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 공포] 무엇을 할 것인가
글로벌 경제가 결국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공포가 날로 확산되고 있다. 일단 디플레이션에 빠지게 되면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 지금까지 어떤 나라도 사용해보지 않았던 비전통적인 정책들이 제안되고 있다
시사인 2016.3.31
지난 2월 한국의 수출액은 364억 달러다. 지난해 같은 달보다 12.2%나 줄었다(산업통상자원부 발표). 이런 추세가 지난해 1월 이후 14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다. 한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수출 부문이 무서운 속도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전망도 어둡다. 더욱이 이 같은 현상이 순전히 한국 내부 요인(기업·노동자·정치 등)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오히려 글로벌 경제의 전반적 침체를 가장 큰 원인으로 봐야 한다. 2008년 가을 세계 금융위기라는 중병에 걸렸던 글로벌 경제가 그동안 조금씩 회복되는 조짐을 보이다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의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연합(EU)과 일본 경제는 파격적인 경기부양 정책들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나마 가장 회복세가 뚜렷한 것으로 간주되던 미국 역시 지난해 4분기부터 경제성장률이 정체된 상태다. 중국 세관이 3월8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2월 수출실적은 지난해 같은 시기에 비해 20.6%나 떨어졌다. 세계 경제위기 이후 가장 큰 낙폭이다. 세계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던 러시아·브라질 등의 이머징마켓에서는 원자재 가격의 폭락에 따른 성장률 지체는 물론이고 외자 유출로 인한 금융위기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글로벌 경제가 결국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라는 절망과 공포감이 날로 확산되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전반적인 물가 수준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물가 인하는 반가운 일인 듯하다. 그러나 경제 전반적으로는 악재 중 악재다. 오늘 1억원인 기계설비가 다음 달에 9000만원으로 내려갈 것으로 보인다면, 기업 측은 투자를 뒤로 미룰 것이다. 소비자들 역시 지금 100만원인 TV 가격이 다음 달에 90만원으로 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면 TV 구입을 연기할 것이다. 모든 경제주체가 이런 식으로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 경제 전반에서 기업은 투자를 꺼리고 가계는 소비하지 않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누구도 자신의 생산품이나 서비스를 팔아 돈을 벌기 어렵게 된다. 일단 디플레이션에 빠지게 되면 헤어나오기도 쉽지 않다.
close
그동안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디플레이션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물가를 올리기(인플레이션) 위해 나름 과격한 정책들을 추진해왔다. 당초에는 기준금리를 0%로 내렸다. 금리 인하는 전통적인 불황 대책이다. 성과가 없었다. 그다음에는 대규모 양적완화로 통화 공급(본원통화)을 이전의 3~4배까지 확장했다.
양적완화는 비전통적(unconventional) 통화정책으로 불려왔다. 중앙은행이 새로 찍어낸 돈으로 일반은행의 보유 채권을 대량 매입한다.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은 채권을, 일반은행은 돈을 갖게 된다. 이처럼 중앙은행이 일반은행에 직접 돈을 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양적완화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 불린다.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통화정책은, 일반은행이 중앙은행에 맡긴 보유금에 대한 금리를 조금씩 올리거나 내리는 정도다.
이처럼 파격적인 방법(양적완화)을 통해 대다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물가인상률 2% 달성’을 목표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큰 효과는 없었다. 물가인상률이 잠시 2% 벽을 뚫고 올라가기도 했으나 오래가지 못해 힘을 잃고 이전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OECD가 조사한 각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자료에 따르면, 양적완화가 시행된 이후 미국·유로존·영국 등 주요국의 연간 물가인상률은 2011년 정점에 오른 뒤 계속 떨어지는 추세다. 지난해는 세 지역 모두 사실상 0%를 기록했다. 2013년에 양적완화를 시행한 일본은 이듬해인 2014년에 연간 물가인상률 2.7%를 달성했다. 그러나 ‘드디어 물가가 오른다’라는 환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해 일본의 연간 물가인상률은 다시 0.8%로 급락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올해나 내년 사이 세계경제는 전반적인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전락할 수 있다. OECD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세계경제는 2015년보다 2016년에 더 느리게 성장할 전망이다. 지난 5년을 통틀어 현재의 성장 속도가 가장 느리다”라고 주장했다. 아무리 금리를 내리고 돈을 뿌려도 경기를 자극할 수 없고, 물가도 올라가지 않는다.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기존 불황 대책들
물론 어떤 절망적인 상황도 뚫고 나갈 방법은 있는 법이다. 그런데 현 국면에서는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정책 수단을 사용해버렸기 때문이다. 대다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기준금리는 이미 수년 동안 0%였으므로 더 이상 내리기도 힘들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은 지난해 12월 비로소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으나 이후 글로벌 불황이 더욱 심화되고 자국 경기도 침체되는 양상이 드러나고 있어서 계속 금리를 인상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 상태다. 양적완화 역시 불황 극복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 갈수록 명확해진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어떤 나라도 사용해보지 않았던 비전통적인 정책들이 제안되고 있다. 그것도 진보 좌파 경제학자들이 아니라 선진 자본주의 나라의 중앙은행에서 고위직을 지내는 등 주류의 길을 걸어온 경제학자들 중에서도 예전 같으면 ‘황당하다’고 평가받을 정책 수단들을 내놓고 있다.
