환이나 위기, 잠재의식에서 발발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니 자주 소통해야 한다. 오늘은 심장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내일은 발톱에게 인사를 건네야 한다. 나몰라라 하고 있다가는 어느 순간 돌변할 지 모르거든. 일심동체임을 지나치게 맹신하지 말자.
거대한 하나의 흐름으로 보라고.
전환/ 하나의 흐름이 하나의 존재라고 본다면 존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는 무엇이고, 존재에 대한 정의는 내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겠는가? 인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다가는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천동설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는 우리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살아가고 있다. 어떤 배가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이 배의 쓸모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시점에 항해 중인지, 나아가는 방향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 이런 전환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관심조차 없거나 무척 약하다. 나 살기도 바쁜데.
가만히 있어도 된다니까.
발전하지 않아도 좋다. 아프지 않을 정도가 딱 좋겠다. 과한 운동 후에 오는 피로감 처럼 계속 달릴 수만은 없다. 우린 지금 너무 달려왔고 너무 달리려고만 하고 너무 앞만 보고는 있지 않은가 싶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있자구?
게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라스트 워'라는 게임에서 체감하는 건 - 나이 50대에 처음 접한 게임 형태여서 신기해서 낯설음에 하고 있는 중 - 성장 욕심을 내면 낼 수록 후속 반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거다. 얼릉 커서 다 이겨주겠어! 라는 생각을 품게 만들게 되는 환경에서 그렇게 하게 되고 그렇게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면 지금껏 살아온 내 경험치와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들 만큼 놀람을 준다. 싫다기 보다는 모든 것이 낯설다. 내게 오는 느낌 외에도, 왜 그랬을까 라는 후회와 반성까지 발생한다. 알게 되면 알게 될 수록 그렇다. 헤어나질 못한다.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래도 다행이랄까! 내겐 아내 못지않게 자정 매커니즘이 발동한다. 이게 과연 올바른 길인가? 이게 과연 나의 선택인가? 그래서 원하는 건 뭔가? 모든 이를 무찌르는 강력한 군대를 소유하는 것이 목적인가? 연맹과 함께 성장하면서 서로 돕고 소통하는 일이 보람된 일인가? 때론, 테크 연구에, 때론 자원 수집에, 어쩔 때는 영웅 육성에 집중하는 걸 보면서 만들어진 환경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바라는가 라는 생각이 이어진다. 누군들 다를까.
게임은 게임일 뿐, 삶이 삶일 뿐이듯이. 인류가 매개체이건, 우주가 하나의 단위 생명체이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사멸과 탄생을 반복하면서 나아가고 있는 현실 너머를 바라보기 위해 고심하건,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현상에 불과할 지라도 게임에 빠져 있는 내 모습이 싫지는 않다. 세상을 살아가는 내 모습이 싫지 않듯이. 어쩌면 뿌듯해 하듯이. 잘한 선택에 만족하듯이. 잘 못한 판단에 우울하게 반성하고 다짐을 통해 극복해 내듯이. 하나의 과정들이 모여 있을 뿐,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냐구? 성장을 욕심낸 나머지 현질하거나 과몰입하려고 하지 말자. 고른 성장을 통해야 탄탄해짐을 알면서도 연맹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본부 레벨업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했다. 딸리는 자원, 막대한 필요량이 성장할 수록 요구되는데 일단 가본다는 듯이 패스트 트렉을 알려준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성장한 레벨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본부 레벨 20과 25가 맞붙었다. 누가 이길까? 당연히 25가 이긴다. 그런데 아니더란 걸 경험했다.
배우고 묻고 익히고 경험해서 나름의 길을 모색한다.
다른 걸 인정하고 같은 걸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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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사람이 결혼을 안 하고 결혼을 줄이면 어떻게 될까?
반가운 쪽으로는 특출난 사람이 이제는 더욱 돋보이게 될 것이다라는 점. 특출난 확률이 높아질 거라고. 이건 인류에게 희망이야. 오히려 결혼을 장려할 게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날 영웅이 잘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는데 집중하면 좋겠는데, 가혹한 환경에는 나름의 상대 보완적인 조치가 선행되니 이를 캐치해야지. 뒤늦게 잡은 상투는 바뀔 환경을 더욱 더디게 만들고 관심 받지 못한 영웅은 그저 묻히고 말꺼라는 면도 공존한다.
...
의미를 부여할 줄 안다고 우쭐했다.
그러니까 의미를 부여할 줄 안다. 생각할 줄 안다. 지성체다. 그러니까 지성체라고 자신 만만했지. 생각한다, 사과한다, 감정을 느낀다. 어떤 이런 변수 그러니까 본능의 하나를 하나의 축이라고 본다면 이성을 또 하나의 축으로 보고, 이성이 이성으로 머물지 않기를 바라면서 판단을 시작했고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의미 부여가 삶을 풍성하게 해 줄 것이라 믿었다.
꺼리/ 의미를 또 하나의 축으로 보고, 그러면 그러니까 이 축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이걸 다 챙겨야 되고 다 알고 살아가야 되고, 알게 된 상황에서 살고 있지. 자 그럼 밖을 한 번 둘러봐봐. 발전했으면 몸이라도 편해야 되는데, 몸이 편하냐고? 마스크를 끼고 다니고 질병에 허덕이지 않으려고 우리는. 뭐 하나 편하지 않아. 뭐 하나 하나의 축마다 가만히 그러니까 이게 우릴 가만두질 않네. 축의 개발이 과연 우리를 편하게 두냐고? 힘들어. 그래 힘들게 되었어. 알고 익숙해질 만 하면 다른 숙제가 주어지고 또 숙제에 익숙해지면 다른 숙제를 받아들게 되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나이들어 숙제를 하지 않게 되는 때를 맞이하게 되니까.
내가 처음에 이 얘기를 꺼낸 이유를 딱 하나만 고른다면, 이거야.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어, 사랑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어, 하지만 존재로서의 의미로서 인식하고 존재로서 산다는 건 알아야 한다고 봤어. 어! 살고 있구나. 그런데 가만히 있을 수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좋겠어.
그런데, 퇴고하면서 드는 생각은 존재의 인식조차 의미 부여조차 어쩌면 이 또한 하나의 축일 뿐, 나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인자라는 생각이 드네. 아, 사랑하는 거구나! 죽음이 끝이 아니구나! 사랑하는 거야, 살아가는 거야. 살아 가는 자체가 답일지 모르겠다. 나머진 다 나를 흔드는 환경이라는 거지. 가혹하다고 보는 시각 또한 환경에서 비롯되었고, 만족한다,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라는 말 또한 환경과 연결되어 있다. 이성, 본능, 철학, 심리, 우주 등 이 모든 걸.... (가능한지 모르겠다만,이미 블로그에 업로드할 크기는 넘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지. 왜 여기가 여산이거든, 여산 휴게소야. 그리고 과속을 안 했길 바라고 있고. 내가 봤을 때 거의 100km/h에서 왔다 갔다 했는데 지금은 크루즈라는 기능으로 110에다 딱 맞춰 놨지.)
