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주방 머리에 붙어있는 포스틱에 쓰인 두 단어 중 하나.
미언. 아름다운 말.
출근길에 직장인으로서 갈등 상황에 대한 푸념, 살아가는데에 있어서의 입장 정리, 반성 그리고 발전에의 생각. 이를 풀어본다. "당신과 별반 다르지 않아." 하는 말이 궁금하다면 들어봐도 좋겠다. https://youtu.be/E5n4ZaNQLxg
쪼다 같이
살지 마.
말을 전하게 되면 이롭게 만드니 기분을 풀어 시원할지는 몰라도 아니함만 못할 수 있다.
시원함은 내뱉었다는 데서 오는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웃쭐거림과 전한다라는 가둬 두지 않았다라는 데서 오는 발산. 반대로 보면 이조차 어처구니 없게도 누군가의 험담을 하는 것이 기쁨일 망정 본 바탕이 못마땅함이거나 부러움이거나 이와 상관없이 그런 말과 분위기에 어울리는 이들이 그걸 모를까?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알 만한 사람은 알고 맞장구 친다. 그러하니 굳이 상종하지 않겠다. 사적인 영역으로는 만나지 않겠다 정한다.
별거 아니고 쥐뿔도 없는 상상 속에 만들어가는 삶에서 재밌지 않아 표현할 부분들은 표현을 해야 되겠지 하며 객관적이고 차갑게 답을 정한다. 험담은 그래서 인격과 그의 현재를 말해주고 있다라는 것. 옮겼든 자기 생각이든 상관없이 험담은 사람을 기피하게 만든다.
반대로, 험담이 사람을 의기 투합하게 하기도 한다.
다른 면으로 성립이 되려면 그와 그는 동료일 뿐 외떨어진 내 삶이 그쪽에 소스가 되었을지언정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한들 내 삶의 주체와 내 삶의 바탕은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손이 시렵더라도 핸드폰을 손에 쥐고 말을 하고 있다.
내가 누군가를 해코지했다.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 나는 누군가를 싫어하고 있고 질시하고 있다.
그게 내가 아니기를 바라고 내 영역에 속해 있는 이들이 아니길 바랄 뿐. 나 또한 덕지덕지 묻어있는 때를 벗기지 못한 채 자꾸만 장난스럽게 던지는 말투들이 퉁명스럽다 못해 다정다감한 말과 행동 눈빛 어느 것 하나라도 주지 못해 아쉬울 뿐. 마음이 지극히 좋으니 자꾸만 장난을 치게 된다.
장난이 반복되다 보면 장난이 어느 순간 진짜와 같이 된다. 이처럼 나 또한 부족한 면이 많다. 살게 되고 다시 위하고 위하지 않아도 말을 건네고 생각들을 다시 묶어 목에 넥타이를 매듯 단정하게 그리고 바르게 바라고 바라는 부분을 이야기한다.
흥미롭지 않거나 신나지 아니한다. 무심코 들여다보게 되는 핸드폰이다.
빠른 화면 전환과 이야기 전개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습관적으로 보고 있게 된다. 열심히 산 만큼 혹은 해낸 만큼 쉬어도 좋아 라는 면으로 혹은 이게 아니면 뭐가 있겠어 하며, 그 자체가 흥미롭거나 즐거운 시간인 것을 재미없네 재미없어 하며 보낸다. 시간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의미없다고 말한다.
상관없다. 재미없다. 그렇게 말한다.
하늘이 맑다. 새들은 지저귀고 시냇물은 흐르고 나는 걷고 있다. 어제도 그제도 내일도 모레도 나는 걸을 것이다.
무언가 부족한 면을 이야기하거나 무언가 강렬히 바라는 어떤 부분들을 말하거나 달을 보고 시냇물에 비친 달빛을 보고 스치는 바람에 느껴본다. 홀로 있되 혼자가 아닌 외롭되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이 시간들이 그리고 함께 어울린 이들과의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게 되돌이켜 보며 반성을 하게 되고 다시금 체비를 갖추고 잘하고자 한다.