그중 가장 먼저 실험되고 있는 것이 바로 마이너스 금리 제도다(32~33쪽 기사 참조). 2014년부터 EU와 유럽의 다른 소국들에서 시행되더니, 최근에는 일본은행(일본의 중앙은행)에까지 도입되었다. 중앙은행이 자행에 예치된 일반은행의 보유금(reserve)에 대해 수수료를 받는 제도다. 비록 중앙은행과 일반은행 간에 벌어지는 일이지만, 돈을 맡기고 이자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측면에서 기존 금융 원리를 완전히 전복하는 제도다. 일반은행에 ‘중앙은행 계정에 돈을 넣어두지 말고 실물경제에 대출하라’는 노골적인 압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행해서는 안 되는 일종의 금기 사항으로 간주되어온 ‘재정정책’을 복권하려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34~35쪽 기사 참조). 중앙은행이 일반은행의 보유금을 늘려주는 양적완화가 아니라 기업과 가계에 직접 돈을 줘야 한다는 ‘헬리콥터 머니’ 역시 대안적 통화정책으로 제기되고 있다(36~37쪽 기사 참조). 한편 1970년대에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던 ‘소득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촉진하기 위한 대안으로 주장되고 있는 흐름도 흥미롭다(오른쪽 기사 참조).
2016년 3월 현재, 세계경제가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떨어질 위험이 크다는 데는 거의 모든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듯하다. 명백한 것은, 기존의 불황 대책 중 상당수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의 국면에서 더 이상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새로운 틀의 대안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면서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점이 그나마 희망의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통화정책 지고 재정정책 뜰까
경제 불황을 극복할 새로운 카드로 재정정책이 주목받고 있다. 통화정책이 사실상 실패했다는 진단이 곳곳에서 나온다. 재정정책은 정부가 직접 재정을 투입하는 만큼 경기에 미치는 영향도 직접적이다.
‘통화정책의 독재’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2월24일 낸 보고서에서 “세계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G20 국가들은 재정지출 여력을 활용해 공공투자를 확대하는 공조계획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지난 2월26~27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도 “모든 정책 수단(all policy tools)”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수사가 등장했다. 그동안 세계 각국이 통화정책을 사실상 ‘유일하게 정당한’ 불황 대책으로 운용해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젠 재정정책도 과감하게 사용해달라’는 권고로 해석할 수 있다.
불황기의 통화정책은 금리 인하로 경기를 부양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금리를 내리면 기업과 가계 등 경제주체들이 더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빌려 투자하고 소비할 수 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금리가 인하될 경우 모두 혜택을 본다. 그러므로 정치인이나 공직자가 특정 계층으로부터 인기를 끌기 위해 악용할 ‘선심성 정책’으로 사용되기 힘들다. 더욱이 통화공급량을 늘리고 금리를 내려도, 정부가 부채를 지는 일은 없다.