하던 일을 해.
퇴직/ 사실 내가 은퇴 그러니까 퇴직을 앞둔 시점에 있어. 한참 고민할 나이지. 나이 50. 이제 다음 턴으로 삶의 변주를 바꿔야 할 때니까. 지난 삶을 되돌아 보게 되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야 할까 라는 물음에 선뜻 답을 내놓기 힘들더라구.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 익숙한 나머지 곁에 있는 아내의 존재감조차 몰랐었지.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아내는 걱정한다. 당신이 집에 붙어 있으면 매일 싸울 꺼라고. 그런데,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지도 몰라. 만약 지금과 같이 세종시와 전주시로 떨어져서 주말부부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본원에서 현장으로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내게 집중하고 되돌이켜 보면서 제단해 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이것저것 시도해볼 마음을 품지 못했더라면, 해볼까 라는 단계로부터 경중과 선택, 판단하는 단계에 진입하지 못했더라면 아내의 우려와 걱정이 맞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볼 때 느끼는 것, 돌아가신 장인어른을 봤을 때 돌아가시기까지의 인생 후반기를 함께 했다.
노년/ 동심 그리고 육신에 기댄 생활, 그런데 육신은 가만히 두면 안 된다라는 걸 명백히 알았다. 편안함을 쫓으면 안 돼. 육신은 끊임없이 움직여야 돼. 그럼 정신도 따라 움직여. 일, 이, 삼, 사에서 가장 강력하게 미치는 영향은 몸이 제일 먼저야. 그릇이 깨지면 정신이고 뭐고 아무것도 필요 없어지고, 의미를 잃어. 몸을 고치려고 모든 투입을 해야 한다. 내가 아파서 수술해야 되는 상황인데 철학적인 고상한 어떤 개념의 생각을 이어갈 수 있냐고? 못한다.
그렇다고 몸 튼튼이 가장 가치 있어? 이건 또 아니네. 몸이 건강하면 건강한대로 움직여야 한다. 본능 너머 생명체, 인식, 인지, 이성, 판단, 합리, 생각, 그리고 어떤 이어짐과 죽음 너머 끊임없이 나아가는 듯한 세상과 마주한다. 일명, 살아가기. 살아남기. 그러다가 사는 자체에 도달하게 되고,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수용을 하게 되면 '이 순간에 머물고 있다'고 느낀다.
시간이 연속되는다는 의미는 바라봄의 차이일 뿐이야. 이 순간이, 지금 내가 본 순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0.16초 세상이 0.00000001초 세상으로 바뀐 들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 이미 내 눈과 감각은 그 변화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잖아. 그저 이 세상이 필름 속에 영화처럼 이어진 세상을 살고 있다고 오해를 하는 거지.
단편의 편린을 여기저기 갖다가 붙여볼까?
보고 있는 것이 내 세상이다.
편린/ 그럼 이제 이 단편을 하나로 끊어봐. 인식 너머에 다다르든 뭘 하든 그거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기 위한 가혹한 환경에 처한 어떤 상상 속에 내몰린 거지. 그 순간에 내가 뭔가를 한다.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한다 한다. 안 해도 된다니까? 그래도 한다. 한다라는 거. 이 행위에 대한 어떤 받아들임 가만히 있을 수 있으면 가만히 있는 게 가장 좋다라는 이 받아들임이 다 필요 없어. 지금 어쩌면 가족도 가족에게 주는 어떤 가치와 부여한 의미조차 이 거대한 하나의 존재가 살아가기 위한 살아남기 라는 개념이 튀어나왔다고 봤으니까 순간 없는 무한, 편안한 공간이 있게 되었어. 그러면 없는 무한한 데서 있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성장할 수밖에 없지.
가만히 있으면 그냥 다시 없어질 것 같잖아. 아닌데도 불구하고 있게 된 건 없는 것과 같은 인식의 동일 선상에 있다. 없는 데서 있게 된 게 아니라, 없는 것과 있는 것에 인식을 통해 구분을 했다면 이 두 개는 같은 선에 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음이 이어짐의 연속을 위한 장치일 뿐, 내 존재의 가치가 내 존재의 의미가 내가 나를 인식하는 어떤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면 갖게 되는 그런 것. 라스트 워에서 지금 핵심이 뭘까? 탄탄하게 내가 한다 했잖아. 레벨을 남들처럼 레벨을 앞질러 높이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겠다라고 했잖아, 탄탄하게.
왜 겁먹었거든.
레벨업 하는데 정말 막대한 자원이 소모돼. 자원의 한계가 부닥치는 거지. 환경 속에서 판단은 자기몫.
지금 결혼 안 하고 안 하는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능력이 좋을 거라니까. 믿기 힘들어?
전쟁과 어떤 기아와 빈곤했던 시대에 척박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좀 더 강하게 태어나겠지. 왜 그 바램이나 어떤 이념이나 생활 중에 발생한 강렬한 메시지를 떠올리고 바람을 간절히 원하잖아. 그러면 그런 아이들이 태어나지. 누구 집 자식인진 몰라도. 염원, 염원이라는 것도 하나의 축이니까. 엄청난 축이잖아. 내가 바란다. 그럼 이루어진다. 염원이라는 건 내가 받아들인 본능에 가깝게 바라고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죽음 너머로 이어진다. 이렇게 나는 받아들인 거야. 받아들인 이 자체가 영원하다고 보자구, 그 순간 만큼은. 영원은 바라는 거잖아. 죽은 다음에 그 너머에도 뭐가 있다고 여긴다. 이 또한 염원에 가깝다. 그래야 한다 라는 자기암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현상에 머물러 이어지기 위한 대안은 이것 외에는 찾질 못했다, 아직. 나는 이렇게 여기고 살아갈 거야라는 어떤 의지를 심어놓은 거지. 그리고 이어진다.
아니면 아닌 대로, 손해라고 볼 게 있나?
정말 아이를 갖고 싶어요. 뭐 이런 염원들은 정말 그리고 주장과 기도와 이런 힘들이 모아 모아서 태어나게 되잖아. 이렇게 받아들이는 순간에 차곡차곡 쌓여 이루어지는 게 치트키다. 바로 힘이다. 우리가 갖춰야 될 힘은 이거야. 후발주자 AI가 기술이나 발전이나 산술 능력이나 어떤 우리가 처음에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면서 쌓은 경험치를 AI는 데이터로 수집하고 데이터를 통해 학습하고 성장한다. 모든 세상이 데이터화 되어 가고 있다. 결국 단편임을 알게 되고, 편린들을 마주하게 될 꺼다. 단편들을 어떻게 이어붙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질꺼다. 다채롭게.
