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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세상보기

스마트폰 세대와 함께 일하는 방식

by 큰바위얼굴. 2016. 10. 17.

"욕 안 먹을 정도로 업무를 책임지고 여유를 갖는게 더 중요하다." 고 말했다. 한 경제부처의 주무 사무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누군가는 세상의 변화를 거슬러올라가 용트림 하고 싶어하고,
누군가는 입신양명 보다는 웰빙 삶을 꿈꾼다.

결과를 모르기 때문이며 과정을 즐기기 위해서 라고 본다.
2011년 2월 시작된 유통에의 열정이 지금 내가 있게 한 동력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니 그럴수도 있다는 말로 다가온다.

"여보, 조금만 참아줘" 하는 수없이 반복된 말들,
"여보, 여보가 좀 하면 안될까" 하는 가사일을 미루던 태도를 열정과 바꿨음에도,
삶의 질 변화는 관가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고
멀지않은 때 "실수는 잦아도 빠르고 기발한" 스마트폰 세대에게 자리를 내주는 그 첫 징후가 이미 나타났다고 보인다.

누구나 직장인은 승진을 바란다.
누구나?
누구나 승진의 때를 기다린다.
언제나?
누구나 승진하면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자리에?

이제까지 그래왔고 대체로 그러했다. 별반 큰 변곡점이 없는 무난한 업무이기 때문일까?
분업화된 업무 때문인지 느릴 뿐 나아가지 못한 건 아니라고 본다.
큰 배에 탑승하고 있더라도 그만큼 큰 파도에 밀려 떠내려 가기도 하는 행태를 보고,
"난 몰랐어요." 하는 CEO의 말에 할 말을 잃는다.
작은 배에 탑승하면 무수히 많은 잔잔한 파도에 보조를 맞춰 조금씩이나마 나아가고자 노력한다.
폭풍우, 해일과 같은 거대한 충격이 닥치지 않기를 바라건만
때론 배를 연결하여 같이 향하기도 하고 때론 배를 돌려 다른 배에 포함되기도 하면서 항해는 계속되고 있다.

내가 탑승한 배는 무척 작다.
잔잔한 파도를 헤쳐나감은 그동안의 실력으로 충분하지만,
정작 거센 파도는 말이 없는데 함께 같은 목적으로 출발했던 다른 배들에서 부딪혀 온다.
우리가 함께 가자고 했던 약속은 하나다. "배 곪지 말고 한 번 잘 살아보세" 였다.

나라곡간이 비어 각 집 안의 금부치를 기꺼이 내놓은 이유는 우리에게 물질 보다는 '함께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샥 스~샥 하는 빠른 손놀림에 찍어보는 세대로 전환된 지금은 이미 '빠름'이 익숙해져 버렸다.
진득한 기다림은 더이상 미덕이라기 보다는 멍청함으로 치부된다.
빠름을 나쁘다고 평가절하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빠름에 대한 다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내와 사명감에 모든 걸 걸었던 선배님들께서 말씀하신다.
"나를 믿고 따르라"

빠르게 칠 건 치고 아닌 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결단과 일의 진척을 말하는 스마트폰 세대는 응답한다.
"즐겁게 일 합시다"

인내와 사명감이 가치로 메겨졌던 선배들의 삶이 이제는 후배들의 가슴속 깊이 내려앉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사명감을 들추라고 한다.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지금 자신이 겪어온 경험과 지식에 기초한 판단을 하려는 세대에게 사명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누적된 피로감에 지친 선배들의 마음한켠 마저 계승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하는 마음, 그렇지만 일상은 주로 치열하게 돌아가고 지쳐버리면 이해심 보다는 치밀어 오름이 빠르다.

스마트폰 세대는 곧 사라진다.
거추장스럽게 들고 보고 넘기면서 보는 걸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보고 싶을 때 그냥 보면 되는 시대가 곧 열릴 것이다. 연결을 위한 기기적 수단은 더이상 구애되지 않을 것이며 한층 더 Wireless처럼 무선으로 대체될 것이고 영상 또한 이와같다.

단추? 안경? 설마 손목시계?

헤어밴드?

한편으로는, 키보드가 먼저 사라질 것이고 치면서 입력하는 방식에서 조리있게 말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지만,
자기 스스로 교정하는 효과가 매우 좋은 치면서 입력하는 방식이 아주 사라지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칼럼에서 말했듯이 그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아주 전문화된 그룹에서 요구되는 역량으로 치부되고, 주류는 보고 싶을 때 그냥 보고, 촬영하고 싶다면 그냥 촬영하고, 내 생각조차 기록하는 시대는 곧 열릴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삶의 질을 기초부터 바꾸기 때문이다.
어쩌면 과학기술은 사람이 태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동심의 그 때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싶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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