이에 비해 재정정책의 경우, 정부가 특정 산업 부문이나 계층, 복지, 공공 인프라 등에 직접 재정을 투입한다. 그만큼 경기에 미치는 영향도 직접적이다. 그러나 정치인이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목표로 악용할 소지가 크다. 가장 큰 문제는 세입(정부의 수입)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빌려서(국채 발행) 지출하는 과정에서 정부 부채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2010년 전후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 남부 국가들의 국가부도 위기 이후 정부 부채 문제는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미국 오바마 정부의 경우, 정부 지출 규모를 공화당의 반발에 따라 크게 줄이는 상황에 처하면서 당초 계획한 전 국민 건강보험 등 복지제도를 축소해야 했다. 이런 세계적 추세로 인해, 2010년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 정부들은 통화정책 일변도로 불황에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노령화와 불황으로 빈곤층이 늘어나면서 정부 지출은 ‘자동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재정정책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재정정책을 불황에 대처하기 위한 적극적 정책 수단으로 제시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close
<div align=right><font color=blue>ⓒXinhua</font></div>2월26~27일 중국 상하이에서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불황 대책으로 재정정책의 과감한 사용을 권고했다.
ⓒXinhua
2월26~27일 중국 상하이에서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불황 대책으로 재정정책의 과감한 사용을 권고했다.
문제는 통화정책이 불황 극복에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기준금리 0%’에 이어 엄청난 규모의 양적완화가 시행되었고, 최근에는 일부 국가에서 마이너스 금리 제도까지 도입했다. 모두 통화정책이다. 그런데도 실물경기는 움직이지 않고, 따라서 물가도 오르지 않는다. 그동안의 통화정책 일변도에 대한 회의감이 조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제 불황에 통화정책이 무용해진 까닭
이와 관련해, 각국 정부가 재정정책을 무시했기 때문에 불황이 극복되지 않는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온 리처드 쿠 일본 노무라연구소 수석연구원의 주장이 관심을 끌고 있다. 리처드 쿠는 최근 고객들에게 보낸 연구 보고서에서 마이너스 금리를 “양적완화로도 ‘물가인상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각국 정책 당국의) 절망감에서 나온 자포자기적 행위”로 몰아붙이며 “정책 당국은 (경제학) 교과서의 가정들을 맹종하느라 실물경제를 계속 무시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쿠가 생각하는 경제학 교과서의 오류는 무엇인가?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민간 기업들의 목표는 어떤 시대 어떤 지역에서나 ‘이윤 극대화’다. 또한 경제주체들은 금리가 충분히 낮다면 기꺼이 돈을 빌려 투자한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쿠는 글로벌 경제 차원에서 지난 10여 년에 걸쳐 이 같은 기본 원리들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잇따라 터진 크고 작은 금융위기들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세계경제가 급격한 성장을 거듭해온 것은 사실이다. 이 같은 성장에 큰 몫을 한 것이 바로 부채였다. 금융 시스템의 발전에 따라 경제주체들은 자기자본보다 남의 돈을 빌려 활발히 투자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성장이 촉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금융위기가 터져버리면 부채로 번성했던 기업들이 엄청난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이 10억원을 빌려 부동산에 투자했다고 가정하자. 금융위기가 터지면, 모든 경제주체는 부도를 면하기 위해 유동성 높은 현금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된다. 부동산 등 실물 자산의 가격은 폭락한다. 그러나 부채는 고스란히 남는다. 이 기업의 경우, 부동산 가격이 5억원으로 떨어졌다면, 부동산을 팔아 5억원을 갚은 뒤 나머지 5억원의 부채를 상환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쿠에 따르면 거의 모든 민간 경제주체들이 부채로 자금을 조달해서 투자하다가 부도 위기를 맞는 경험을 겪었다. 이런 충격은 상당 기간 지속된다. 결국 민간 기업들은 본연의 임무인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부채 최소화’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아무리 금리가 낮아도 돈을 빌리려고 하지 않는다. 쿠는 “전통적 경제학들은 우리가 2008년 이후 살고 있는 종류의 세계를 상상하지 못했다. 서구 경제에서 1940년대(거시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나타났던)와 2008년 사이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EPA</font></div>리처드 쿠 노무라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금융위기로 인해 경제학의 기본 원리들이 변화되었다며 재정정책을 강조한다.