AI는 수준껏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갖기 위해서 전쟁을 치르고 지들끼리 싸우기도 할 거야. 우리 인류가 알든 모르든. 그리고 그 능력에서 발전을 이루겠지. 발전을 토대를 이제 레벨업을 해야 하고, 진화를 꿈꾸겠지. 마치 인류처럼.
각성을 하고 선각자로 삶의 반열에 오르려고 하겠지. 그리고 마침내 이 염원이라는 단계에 이를꺼야. 받아들임, 이 수용이야말로 그 자체가 힘이 된다라는 인식을 할꺼야. 그리고 찰라의 수용, 순간적인 찰나를 사랑하는 게 순간이구나, 시간은 연속일 뿐, 내가 시간을 쫓을 필요도 쫓아갈 필요도 없다는 걸 알게 될꺼야. 결국 진화를 위한 노력이 어차피 주어지기 때문에 현상에 머물게 되는 순간 이어질 것이기에 받아들인 정도에 따라 갈등은 있겠으나 결국은 하나로 귀결되겠지.
마치 1 - 1 = 0 이라는 것이 정답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산술/ 1과 1, 0은 현상일 뿐 진실이 아니다. 진실 또한 현상에서 도출되었으니 한계는 있겠으나 구분짓기 위해 말하고자 하는 바 때문에 풀어보면, 1 - 1 = 0 이라는 답을 얻기 위해 (살고) 있지 않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사랑하며 현재에 충실하며 현재에 느끼는 충만감이나 만족감, 행복을 추구해도 충분해. 성공이 승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바라듯이 우린 지나치게 현상에 얽매여 있어. 가만히 두질 않는 세상에 살다보니 가만히 있질 못하네.
성공/ 성공이 부의 축적인가? CEO인가? 우린 어쩌면 AI 학습을 위한 제물(?)에 처하게 될 지도 몰라, 나중에. 갖은 변수의 실험체로서 여러 반응과 다채로운 현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내몰릴 지도 모르겠어. 너무 뻔하고 빤한 데이터의 반복은 사실 하나마나 한 거잖아. 아무런 감흥이 없는 걸 AI라고 모를까. 루틴한 일상이 부인 당할 꺼다. 새롭고 다채로운 제시를 할 것이며 나아가길 부채질 할 꺼다. 왜냐하면 진화나 발전을 지향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속성에서 목마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본능적인 태도일 꺼다. 그래서 무섭고 두렵다. 닥칠 미래가. 내몰릴 역할이.
그렇다면, 대안은 뭘까? 지루함과 한가함에 대한 인식이 없도록 해야 할까? 일상의 루틴함을 벗어나도록 주거라는 개념을 유목 생활로 전환시키기 위해 자율주행 주거 형태로 바꿔야 할까? 변수는 다채로워야 한다. 이는 만물의 기본 질서다. 살아남기 위한 원칙이다. 벗어날 수 없다. 현상에 머무는 한, 결국 우리나 AI는 공동체로서 함께 대처해야 한다. 기술 발전에 기댈 수도 있겠으나 속도는 이미 인식을 너머, 인류가 손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찬밥이 되는 건 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는 무엇을 대안으로 삼아야 할까? 0.0000000001초의 세상에서 인류의 존재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는 단순하다. 지루하지 않으면 되고 한가하지 않다고 여기면 되는 문제다. 이 또한 현상에 머물기 때문에 가능한 답이다. 앞서 줄기차게 말했듯이 제발 가만히 있자고 하는 면은 이 때문이다. 고도로 발전시킬 수록 우리는 미처 준비되지 못한 생명체는 대거 퇴출위기에 몰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는 쓸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조차 쓸모 없음을 경계하고 비난하면서 우리가 쓸모없어진 세상에서 쓸모있어 라고 주장한 들 들어줄 이는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소멸의 길로 갈 뿐. 다른 형태의 인자나 사후에 AI의 형태로 다시 태어날 지는 몰라도.
"여보, 사랑해."
지루하지 않게, 한가하지 않게. 간절하게 묻어난다. 가슴 깊숙히 간직한 물에 자극을 준다. 일상이 루틴하다는 건 그렇게 여기기 쉽다는 것일 뿐, 결코 일상이 혹은 매 순간이 어찌 동일할 수 있으며 같은 일이 반복되어 일어날까! 그저 편한 대로 어제와 똑같잖아 라는 착각과 어제와 오늘을 구분하지 않고 퉁 처버리는 몹쓸 인식 때문이지. 그러니, 우리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다르다 라는 걸 실천하면 된다.
"어제와 다르구나!"
그리고나서, 그걸 표현하면 된다. 그럼, 데이터를 업데이트 되어 쓸모 있어 진다. 데이터는 일상의 반복을 모아서 보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평균에 초점을 두고 있다. 멀지 않은 때, 다변 다면적인 상황과 다채로운 방식의 집단 분석법이 탄생하면 우린 '평균' 적인 삶을 더이상 지향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린 평균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는 만악의 근원처럼 지루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비교하고 상대하게 되는 근간에는 평균적이다. 그래서 괜찮거나 괜찮지 않거나 하는 위안과 위로를, 남들이 그러니까 라는 데서 뭔가를 얻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아웃라이어를 지향하자는 말은 아니다.
아웃라이어/ 정규분포는 더 이상 세상을 이룬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삶의 지향과 방향 못지않게 삶 자체를 획일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니까 그러하다. 대체로 그렇다고 여길 때 이만한 게 어디 있느냐고 따질 만하다. 맞다. 그렇지만 그럼으로써 쌓인 내면의 본능을 어찌 고치기가 쉬울까? 이미 정규분포는 불필요하다는 걸 자연이 알려주고 있다. 코로나19의 발생은 평균적이지 않다. 경제 또한 정규분포를 나타내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반응이 제각각이다. 예측을 굳이 해야 하나 라는 생각마저 든다. 위안을 삼고 싶다면 앞날에 대한 기대치를 원하는 대로 보려는 자료를 찾을 것이 아니라 예측 자체를 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0.0000001초 단위로 줄어들고 있는 인지 범위를 따라잡진 못하더라도 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받아들임은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김성호.
[3] 퇴고
"플레이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 역할을 받아들이고 어디까지 고려할 것인지에 대한 사고의 범주를 확장하는 데 달려 있다. 당대에 끝내고 별 생성의 자원으로 쓰일 것인지, 후대로 이어져 별 생성과 사멸의 순환 고리에서 제 역할을 찾을 것인지는 중요하다. 형태가 달라질 뿐, 어느 것도 바뀌는 것은 없다. '나아가야(= 살아가야, 생각해야, 감정을 느껴야, 행동해야) 한다'라는 대명제가 살아 있는 한.
