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양/궁극에의

승무, 두번째 이야기

by 큰바위얼굴. 2023. 2. 8.

너울너울 춤사위가 하늘 높이 날아 올랐다. https://meatmarketing.tistory.com/m/5795

(환희) 너울너울 춤사위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너울너울 춤사위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음성 듣기) https://youtu.be/LiR8EwoT5xQ 어제 그리고 오늘. 하천변을 거닐고 있고, 달라진 건 해나가 나오지 않은 것. 상실감, 허전함, 어색함, 사뭇 다른 느

meatmarketing.tistory.com



그리고 지금, 다시 한 번 승무를 펼친다. (음성 듣기 : https://youtu.be/M9ANX3VgoFo


승무 이야기를 마친 지점. 터닝포인트


2023년 2월 8일 수요일 새벽 7시에 조금 못 미친 시간. 하천변을 내려가며 길고양이 한 마리를 마주한다. 스르릉~ 소리에 돌아보니 어슬렁 어슬렁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려고 한다. 급할 건 없어보이고 새벽같이 나와 어슬렁거린 이유가 뭘까? 먹이 때문일까? 자식 때문일까? 여러 상념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떤 이유에서건 새벽에 나온 모습에는 변함이 없다.


그걸 보는 나 또한, 날씨는 많이 풀렸지만 손이 시렵고 바람이 차다.

바라고 바라면 이루어진다. 끊임없이 갈구하고 고민하고 궁리한다. 익히고 쓰게 된다.

걷고 있는 현재의 내 모습이 희미해져 간다. 바라고 바라는 생각이나 이념, 바람에, 그 속에 빠져들수록 얽히섥히 면을 맺고 있는 관계들이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왜 살 건데?

왜 사는 건데?

돈은 도대체 왜 벌고 죽음에 이르러 도대체 바라는 것이 뭔데? 그래서 이루었다 손 치더라도 그러면 만족하겠느냐? 일상을 반복하면서 느꼈던 지루함이나 따분함이 어쩌면 가장 큰 행복의 온천이 아니었느냐.

나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했었지. 다시금 원했고 주어진 본원의 회사생활이 다 식은 예전에 그랬었지. 그랬구나 하는 감정으로 다시금 마치 제 자리 있나 그렇게 익숙해져 가면서 다행이랄까 한동안이랄까 내가 그랬구나 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그 안정감이 과거에 또한 난 참 열심히 살았구나 하며 바라고 이루고자 열심히 노력했구나 라는 걸 다시금 확인하는데, 확인하는 반면에 다시금 도전에 직면한다. 밤새 끙끙 앓는 아내, 신나게 게임하는 첫째, 침대에 누워있으면 안겨오는 둘째, 뭘 좀 더 같이 하자고 보채는 셋째, 정이 참 남다르다. 잘 컸고 잘 자라 주었지. 아내의 수고로움이 밤새 끙끙 앓는 그 괴로운 만큼이나 크다.

내가 바라건대 이 삶이 지난하다면 뭔들 다시 오지 않을 삶이라면 그렇게 믿고 싶지 않다만 만일 그렇다면 주어지고 원하고 그렇게나 간절히 바랐던 이 삶이 충만감에 벅차오르는 감정이 피부에서 자란 모 하나의 떨림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했고 보이는 건 단지 주어지거나 바라보게 된 내 주변에 있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했지. 그 배경에서 내가 할 어떤 바램, 역할, 관계 속에 맺혀 있는 그런 돌고 돌아가는 안에서 원하고자 하는 어떤 부분들이 때론 욕심이 과하거나 때론 지처 포기하고 싶다거나 하나씩 이루어가는 때, 달린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 하천변 맞은편에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그의 존재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일까? 점점 가까워졌고 같은 선상에서 녹음을 이어가는데 신경이 쓰이더란 말이지.

이루고자 하는 바가 저 달에 닿는 것이냐?

달의 기능 역할 그래 우리가 그 현상에 집중할 것이냐? 다르다. 달의 표면에서 달의 중심부를 향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얻게 되는 무한한 지식을 다시금 파헤치면서 달의 기능과 역할을 살펴볼 것이냐?

단지 확인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태양계와 우주 안에 있는 관계에서 존재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주어졌기 때문이지.

이루고자 하고 바라고 얻고자 하는 바가 과연 달에 닿는 것이냐? 달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현상에 자기의 역할을 해보고 싶은 것이냐? 우리는 달빛에 비친 시냇물에 아른거리는 빛남에 현혹되어 시냇물이 흘러가듯 흘러가고 흘러가는 그 풍랑 속에 떠다니는 조그마한 배처럼 정처없이 달빛을 쫓고 하늘 멀리 위를 보니 달이 있더라. 달빛이 빚은 격랑의 물결을 타고 바다에 닿았다. 바다라는 것이 혹은 죽음 혹은 종착지. 나이 들어 더 이상 바라지 않는 상태로 좋았더라.

그려. 지나간 삶이 칭칭 감긴 태엽마냥 꽉 차오르는 충만감에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게 되었다. 나이 또한 들어 더 이상 바랄 만큼 태엽을 감기에 힘이 부족해졌다. 지금은 내 나이에 풍부한 지혜를 닦고자 했던 것에 더 원하고 바라는 만큼 얻게 된 자격과 같은, 하늘을 보고 길을 걸어가는 지금의 내 모습이요. 병풍 마냥 눌러싸인 공간 위로 조금만 올라가도 자유로움에 광활함에 벅차오르는 감동. 외로움이 작은 불씨가 되어 다시금 아래로 내려올 때, 올라올라 경지에 닿아 후회도 많고 잠철된 그 하나하나에서의 충만감이 다르더라. 그럼에도 온전히 하늘에 올라 감긴 태엽을 하나하나 되돌아보니 그 또한 기대되더라. 어디까지 닿았더라. 어디까지 가는 거냐. 뿌리가 현생에서 달해 혹은 우주 너머 멀리 닿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어디에 기원하더라도 받는다손 치더라도 그 닿게 된 기술력 못지않게 그에게 주어진 환경의 변화는 거의 변함이 없다. 그때의 달이나 지금의 달이나 지구의 모습이나 단지 더 쉬워진 기술력만큼 좀 더 빠르고 높고 좀 더 깊은 제 생각이 사고의 범위가 무한히 확장된 것처럼 느껴질 망정 육신의 틀을 깨고 정신이 복사되어 옮겨 다닐지언정 과연 반복되는 현상이 편한 삶 속에서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고 죽고 그 순환에 고리를 깰 만큼 클 것인가?

맹목적인 바람처럼 나는 신이 되고자 했다.

나는 영생을 살고 싶었다. 평생 신에 도달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과연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반복과 생명의 순환만큼이나 고귀한 가치가 있을 건가 고뇌했다. 경지에 다다르고자 하는 노력이 희미해져 가는 끝 만큼이나 의미가 있겠는가 고뇌했다. 첫째의 다부짐이, 둘째의 너그러움이,  셋째의 발랄함이 그런 모든 풍성함이 나의 바람과 한데 어울려 나비가 되어 너울너울 승무가 춤을 추듯 휘돈다. See U, 성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