ⓒEPA
리처드 쿠 노무라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금융위기로 인해 경제학의 기본 원리들이 변화되었다며 재정정책을 강조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통화정책은 무용하다. 아무리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고 많은 유동성을 공급해도 정작 경제주체들이 돈을 빌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중앙은행이 양적완화를 통해 엄청난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한다고 해도, 그 돈은 일반은행에 들어가 보유금(reserve) 형태로 고여 있을 뿐이다. 기업이나 가계가 일반은행에 가서 대출해야 고여 있던 보유금이 실물경제로 투입되어 경기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 실제로 쿠가 제시하는 여러 나라의 자료를 보면, 중앙은행이 일반은행에 공급한 통화(본원통화)는 엄청나게 증가한 반면 ‘실제로 민간이 빌려 사용한 돈’의 지표는 거의 증가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일반은행들은 자행 내부에 보유금 형태로 고여 있는 돈을 실물경제가 아니라 금융자산이나 부동산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은행이 실물경제를 부양한다는 명목으로 새로 찍어낸 돈들이 금융 시스템 내에서만 돌아다니며 외부(실물경제)로는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양적완화 이후 주식시장은 호황을 누렸지만 정작 실물경제는 불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유다. 상황이 이러하니 물가가 오르지 않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쿠는 재정정책을 강조한다. 양적완화 같은 강력한 통화정책이 작동되지 않는 이유는 실물 부문의 경제주체들이 돈을 빌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양적완화로 발행된 돈을, 무력한 민간 부문 대신 빌려서 경제 전반에서 파급력 높은 부문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한동안 정부 지출로 경기를 안정시켜 민간 소득을 유지해야, 민간 부문이 비로소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투자와 소비를 본격화하는 호황 국면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 쿠의 주장이다.
다만 이 같은 ‘재정정책의 복권’이 현실에서 쉽게 이뤄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연합 등에서는 정부 지출 확대를 법률적으로 제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재정긴축 세력’이 다수 지위를 점유하고 있다. 더욱이 2008년 이후 선진국들의 국가 부채가 크게 증가한 상태라 시민들을 설득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
‘헬리콥터 머니’가 주목받는 이유
불황의 가장 전통적인 정책 수단은 금리 인하다. 하지만 이미 금리가 너무 낮은 수준이라서 더 내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돈을 더 찍어서 나눠주면 된다. 헬리콥터 머니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제안해온 정책이다.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가장 골치 아픈 경제 문제가 있다면, 단연 ‘수요 부족’이다. 기업이 아무리 좋은 상품을 생산해도 판매할 수 없다. 이런 불황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정책 수단은 금리 인하다.
이미 금리가 너무 낮은 수준이라서 더 내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 삽시간에 수요를 늘리는 방법이 있긴 하다. 중앙은행이 돈을 더 찍어내 기업과 가계에 나눠주면 된다. 자유시장경제론의 대부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이미 1969년 한 논문에서 ‘헬리콥터 머니’라는 우화를 제시한 바 있다. 중앙은행이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헬리콥터에 지폐를 잔뜩 싣고 마을 상공에서 뿌리는 광경이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 벤 버냉키 전 의장 역시 지난 세계 금융위기 당시 헬리콥터 머니를 ‘세금 환급(tax rebate)’ 형식으로 시민들에게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정부가 시민들 각각에게 세금 환급 명목으로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면, 중앙은행은 그 액수만큼 돈을 찍어 정부에 주면 된다. 최근엔 영국의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BOE·영란은행) 총재를 역임한 윌럼 뷰이터(현 씨티그룹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이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얼핏 듣기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이야기지만, 세계적으로 쟁쟁한 주류 경제학자들이 제안해온 정책인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자료</font></div>시장경제 시스템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수요 부족이다. 위는 한 대형마트의 특가 코너.
ⓒ시사IN 자료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수요 부족이다. 위는 한 대형마트의 특가 코너.
시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어떤 형태로든 ‘정부’로부터 돈을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헬리콥터 머니가 왜 새로운 아이디어인지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그래서 덧붙이자면 실업급여, 의료보험 급여 등 시민들이 ‘정부’에서 받는 돈은, 엄밀히 말하자면 정부(입법·사법·행정) 가운데서도 행정부에서 나온다.
close
따지고 보면, 돈을 발행하는 중앙은행 역시 ‘광의의 정부’에 속한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같은 정부에 속하는 행정부에 그냥 넘겨주면 안 되나. 같은 정부끼리인데 뭐 어때? 결코 그렇지 않다. 현대사회는 행정부와 중앙은행의 살림살이를 엄격히 따로 꾸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언제나 돈에 굶주린 행정부가 그때마다 중앙은행에 ‘명령’해서 돈을 갖고 오게 하면, 자칫 돈이 너무 많이 발행되어 돈의 가치를 지나치게 떨어뜨릴 수 있다(하이퍼 인플레이션). 그래서 원칙적으로 행정부와 중앙은행은 돈거래를 할 수 없다.