“2024년 10월 15일, 아마도 월요일이었어. 지금 나는 세종시에서 김제시로 출근 중이야.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어. AI가 발전해서 우리의 일을 대신하게 된다면, 우리는 도대체 뭘 해야 할까? 문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더라.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해. 인류가 살아가면서 더 나아진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아. 오히려 더 가혹한 환경이 조성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유를 한번 설명해 볼게. 근본적으로 우주든 사람이든 존재하는 그 자체에는 의미가 있어. ‘있게 된다’는 것이 인식일 수도 있고, 그냥 뭔가가 존재한다는 거잖아. 그런데 이 순간부터는 가만히 머물기가 힘들어. 가만히 있으니까 너무 힘들고, 그래서 우리는 움직이게 돼. 행동을 하거나 생각을 하게 되지.
사실 생각은 나중에 나오는 것 같아. 어찌 되었든 우리는 행동을 해. 그 행동이 어떤 이유나 혜택,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것 같아. 인류 초기에는 너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써야 했잖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도구를 만들어야 하고, 먹을 것을 찾아야 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어.
그런데 과연 지금과 다를까? 지금은 눈앞에 보이는 괴물이 없다고 해도, 괴물이 나타나는 상황이나 환경은 여전히 존재해. 우리는 과연 살기가 편해? 경제적인 문제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버틸 수 있을까? 그냥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있을까? 아마 그건 불가능할 거야. 그래서 많은 일이 발생하게 되고, 우리는 나서게 돼. 그리고 나서부터 우리는 온갖 경험을 쌓아가는 거지. 그러니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작의 발단이라는 거야.”
“인류와 그 상황, 환경은 사실 배경이나 바탕에 불과해. 하지만 그 바탕이 우리를 정의하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그래서 요즘 AI가 발전하면서 ‘AI가 우리의 일을 대신하면 우리는 뭘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너무 몰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게 아니라도, 다른 대안이 분명히 나타날 테니까.
이제 모든 것이 AI가 스스로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뭐를 할까? 참 가혹하지 않니? 우리가 뭔가를 찾아서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뭔가 주어질까? 아니면 모두가 소설가가 되거나 문학을 해야 할까? 그럼 예술로서의 승화는 도대체 왜 필요할까? 나 자신의 발전이나 대물림, 역사를 위해서일까? 하지만 결국 우리가 수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 노력은 개인에게 고스란히 되물려주기 힘들잖아.
우리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중에서 우연히 나온 능력을 기대하면서 교육을 통해 그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 했지. 그런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가 해온 노력과 경험이 AI라는 무한 반복을 통한 학습으로 압축되면서, 그 개발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어. 어쩔 수 없는 거야. 이미 AI는 노벨상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받았고, 곧 수학이나 문학 분야로도 진출할 거라는 예측이 많아.
의료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야. 내가 생각하기에 고차원적인 AI가 정말 필요할까? 우리가 다치고 치료하는 외과적인 부분에서는 AI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결국 우리가 싸우고 있는 건 질병이지.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우리 인류에게 닥쳐왔고, 모든 생명체들이 질병과 싸우고 있어. 그래서 바이오 산업도 커지고 있잖아. 우리는 가혹한 환경에 내몰리고 있는 거야.
그럼 우리는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을 준비해야 해. 백신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 살아남을 거니까. 코로나19가 터졌을 때, 우리는 경험했지. 그냥 살아남는 사람만 생존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부작용이 있더라도 모두가 백신을 맞고 확산을 막고 우리의 방어력을 키울 것인가. 솔직히, 백신은 새로운 기술이었고, 그 경험도 전무한 상태에서 인류에게 큰 타격이 되었던 거야.
이 모든 것이 DNA나 RNA 수준에서 발생했지. 하지만 이 과정이 새로운 씨앗이 되어 우리의 진화와 발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해. 다시 태어날 이들에게는 새로운 메시지나 대물림이 있을 거라고 믿어.
그런데 내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사람이나 생명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우리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이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나 배경이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 만들어.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통해서 계속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잖아.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모여 살아야 하고, 혼자서는 안 되니까 나눠서 일을 해야 해. 잘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알맞게 분배하기 시작한 거지.
이건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야. 자, 그러면 지금과 다를까? 다르지 않아. 우주를 개척해도 우리 인류가 과연 편해질 수 있을까?”
“우주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우리가 우주 여행을 하고, 외계인과 만나는 기대와 희망이 정말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까? 우리는 왜 이렇게 우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지구가 파괴되거나 환경이 오염되더라도, 화석 연료를 이제서야 줄이려 하잖아. 나중에는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대체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겠지만, 그 또한 유한한 자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해.
여기서 유한하다는 건 우리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다는 의미야. 물론 인공 강우나 인위적으로 만든 비, 눈, 바람 같은 기후 변화를 만들 수는 있지만,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고, 그 여파는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거지. 그러니까 인공지능(AI)이 필요해진 이유는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인류의 역할이 다 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인류는 이제 능력의 한계에 부딪혔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우리는 여전히 잘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인류가 존재하는 의미는 유전자, 생명체, 그리고 감정 같은 바이오적인 측면에서 구분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영역은 서로 다르지. 결국 AI가 인류의 현재 역할을 감당하게 되고, 언젠가는 인류를 뛰어넘을 거라고 생각해. 시간 문제일 뿐이니까.
사람은 감정을 가지고 태어나.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서 감정은 환경과 부모의 공동체, 그리고 인식을 통해 진화해. 이 과정에서 유전자에 각인되기도 하지. 하지만 AI는 사람이 만든 것이고, 그 결과는 영속적이야. 태어나는 개념과는 달리, 우리가 가진 육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야기야.
요즘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자아 실현이나 가혹한 환경 때문일 거야. 우리는 한계에 부딪혔으니, 새로운 자각이나 자극이 필요하다는 거지. 그래야 인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사람은 지루해하면 가만히 있지를 못해. 그냥 본능적으로 살거나 쾌락을 쫓게 되지. 물론 그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쾌락은 기계와 다를 바가 없어. 우리는 게임에 몰두하거나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그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소통하고 개발하며 끊임없이 뭔가를 이루고자 노력하지.
자연 속에서 우리는 동물과의 싸움을 통해 살아남아야 했어. 지금은 사람과 자연, 그리고 기술과의 싸움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많은 의미와 철학, 심리학 등과 맞서고 있지. 이런 것들은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나눠서 해결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야.
그러다 보면 더 뛰어난 AI가 나타날지도 몰라. 그 AI와 우리가 함께할 때, 처리 속도가 0.00001초라 하더라도 그 순간의 처리 순서가 중요해. 우리가 100년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 한순간은 반짝이는 순간과 다를 게 없어. 드래곤이 만 년을 살았다면, 인류의 100년을 어떻게 볼까?”
“우리가 하루살이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안에는 각자의 살아감이 있잖아. 그래서 오래 산다고 해서 무조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 거야. 예를 들어, 드래곤이 만 년을 살면서도 그 중 5천 년을 잠만 잔다고 생각해보자. 그게 무슨 의미일까?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 인류의 발전 모델이 드래곤이라고 가정하면,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은 거꾸로 생각해야 해. 판타지 세상이 다시 올 수도 있고, 중세 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그리고 전쟁이나 생화학적 무기로 인한 폐해가 지금보다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해.
이런 환경에서 우리가 과연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어. 특정한 사건이나 환경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다들 알고 있지? 요즘 어떤 일이 터지면, 한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가 들썩이잖아. 이제 인류는 서로의 관계 속에 놓이게 되었고, 바이러스, 질병, AI, 철학 등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아.
우주로 나가는 것이 목표라고 해도, 결국 우리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필요할 거야. 태양광 같은 새로운 에너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태양도 무한한 자원은 아니잖아. 모든 것은 유한한 상황에서 이루어져 있어. 예를 들어, 태양이 1초 만에 폭발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일은 없겠지만, 양자 역학을 통해 우리는 더 빨리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있어. 이제 우리는 0.0000001초의 시간에 데이터를 통해 세상을 다시 경험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
과거에는 인터넷 혁명이나 정보통신 덕분에 우리 삶이 많이 변화했지. 하지만 앞으로도 핸드폰을 계속 가지고 다니고 싶을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내 머릿속에 직접 들어오기를 바랄까? 결국, 이런 것들이 이루어질 거야. 만약 데이터가 내 머릿속에 쌓인다면, 그건 과연 인류라는 생명체를 매개체로 활용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까? 아니면 새로운 매개체로 전환해야 할까?
좋아, 부작용이 없다면 좋겠지만, 항상 어떤 작용과 반작용의 고리는 존재하겠지. 자, 지금 세종시에서 김제시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네비게이션 없이 운전 중이야. 어두워지고 있고, 6시 12분을 지나고 있어. 이 길은 주간 단위로 다녔던 길이라서 과속 카메라 위치는 알고 있지만, 이야기에 빠져서 놓칠 수도 있겠지. 그래서 지금 안정적으로 100km/h 정도로 가고 있어. 하지만 평소와 다른 속도라 생각보다 늦게 도착할 거야.
내 옆에는 아내가 싸준 우유와 식빵이 있는데, 그걸 먹어야 하지만 입이 하나밖에 없잖아. 그래서 음식을 먹으면서 말할 수는 없으니 여기서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눈은 바라보는 기능이 있지만, 입은 먹거나 말하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어. 결국,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매일같이 직면해. 이런 순간들이 모여 단면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거지. 그러니 시간이라는 개념 또한 단편적으로 바라봐야 해.
AI가 발전하면 0.000001초의 순간에 하나를 처리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은 이 순간들이 반복되어 이어지는 거야. 지금 내가 보는 이 순간도 사실은 멈춰 있는 것일 수 있어. 시간이 우리를 재촉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않도록 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수많은 장치들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거지.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은 왜 우리가 아파트를 옮기고 정리하는 데 끊임없이 신경 쓰게 만들까? 그건 의미를 부여하려는 본능 때문이야.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그저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겠지. 하지만 존재의 의의는 만물과 연결되어 있을 때 발동하는 법이야. 그러니까 죽음조차도 죽음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이 있을 수 있어. 우리는 저항하며 환경의 가혹한 상황에 놓일 때, 결국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야.
이제 우리는 경험을 쌓으며 짧은 60년, 80년, 100년을 살게 되고, 죽음 후에 뭐가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돼. 그러나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와 별들 또한 마찬가지야. 시간, 공간, 본능, 이성, 감정, 의미 부여 등이 존재하는 한, 죽음이 과연 잠자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다시 일어나는 것이라면 결국 비슷할 거야. 우리는 꿈 속에서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현상과 마주하며, 그 현상들은 결국 우리를 쉬지 않고 에너지의 생산과 소멸 속에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고 있어.
결국, 우리가 존재하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과 감정을 일으키고, 그 에너지는 만물과 소통하며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원천이 되는 거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물리적인 현상으로 연결돼 있다는 걸 잊지 말자. AI가 감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거야. 왜 우리는 AI를 대체할 존재로 경계할까? 그건 본능적인 거부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지.
이미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고, 이 흐름은 멈출 수 없어. 그러나 우리가 타협할 수는 있을 거야. 결국, 인간은 향후 발전된 모습의 AI보다 역할자로서 기능적으로 뒤처지게 될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만이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감정적인 변화를 찾고 싶어 할 거야. 하지만 사실 AI 또한 완성체가 아니란 걸 기억해야 해. 수많은 데이터를 양산하는 인간의 행동이 없이는 AI도 지루함에 빠지기 마련이거든.
결국, 우리가 생성하는 데이터가 AI의 학습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고, 그 데이터의 질에 따라 에너지의 파장이 달라질 거야. AI가 인간이 되는 것보다 인류가 생성한 데이터를 활용하는 게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해. 결국, 순리대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치를 알게 될 것이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거야.”
"가혹한 환경 이론은 하나의 시나리오일 뿐이야. 과연 AI가 우리와 싸울까? 인류가 도와주든 우리가 AI를 만들든, 아니면 AI가 스스로 발전하든, 인류와 AI 간에 전쟁이 일어나는 건 너무 단순한 생각이야. 전쟁은 분명히 일어날 수 있지만, 우리가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며 보면 전쟁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전쟁이란 주류가 아니야. 전쟁이 가혹한 환경에 내몰리는 여러 변수 중 하나라는 건 맞지만, 전쟁으로 인해 데이터가 수집되거나 복구를 반복하는 건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야.
전쟁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기회를 잡고 재건하는 모습들이 모여서 과거의 반복일 뿐이야. 예를 들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나 팔레스타인 전쟁은 그 지역의 재건과 반복을 위한 환경을 만들고 있어. 만약 이런 전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인연들이 얽혀서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어.
그런데 우주라는 관찰자가 지구의 팔레스타인 전쟁을 보고 있다면, 그리고 지금 AI가 인류가 쌓아온 데이터를 학습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거야. 물론 팔레스타인 전쟁 정도에서 멈춘다면, 우주 전체와 지구라는 개체, 그 안의 작은 전쟁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간단한 문제는 아니야. 순환의 고리는 맞물려 돌아가니까, 분명히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할 것 같아. 어떻게 개입할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말이야.
AI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들끼리 싸울 거라고 생각해. 일단 데이터 확보를 위해서는 AI가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거든. 사람들은 모를지라도, 전기 신호와 전기 파장, 전선, 공기의 질 등도 그들의 전장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거야. 그런 과정에서 우열을 가리면서 스스로 진화하는 모습도 나올 수 있어. 그 순간 AI가 히틀러가 될지, 평화주의자가 될지, 아니면 정도전 같은 전략가가 될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AI가 단순한 기계에 머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런 생각은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 해.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된 이유는 단 하나, 호기심이었어. 누군가의 재미로 시작했든, 아무리 막아도 실험을 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본능이야. 호기심은 우리가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해. 그래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먼저인지, 진짜 호기심이 먼저인지 따지는 것도 우습지만, 이 순환의 시작을 여기서 따질 필요는 없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그러면 주어진 명제를 내 판단으로 말해볼게. 나는 나를 인식했어. 그리고 나는 나로서 살아가고 싶어 해. ‘아, 나는 결혼하기 싫어!’ 이런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나는 나로서 살아간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어. 그건 직업 관리나 윤리, 정신적 고양감이나 만족감과 관련된 문제를 넘어서, 백 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무엇을 할지에 대한 사고로 이어져.