행정부가 돈(재정)을 조달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금이고 다른 하나는 빌리는 것이다. 예컨대 100억원 상당의 국채를 민간 부문에 팔면 된다(민간으로부터 100억원을 빌리는 셈). 그러나 행정부는 국채를 중앙은행에 매각(중앙은행으로부터 직접 돈을 빌리는 것)할 수는 없다. 자칫 중앙은행이 행정부의 사금고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중앙은행의 (정부로부터) 독립성’이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 중 대부분은 일반은행으로 인수된다. 그런 다음 대출 등을 통해 민간 부문에서 확산된다. 그런데 중앙은행이 일반은행에 돈을 그냥 주지는 않는다. 예컨대 돈을 제공하면 그에 상당하는 증권을 받는 식이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돈은 중앙은행의 부채로 간주된다. 당신이 가진 1만원짜리 지폐는 한국은행이 당신에게 1만원 상당의 빚을 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중앙은행은 1만원을 일반은행에 넘길 때 그 가치에 상당하는 물품(예컨대 채권)을 받아 ‘자산’으로 보유해야 한다. 그래야 빚과 자산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만약 빚이 자산보다 많아진다면, 중앙은행 역시 회계상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된다. 양적완화의 경우에도, 중앙은행은 일반은행에 유동성을 제공하는 대신 그 은행 소유의 채권을 인수했다. 이에 반해, 중앙은행이 시민들에게 직접 돈을 주는(설사 행정부를 경유한다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헬리콥터 머니의 경우, 중앙은행이 자산으로 받는 것 없이 부채(돈)만 늘리는 경우가 된다.
양적완화와 헬리콥터 머니의 차이점
선진 자본주의국에서 양적완화가 시작되던 2010년 전후, 언론은 양적완화를 헬리콥터 머니에 비유하기도 했다. 두 정책 모두 ‘민간’에 돈을 뿌리는 것이므로 비슷한 측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양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헬리콥터 머니’는 중앙은행에서 새로 발행한 돈이 시민들에게 바로 전달되는 형식의 경기부양책이다.
ⓒ연합뉴스
‘헬리콥터 머니’는 중앙은행에서 새로 발행한 돈이 시민들에게 바로 전달되는 형식의 경기부양책이다.
양적완화의 경우, 중앙은행의 돈을 받는 주체는 일반은행이다. 이 덕분에 일반은행의 보유금(일반은행이 중앙은행에 갖고 있는 계정 내의 돈)이 크게 늘어난다. 양적완화 입안자들은 일반은행의 보유금이 크게 증가하면서 민간 실물경제로 넘쳐흘러(trickle down) 경기 부양에 기여하기를 기대했다. 말하자면, 양적완화는 은행을 통해 실물경제에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도록 설계된 정책이다.
이에 비해 헬리콥터 머니는 실물경제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 중앙은행이 새로 발행한 돈이 시민들의 지갑이나 계좌에 바로 꽂히기 때문이다. 세금 환급처럼 행정부를 통해 배분되어도 마찬가지다. 양적완화와 달리 중간에 금융기관이 끼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헬리콥터 머니는 ‘시민에 대한 양적완화(QE for the people)’로 불리기도 한다. 더욱이 ‘이렇게 돈이 뿌려지니 곧 물가가 오르겠군’ 하는 기대를 민간에 심어줄 수도 있다. 디플레이션의 경우와 정반대로, 물가가 오를 것으로 예상되면 투자와 소비를 앞당기는 경향이 있다. 많은 경제주체가 투자와 소비를 서두르면 실제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될 수도 있다. 영국 브라운 대학 마크 블라이스 교수 등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가디언> 2015년 5월21일) ‘가계에 대한 현금 이전’, 즉 헬리콥터 머니가 수요에 주는 영향은 양적완화보다 훨씬 크다. 가계는 헬리콥터 머니처럼 ‘횡재로 생긴 돈(windfall)’에 대해서는 3분의 1 내지 2분의 1을 바로 소비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GDP의 3% 정도를 헬리콥터 머니 방식으로 가계에 지급하면, GDP가 1~1.5% 정도 성장한다는 이야기다. 이에 비해 영국 GDP의 20% 정도인 양적완화는 GDP 성장에 3% 정도 기여한 것으로 잉글랜드 은행은 본다. 양적완화로 발행한 돈을 헬리콥터 머니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직접 지급했다면, 7~10% 정도의 GDP 성장이 가능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겠다. 이에 따라 마크 블라이스 교수 등은 “중앙은행이 가계 부문에 직접 현금을 지불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헬리콥터 머니는 현대 경제 시스템을 완전히 전복할 수도 있는 주장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분리라는 철칙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빚과 자산을 동일하게 유지해야 하는 중앙은행의 재무구조에도 위협적이다. 더욱이 재정정책인지 통화정책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돈이 곧바로 정부 지출 용도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국의 경제 전문 칼럼니스트인 클라이브 크룩은 <블룸버그>(2015년 5월31일) 기고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일반적인 통화정책은 이미 무력한 형편이다.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구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중앙은행이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간의 잡종(헬리콥터 머니)’ 없이 ‘물가인상률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중앙은행의 독립성 역시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성취할 수단이 있을 때만 말이 되는 이야기다.”
‥
통화정책의 최종 버전, 마이너스 금리
돈의 소비를 미루고 빌려준 대신 이자를 받는 것은 금융의 기본 원리다. 이런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데도 ECB, 일본 등에서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다. 미국 연준이 마이너스 금리를 채택할 가능성도 있다.
‘마이너스 금리’란 예금자가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축기관에 일종의 보관료를 내야 하는 제도다. 한마디로 많이 저축할수록 손해다. 현금으로 가지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수십만원이라면 몰라도 수억~수십억원만 돼도 현금으로 소지하는 데에 엄청난 비용이 든다. 고성능의 금고와 보관 장소가 필요한 데다 심지어 경비원까지 고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보다는 차라리 저축 액수를 가급적 줄이는 방법, 즉 소비하거나 투자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일 수 있다. 결국 마이너스 금리는, 저축하지 말고 소비(투자)하라는 금융 당국의 ‘무언의 압박’이다. 2014년 유럽중앙은행(ECB) 마리오 드라기 총재가 마이너스 금리 도입을 선언한 이후 스위스, 덴마크 등도 이 제도를 채택했다. 지난 1월에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도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다고 선언했다.
그동안 선진 자본주의국 정부들은 금리와 통화량을 조절해서 경기를 부양하는 통화정책에 집착해왔다. 재정정책은 논외였다. 통화정책 가운데서도 극단적으로 과격한 ‘기준금리 0%’와 양적완화 같은 수단까지 서슴지 않았지만,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통화정책 시리즈’의 최종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이너스 금리밖에 없다.
물론 마이너스 금리가 가계나 기업에 적용된 사례는 없다(논의된 적은 있다). 지금까지는 은행들에만 적용되고 있다. 은행도 저축을 한다. 유럽과 일본의 금융 당국은 은행들에게 ‘저축하지 말고 투자하라’는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의 투자는 기업이나 가계에 대한 대출이니까, 많이 대출해서 경기를 살리라고 은행의 팔을 비틀고 있다는 의미다.
close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지난해 드라기 ECB 총재를 만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왼쪽). 최근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다.
ⓒAP Photo
지난해 드라기 ECB 총재를 만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왼쪽). 최근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다.
그렇다면, 은행들은 어디에 저축하는가? 중앙은행에 저축한다. 가계와 기업이 일반은행에 계정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은행들은 중앙은행에 자행 명의의 계정을 갖고 있다. 그 계정엔 일반은행의 돈이 예치(저축)되어 있다. 이 돈을 일단 보유금(reserve)이라 부르기로 하자. 보유금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급준비금’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일반은행들은 자행에 들어온 예금 중 일정 비율(지급준비율)을 중앙은행 계정에 의무적으로 예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를테면, A라는 은행에 들어온 예금액이 모두 1000억원이라면, 지급준비율이 10%(한국의 실제 지급준비율은 11.5%)인 경우, 100억원을 중앙은행에 있는 A은행 명의의 계정에 예치해둬야 한다. 물론 더 많이 넣어둬도 괜찮다. 만약 A은행이 중앙은행의 자행 계정에 모두 120억원의 보유금을 갖고 있다면, 이 중 20억원(보유금 120억원에서 지급준비금 100억원을 뺀 액수)을 ‘초과 지급준비금(초과지준)’이라 부른다. 중앙은행이 이자도 준다.