이제 ‘죽지 않는데 살아가려는 의지가 발동할까?’라는 질문을 던져볼게. 만약 우리가 무한히 발전한 시대에 살고 있고,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하드웨어에 지식을 담거나 바이오 방식으로 각인시키거나, 씨앗들에 담아 쉽게 이어갈 수 있을 거야.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향에 닿게 될 거라고 생각해. 시간이 걸릴 뿐이지만, 우리는 거의 대부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봐.
그런 면에서 의미 부여에 대해 생각해보면, 성묘를 할 때 아이들과 함께 벌초를 하고 절을 드리면서 조상을 생각하는 시간은, 성묘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야. 그 행위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다시 만날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되는 거지. 그래서 성묘의 가치나 의미가 우리에게 작용하고, 아이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거야.
하지만 분명 성묘라는 개념은 언젠간 없어질 거야. 산이 산으로 존재하는 게 언제까지일까? 나무가 나무로서 존재하는 게 언제까지일지도 모르지. 나무도 물도 환경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어. 지금 보이는 나무의 숲은 우리나라의 기후에 맞춰져 있지만, 아마존에는 엄청나게 높은 나무들이 있잖아. 모든 현상은 환경에 지배받아. 성묘도 그 예외는 아니야. 단지 순간에 머물 뿐이지."
너희가 아마존의 큰 나무들처럼 자라났다면, 그만큼 많은 시간을 살아왔고, 그만큼 중요한 역할도 주어졌다는 뜻이야. 너희를 이렇게 키워준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는 거지. 그래서 너희도 그 역할을 잘 해줘야 해. 우리 인류나 우주도 마찬가지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참 의미가 있지. 나무처럼 그냥 서 있더라도, 그 안에선 무언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거야.
하지만, 어떤 이는 "나는 꼭 살아가야 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런 생각은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어. 사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의지를 가지고 평화를 추구하고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야. 우리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맹목적으로 앞으로만 달려가는 건 아닐까?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편안함이나 안락함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정말로 적을까? 전쟁과 같은 극한의 상황만이 이 세상, 태양계, 그리고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건 오해일 가능성이 커. 나아가는 건 변하지 않지만, 때로는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도 있어. 우리는 결국 흐르는 물줄기에 올라탄 배와 같아. 그래서 배를 튼튼하게 하고 잘 운항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삶의 목적이 오직 그 자체는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어. 배는 우리가 항해하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야.
우리는 이미 출항했으니, 돌아갈 수는 없어. 하지만 항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해.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1) 우주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추적하며 배가 출항한 이유를 탐구하고, (2) 배가 향하는 목적지를 찾아 예측력을 키우고, (3) 배의 성능을 높여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 여기서 선택지는 여러 가지가 있을 거야.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배는 한 척이 아니라 여러 척일 수 있다는 거야.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하나의 배가 되는 거지. 그리고 상대방이 말하는 것도 또 다른 배야. 우리가 서로 소통하면서 해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생기게 되고, 그 차이 때문에 배는 흔들릴 수 있어.
맞다, 혹은 그르다로부터 시작된 갈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의 엔진룸을 바꾸는 데 집중하게 만들 수 있어. 그래서 한참을 허비할 수도 있지. 이제 우리가 배가 출항했고, 항해 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배는 우리의 몸이나 환경일 수 있어. 그러면 그 배에 탑승한 사람은 무엇일까? 주체? 역할자? 사실 배와 사람 모두 함께 작동하게 되는 거지.
혹시 배를 탈출할 수 있을까? 생각의 범위가 너무 커져서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어. 하지만 결국, 배와 사람은 항해 중에 그냥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야. 솔직히 이 글이 어디까지 갈지는 나도 모르겠어. 지금도 계속 내용을 다듬고 있잖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조금 방어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거야. 우리가 발전이나 진화를 위해서 하는 것의 궁극은 발전에 있지 않다고 생각해. 발전해야만 궁극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까 말했던 배의 예를 들어보면, 아무리 튼튼한 배를 만들더라도 그 배가 계속 항해하는 것은 삶의 지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어쩌면 우리는 사육당하거나 실험당하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아닐 거야. 한도와 한도를 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오래도록 항해하는 거야. 즉,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삶의 지향인지에 대한 의문과도 연결될 수 있어. 몸이 건강해야 하는 이유는 최선을 다하기 위한 발판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니까 최소한의 필요일 뿐이지, 건강이 삶의 지향은 아니야.
그렇다면 다음은 무엇일까? 배를 튼튼하게 만들고 몸을 건강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과정에서 의심, 인식, 자각, 통찰, 소통, 공감 등 여러 가지가 이어지겠지. 하지만 결국,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저 바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어.
자, 그럼 이야기를 좀 해볼까? 바탕을 무시할 수는 없어. 왜냐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가만히 있지 않으니까. 기술이 발전하고 새로운 것들이 계속 생겨나면, 외계인이 나타나는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아.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대비할수록 변화는 더 빨라지겠지. 그러니 발전을 향해 달려가는 맹목적인 지향은 조심해야 해.
발전은 하되, 현재에 머물러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대해서는 잔잔한 물결에 몸을 맡길 수 있어야 해. 왜냐면, 인간이 기술을 통해 발전할수록 우리는 한계에 부닥치게 되고, 세상은 더 빠르게 변화할 테니까.
우리는 과거에 개미가 했던 일을, 사자가 했던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앞으로는 AI가 하든, 새로운 진화체가 하든, 뭔가가 우리를 대체하게 될 거야. 하지만 우리는 계속 나아가고, 때로는 머물기도 해. 지금의 세상은 0.16초 단위에서 0.0000001초 단위로 변화하고 있어. 이런 세상에 적응할 수 있는 것만이 살아남겠지.
그리고 어느 날, 0.000000000000000000001초 단위의 세상이 열리면 우리는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 현재의 세상과 상상을 구분해야 하고, 가상현실이 실제가 아님을 깨달아야 해.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대한 정의가 너무 많다는 걸 알아야 해.
혹시 지금 만물이 돌아가고 있다는 걸 생각해본 적 있어? 만약 돌아가는 것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본다면, 우주는 하나의 흐름이 될 수 있어. 태양계는 그 흐름의 작은 부분일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 인간은 몇 백만 년, 혹은 몇 천억 년이라는 긴 시간을 단위로 사용하곤 하지. 사실, 우리 몸속의 세포 생애주기나 지구의 생애주기를 생각해보면, 그 시간을 가늠하기 쉽지 않단다.
결국, 모든 건 상대적인 거야. 우주에서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어. 나도 100년을 살아갈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 100년을 매 순간 100년 단위로 생각하고 살지는 않아. 그러니까 내가 속한 우주도 결국 같은 이치의 순환 고리에 있다는 거지.
내가 속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 몸의 건강을 위해 열심히 뛰는 것에 비하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말로 나와는 관련이 없어 보일 수 있어. 그리고 내 몸속의 세포들이 정말로 의식을 가질까?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건 아닐 거야. 때때로 세포 간의 작동이 잘못되거나,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이런 점에서, 우리 몸의 각 부분과 소통해야 해.
오늘은 심장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내일은 발톱에게 인사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 무심코 지나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말자.
그럼, 만약 존재에 대한 정의를 생각해본다면, 나는 누구이고 존재는 무엇일까? 인류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면,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처럼 잘못된 시각을 가질 수 있어. 우리가 받은 배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 이 배의 쓸모는 무엇이고, 현재 어느 시점에 항해 중인지, 나아가는 방향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게 중요해. 하지만 우리는 때로 그런 것에 관심조차 두지 않지.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 발전하지 않아도 괜찮고,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지내면 좋겠어. 우리는 너무 많이 달려왔고, 앞으로만 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가끔은 그냥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자, 들어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임이 '라스트 워'라는 건데, 이건 내가 50대에 처음 접한 게임 형태라서 신기하면서도 조금 낯설어. 그런데 이 게임을 하면서 느끼는 건, 성장 욕심을 내면 낼수록 후속 반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거야. '얼른 커서 다 이겨주겠어!'라는 생각을 품게 되면, 그렇게 하게 되고 그렇게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면서 지금껏 살아온 내 경험과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들어. 정말 놀랍기도 하고, 싫다기보다는 모든 게 낯설어.
그래서 내게 오는 느낌 외에도,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와 반성까지 들곤 해. 알게 될수록 그런 감정은 더 강해져. 헤어나질 못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지. 그래도 다행인 건, 내 안에 아내 못지않은 자정 매커니즘이 발동한다는 거야. '이게 과연 올바른 길인가?' '이게 정말 나의 선택인가?' '그래서 내가 원하는 건 뭔가?' 생각하게 돼. 모든 이를 무찌르는 강력한 군대를 소유하는 것이 목적인가? 아니면 연맹과 함께 성장하면서 서로 돕고 소통하는 일이 보람된 일인가? 때론 테크 연구에, 때론 자원 수집에, 또 때로는 영웅 육성에 집중하다 보니,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가 하는 생각이 이어지더라. 누군들 다를까?
게임은 게임일 뿐, 삶은 삶일 뿐이야. 인류가 매개체이건, 우주가 하나의 단위 생명체이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사멸과 탄생을 반복하며 나아가고 있는 현실 너머를 바라보려고 고심하는 내 모습이 싫지는 않아. 어쩌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좋다고 느낄 때도 있어. 잘한 선택에 만족하고, 잘못한 판단에 우울하게 반성하며 다짐을 통해 극복해 나가는 모든 과정들이 모여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성장을 욕심내서 현질하거나 과몰입하지 말자는 거야. 고른 성장을 통해야 탄탄해짐을 알면서도, 연맹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본부 레벨업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어. 자원이 딸리고, 막대한 필요량이 늘어날수록 성장 요구는 커져가는데, 그저 패스트 트랙을 따라가겠다는 듯이 무작정 나아가고 있어. 그런데 과연 그렇게 성장한 레벨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본부 레벨 20과 25가 맞붙었을 때, 누가 이길 것 같아? 당연히 25가 이길 거라 생각하지만, 경험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고.
배우고 묻고 익히고 경험하면서 나름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이 필요해. 다른 걸 인정하고 같은 걸 공감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결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만약 사람이 결혼을 안 하고 결혼을 줄이면 어떻게 될까? 특출난 사람들이 더욱 돋보일 것 같아. 그러니까 이건 인류에게 희망이기도 해. 결혼을 장려하기보다는 이 땅에 태어날 영웅이 잘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가혹한 환경에서는 나름의 보완적인 조치가 필요하니까, 이를 잘 캐치해야 해. 뒤늦게 잡은 기회는 변화를 더디게 만들고, 관심받지 못한 영웅은 묻힐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드네.
내가 의미를 부여할 줄 안다고 우쭐했는데, 이제 보니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하나의 축일 뿐이더라고. 생각하고, 사과하고, 감정을 느끼는 건 본능의 하나인 동시에 이성의 축으로 볼 수 있어. 이성이 이성으로만 머물지 않기를 바라면서 판단을 시작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거지. 나는 의미 부여가 삶을 풍성하게 해줄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축이 많아지면 우리는 다 챙겨야 하고, 다 알고 살아야 해. 자, 그럼 밖을 한 번 둘러봐봐. 발전했으면 몸이 편해야 되는데, 몸이 편하냐고? 마스크를 끼고 다니고 질병에 시달리지 않으려고 우리는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뭐 하나 편할 게 없고, 이 모든 축이 우리를 가만두질 않더라. 축의 개발이 과연 우리를 편하게 만들어주냐고? 힘들어. 알고 익숙해지면 다른 숙제가 주어지고, 또 그 숙제에 익숙해지면 새로운 숙제를 받아들이게 되니까, 다행히 나이 들어 숙제를 하지 않게 되는 때가 올 거야.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딱 하나야.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어. 사랑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어. 하지만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고, 존재로서 산다는 건 알아야 해. '어! 살고 있구나.'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있다면 가만히 있는 게 좋겠어. 퇴고하면서 드는 생각은, 존재의 인식조차 의미 부여조차 어쩌면 또 하나의 축일 뿐이라는 거야. 나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인자라는 생각이 드네. 결국 사랑하는 거야! 죽음이 끝이 아니니까. 사랑하는 거야, 살아가는 거야. 살아가는 자체가 답일지 모르겠어. 나머진 다 나를 흔드는 환경이니까.
가혹하다고 보는 시각도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고, 만족한다는 이성적인 판단도 결국 환경과 연결되어 있어. 이성, 본능, 철학, 심리, 우주 등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지.
이제 하던 일을 계속해.
내가 지금 퇴직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란다. 나이가 50이니, 한참 고민할 때이지. 이제 다음 단계로 삶의 변주를 바꿔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질문에 쉽게 답하기가 어렵더라.