이 초과지준으로 인해 경제 시스템의 작동에서 가장 중요한 금리가 형성된다. 이른바 오버나이트 금리(overnight rate)다. 은행들은 영업을 마친 뒤, 상호 간에 정산을 한다. 하루 동안 고객들이 이 은행 저 은행으로 옮긴 금액을 최종 결산하면 은행끼리 주고받아야 할 금액이 나온다. 정산 결과, A은행이 B은행으로 일정 액수를 지급해야 한다면, A은행의 중앙은행 계정에서 B은행의 중앙은행 계정으로 해당 금액을 옮기게 된다. 그런데 A은행이 B은행 계정으로 보낼 돈이 30억원이라고 가정해보자. A은행의 보유금 120억원 중에서 30억원을 빼내면 90억원이 남는다. 의무적으로 유지해야 할 100억원보다 10억원 적다. A은행은 다른 은행으로부터 급히 10억원을 빌려야 한다. 만기는 하루다. 다른 은행들 역시 지급준비금은 유지해야 하므로 초과지준 가운데 일부를 A은행에 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은행 간의 자금 거래’가 매일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은행 간 하루 만기 금리’인 오버나이트 금리가 형성된다. 은행들이 다른 은행에 빌려줄 초과지준이 풍부하면 오버나이트 금리가 내리고, 반대의 경우에는 오른다는 의미다.
‘초과지준’의 이자 조절해 오버나이트 금리 조정
오버나이트 금리는 상환받지 못할 위험이 극히 작은 든든한 상대(다른 은행)에게 초단기로 빌려주는 돈의 이자율이다. 당연히 매우 낮은 수준으로 형성된다. 은행들이 다른 종류의 수많은 대출에 각각 금리를 매길 때 ‘바닥’ 같은 역할을 한다. 가장 밑에 있는 오버나이트 금리가 올라가면(내려가면), 다른 대출의 금리도 인상된다(인하된다).
그러므로 중앙은행이 경기 조절을 위해 사회의 여러 금리를 올리거나 내리려면, 이 오버나이트 금리를 움직여야 한다. 예컨대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3%로 제시했다면, 오버나이트 금리가 3%로 접근하도록 조치하겠다는 의미다.
중앙은행은 어떤 방법으로 오버나이트 금리를 움직이는가? ‘은행 간 자금 거래 시장’에 개입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예컨대, 일반은행이 중앙은행 계정에 ‘저축’해둔 초과지준의 이자를 조절하면 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FP</font></div>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 ECB는 2014년 마이너스 금리 도입을 선언했다.
ⓒAFP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 ECB는 2014년 마이너스 금리 도입을 선언했다.
유로존 중앙은행인 ECB의 경우, 지난해 12월의 초과지준에 대한 금리가 마이너스 0.3%였다. 오버나이트 금리는 이보다 조금 높은 마이너스 0.24%다. 일반은행들 처지에서는 같은 마이너스 금리지만 ECB에 예치해두기보다 다른 은행에 빌려주는 쪽이 손해가 적다. 또한 오버나이트 금리가 내리면 은행들이 일반 고객에게 빌려주는 금리도 하락한다. <파이낸셜 타임스>에 따르면, 유로존의 경우 마이너스 금리 제도를 시행하기 이전에는 3.28%였던 ‘5년 이상 주택담보대출’의 평균 금리가 최근에는 2.82%까지 내렸다.
그러나 마이너스 금리가 장기적으로 경기를 부양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2년째 마이너스 금리 제도를 시행해온 유로존 경제부터 대출 규모가 미세하게 늘어난 점을 빼면 크게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금리를 내리고 심지어 마이너스로까지 전환했는데도, 민간 경제주체들이 돈을 빌려 투자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뭔가 다른 진단과 방법이 필요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한편 마이너스 금리는 은행의 재무구조를 악화시킬 것이다. 일반 고객에 대한 대출금리까지 크게 인하되면서 은행들의 수익률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이너스 금리로 은행들의 팔을 비틀어 덮어놓고 돈을 빌려주도록 하는 과정에서 부실 대출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은 미국 은행들의 부실 대출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선진 자본주의국 정부들이 재정정책 등 대안적 수단을 금기시하는 상황에서는 마이너스 금리 제도가 가장 현실성 있는 불황대책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엄청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재정정책이 아니라) 통화정책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일반은행이 저축한 초과지준에 0.5% 정도의 이자를 지급하는 미국 연준(중앙은행)이 조만간 마이너스 금리 제도로 전환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떠도는 이유다.