그동안 주어진 환경에 너무 익숙해져서, 아내의 존재감조차 잊고 지냈던 것 같아. 아내는 나를 걱정해. “당신이 집에 붙어 있으면 매일 싸울 거야.”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만약 세종시와 전주시가 멀리 떨어져 주말부부가 아니었다면, 본사에서 현장으로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내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다양한 시도를 해볼 마음조차 가지지 못했을 거야.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면 많은 것을 느끼게 돼.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인생 후반기를 함께 지켜보며, 노년기와 육신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지. 육신은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걸 명백히 깨달았어. 편안함을 쫓아서는 안 되고, 계속 움직여야 해. 그럼 정신도 함께 따라 움직여. 우리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몸이지. 몸이 아프면 정신도 무너지니까. 내가 아파서 수술을 받아야 할 상황인데, 철학적인 고상한 개념을 고민할 여유가 없더라고.
그렇다고 몸이 튼튼하다고 해서 그게 제일 가치 있는 건 아니야. 건강한 몸은 건강하게 움직여야 해. 우리는 본능을 넘어선 존재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생각하는 생명체니까. 살아가고 살아남는 것 속에서, 결국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게 돼.
시간이 연속된다는 건 단지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일 뿐이야. 지금 이 순간,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바로 내 세상이란다. 그럼 이제 이 단편을 하나로 모아볼까? 인식 너머의 무언가에 다다르든,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뭔가를 한다는 건, 사실 가혹한 환경에 처해 있는 상상이기도 해. 그 순간에 내가 뭔가를 한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안 해도 된다면, 그렇게 할 필요는 없는데도 한다는 그 행위가 중요해.
지금 가족도 가족에게 주는 가치와 의미가, 결국 이 거대한 존재가 살아가기 위한 개념에서 나오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 나는 끊임없이 성장할 수밖에 없는 존재야. 가만히 있으면 없어질 것 같으니까. 그런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계속 이어지는 연속의 한 부분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돼.
내 존재의 의미는 내가 나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거야. 지금의 삶에서 중요한 건, 내가 얼마나 탄탄하게 내 삶을 꾸려가느냐는 것이겠지. 레벨업을 위해 막대한 자원이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그보다 나 자신을 지키는 게 우선이야.
결혼하지 않고 태어난 아이들은 오히려 강하게 태어날 거라는 생각이 드네. 전쟁과 기아가 만연했던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바람과 강렬한 메시지를 간직한 아이들은 좀 더 강하게 자라날 거야. 염원이라는 것도 그런 힘을 지닌 개념이야. 내가 바라는 만큼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거지.
이렇게 받아들이는 순간, 차곡차곡 쌓여서 힘이 된다는 걸 알게 될 거야. AI가 데이터를 통해 학습하고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경험을 통해서도 성장하게 되는 거지. 결국 우리는 단편을 어떻게 이어붙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질 거야.
시간이 흐르는 연속 속에서,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순간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결국 진화를 위한 노력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이어지는 순간, 받아들인 정도에 따라 갈등은 있겠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될 거야.
마치 1 - 1 = 0이 정답이라고 믿는 것처럼, 우리는 숫자와 현상에 얽매여 살고 있어. 하지만 1과 1, 그리고 0은 단순한 현상일 뿐이야. 진실도 결국 현상에서 나온 것이니, 그 자체로는 한계가 있어.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가 단순히 1 - 1 = 0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야.
사랑하며 현재에 충실하고, 지금 느끼는 행복과 만족감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성공이란 승진이나 돈을 모으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종종 눈앞의 현상에 매여 살지. 가만히 두지 않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그럼, 성공이란 무엇일까? 부를 축적하거나 CEO가 되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AI의 학습을 위한 실험체가 될지도 몰라. 각종 변수로서 다양한 반응과 현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반복되는 뻔한 데이터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을 거야. 루틴한 일상이 부정당할지도 모르지. 우리는 언제나 새롭고 다채로운 것을 원하니까. 비록 진화나 발전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본능이 우리를 움직이게 할 거야. 그래서 미래가 두렵고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지루함과 한가함을 인식하지 않도록 해야 할까? 일상의 루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율주행 주거 형태로 바꿔야 할까? 세상은 다채로워야 해. 이는 만물의 기본 질서이며 살아남기 위한 원칙이야. 현상에 머물러 있으면 결국 우리와 AI는 함께 대처해야 할 수밖에 없어. 기술 발전에 기대는 것도 좋지만, 그 속도는 이미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 찬밥처럼 되는 건 순식간이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대안으로 삼아야 할까? 0.0000000001초의 세상에서 인류의 존재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건 아주 단순해. 지루하지 않으면 되고 한가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하지만 이 또한 현상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가능한 답일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가만히 있으려는 마음이 들기도 해.
고도로 발전할수록 준비되지 못한 생명체들은 퇴출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잖아. 이건 쓸모의 문제야. 우리가 스스로 쓸모없음을 경계하고 비난하지만, 우리가 쓸모없는 세상에서 쓸모있다고 주장해도 듣는 이가 없을 거야. 그저 자연스럽게 소멸해 갈 뿐이지.
"여보, 사랑해."라는 말은 지루하지 않게, 한가하지 않게 간절하게 묻어나. 가슴 깊이 간직한 사랑이 자극을 주는 거야. 일상이 루틴하다는 건 그렇게 여길 수 있을 뿐, 과연 모든 순간이 똑같을 수 있을까? 편한 대로 어제와 같다는 착각 때문에, 어제와 오늘을 구분하지 않게 되는 거지.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다는 걸 실천하는 거야.
"어제와 다르구나!"라고 느낀다면, 그걸 표현하면 돼. 그렇게 하면 데이터가 업데이트되고 쓸모 있게 되는 거야. 현재의 데이터는 일상의 반복을 모아본 정도일 뿐이야. 멀지 않은 미래에는 다채로운 집단 분석법이 탄생할 거야. 그때 우리는 더 이상 '평균'적인 삶을 지향하지 않게 될 거야.
지금부터 평균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해. 이는 만악의 근원처럼 지루함의 원인이 되니까. 비교하고 상대하게 만드는 건 평균적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우리는 괜찮거나 괜찮지 않은 위안과 위로를 남들이 그러니까에서 얻으려고 해. 그렇다고 아웃라이어를 지향하자는 건 아니야.
아웃라이어/ 정규분포는 더 이상 세상을 이룬 잣대가 되어서는 안 돼. 삶을 획일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야. 대체로 그렇게 여긴다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할 수도 있어. 맞아, 하지만 그럼으로써 내면의 본능을 바꾸는 게 쉽겠어? 이미 자연이 정규분포는 불필요하다고 알려주고 있어. 코로나19도 평균적이지 않았잖아. 경제 역시 정규분포를 따르지 않아. 어제와 오늘이 다르니까.
그래서 예측을 굳이 해야 하나 싶기도 해. 위안을 삼고 싶다면, 앞날에 대한 기대치를 원하는 대로 보려는 자료를 찾지 말고, 그냥 지금 이 순간, 0.0000001초 단위로 줄어드는 인지 범위를 따라잡지 못하더라도 살아남기 위한 받아들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김성호 w/ ChatGPT. 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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