‥
“노동자 임금 올려 디플레이션 해결하자”
일본은 20여 년 동안 디플레이션에 시달려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강력한 정부 개입을 통한 소득정책이 제안됐다.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서 물가를 대폭 끌어올리자는 내용이다.
노동자 임금이 오르면, 자본 측의 이윤이 감소할 수 있다. 자본 측에서는 이윤 폭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품 가격을 올린다. 가격이 오르면, 노동자들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임금 인상을 요구한다. 이렇게 임금 인상과 가격 상승의 ‘악순환’이 지속되는 상황을 ‘비용 상승 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물가는 오르지 않아도 골치지만, 너무 올라도 경제를 망친다. 서방의 선진 자본주의국 정부들은 인플레이션이 심각했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영국)나 1970년대 초(미국), 행정력을 동원해서 임금 및 생산품 가격 인상을 제한했다. 소득(노동자의 임금 및 자본 측의 이윤)을 억제해서 경제를 안정화시키는 이 방법은 ‘소득정책(incomes policy)’이라고 불렸다. 어떻게 보면 시장 원리에 역행하는 정부 개입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글로벌 경제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물가 수준의 하락으로 인한 경기침체)이다. 가장 심각한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의 거품 붕괴 이후 20여 년 동안이나 디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이런 가운데 일본 경제의 대안으로 강력한 소득정책이 제안되고 있다.
close
<div align=right><font color=blue>ⓒEPA</font></div>경제학자들은 디플레이션도 소득정책으로 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위는 일본의 한 자동차 공장.
ⓒEPA
경제학자들은 디플레이션도 소득정책으로 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위는 일본의 한 자동차 공장.
소득정책은 당초 인플레이션에 대한 처방이었다. 디플레이션에도 적용 가능할까?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세계적 경제학자 올리비에 블랑샤르와 애덤 포센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소장은 <파이낸셜 타임스>(2015년 12월2일)에 게재한 공동 기고문에서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다만 이전의 소득정책을 ‘거꾸로’ 세우는 방법을 통해서다.
인플레이션율 높이면 정부 부채도 줄어든다?
블랑샤르와 포센은 일본 정부에 올해 내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5~10% 올리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는 부자 기업의 이윤을 빈곤한 노동자들에게 이전시키는 소득분배 정책이 아니다. 오히려 기업은 이윤 폭을 유지하기 위해 임금 인상분만큼 생산품의 가격을 올려야 한다. 물가가 오르면 노동자는 다시 임금 인상을 요구할 것이고, 이런 ‘선순환’에 따라 5~10% 수준의 물가인상률을 달성할 수 있다. 이전 시대의 소득정책은 임금 인상→가격 인상→임금 인상의 ‘악순환’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블랑샤르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예전의 ‘악순환’을 의도적으로 조장해서라도 높은 수준의 물가인상률을 달성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물가를 올리기 위해 발버둥 쳐왔다. 양적완화로 통화량을 종전의 2~3배로 늘리면서 물가인상률을 2%까지 올리려 했다. 그러나 성과는 미미하다. 급기야 강력한 정부 개입을 통한 소득정책으로 물가를 대폭 올리자는(수년 동안 5~10%의 인플레이션율) 제안이 등장한 것이다.
이에 성공하면 일본 경제는 몇 가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우선 지난 20여 년 동안 지속된 디플레이션을 일거에 극복하면서 경기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은 채권자에겐 불리하지만 채무자에게 이익이다. 세계 최고의 빚쟁이인 일본 정부의 채무(국가 부채) 역시 인플레이션을 통해 실질적으로 줄일 수 있다. 블랑샤르 등은 이후 수년간 일본의 인플레이션율을 5~10%로 높이면 일본 정부의 부채 역시 8~10%(GDP 대비) 줄어들 것으로 추산했다. 블랑샤르가 제안한 소득정책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일본의 재정안정성인 셈이다.
'축산이슈 > 시장상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조금도 직거래하자 (0) | 2016.03.31 |
---|---|
"공무원 힘내세요~" (0) | 2016.03.31 |
1++ '마블링'의 딜레마 (0) | 2016.03.29 |
달걀값 하락세 심화 (0) | 2016.03.24 |
2016년 3월 한국이 앓고 있는 亂脈相 (0) | 2016.03.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