용서를 빌고 마음을 들여다보고 꼭꼭 감춰 두었던 마음을 우연찮게 고백한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내 이야기가 아닌 듯 한참을 떠들고 난 후 뒤에 돌이켜 보고나서 그랬구나 하는 면이, 가령 자유를 바랬던 면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용서를 빌 수 있고 반성을 할 수 있는 그 공간을 어쩌면 멀리 돌아가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며. 다만, 그 공간은 반드시 성당이 아니오. 어두컴컴할 망정 불 꺼진 내 방이 그 공간일 수도 있으니 길을 걷고 공간을 옮기고 다시 여행을 떠나고 돌아와 이사를 가고 나이가 들어 침대에 누워 있는 이 모든 여정이 모두가 용서를 빌고 반성을 하고 나아가며 바라고 바라며 잘 살았구나 하는 과정일 뿐. 그럼 "또보자"며 헤어질 때 하는 말. 너가 누구를 그렇게나 신경 써 왔는지 쓰고 있는지 내 사람이 아닌 것을 내가 아닌 것을 그런 것인걸.
얼키설키 엮어 있어 내 바람이 기대만큼 이뤄지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그 또한 이치와 같다. 성향을 말하고 맞춰가고 강한 반대에 부딪히고 의견을 나누게 되는 이 일련의 과정 자체에 만족해도 좋은 것은 어떤 의도와 취지가 그 바람이 기존과 다른들, 반대에 부딪힌다손 치더라도 아니 할 것이냐 라고 하는 면에서,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며 누군들 이를 모를까 라는 면에서 돌이켜본다.
얻을 것이 너무 많으니 그들의 빈정대는 눈빛이 어쩜 그리도 다르지 않을까? 야속하다 말하는 부분은 바로 그런 것. 이만큼 친해졌는데도 불구하고, 각자는 자기의 생각으로 나의 취지와는 달리 마치 객관적인 양 나아갈 부분 보다는 잃을 부분을 더 걱정하게 되는 그런 분위기.
하는 것 보다 잃는 것을 더 걱정하며 살아간다. 현대인들은 더 얻을 것을 얻기 보다는 잃는 것이 두려워 더 크게 잃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차게 탱탱하게 땡땡하게 살까지 에이는 이 추위를 벗어나고자 호수의 살어름처럼 언 손을 깨고자 굳은 손을 꽉 쥐었다 피었다 피를 돌게 한다.
아픈 것이 있고 상처를 입으면 그걸 말한다. 멈출 순 없고 그건 내가 아니니까 멈추고자 해도 끝이 없으니까. 어디에 있든 어디에 가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다 한들 그 지독한 행태를 멈출 것으로 보질 않는다.
결국, 그 반대의 경우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고 오지 않아도 될 인물을 오게 만들었다.
이처럼 세상은 흐르고 들어온 만큼 나가고 나간 만큼 되돌아온다. 현대인의 삶이 만약 이와 같다면 홍익인간이라며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면에 그는 없다. 그 안에 없다 한들 과연 믿을까?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더 바라고 원하고 갈구하는 부분을 함께 가자 이야기를 해도 각자의 생각에 위기의식 혹은 이제까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경계심 때문에 주춤거리게 되고 하지 않게 되니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하지 아니했던 건 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 할 이유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 내가 원하는 바와 같이 알리고 알려 관심 있는 자에게 최소한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음에도, 그 하나가 씨앗이 되어 각각의 씨앗들이 발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함에도. 그렇게나 역설적으로 아니 되는 것이라면 아니 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하게 되었다면 하게 된 이유가 있겠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했음에도, 1층 로비에 있는 책장에 가득히 쌓여가는 정보들이 있음을 과연 모를까?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에 앞서 기회를 얻음이 위기로 잃는 것 보다 우선해야 함을.
위로와 격려가 서로의 다정함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경험과 경험이 만나 경험이 더 커져가고 이야기가 엮인다.
자, 그렇다면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는 공감과 공유를 한다는 면에서 여기에 발전이란 앞서 말했듯이 반성을 했다면, 나아진 것이 나아질 것을 다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듯 그렇지만 발전이라는 것이 반성으로부터만 비롯되는 것은 아닌 것. 하나의 작은 씨앗이 세월이 흘러 커다란 꽃을 피우듯 발전은 반성이란 작은 씨앗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어져 나갈 수도 있겠지만, 발전이란 건 기본적으로 융성과 부흥의 영역. 제로섬 이라기 보다는 파지티브섬 임을.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주저앉힘이 아니라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하나하나 다시 정비를 하고 기우고 헤진 옷을 바꿔 입고, 길을 새로 내는 일련의 과정.
아침에 일어나 문을 긁어대는 해나에게 다가가 번쩍 안아들고 반가움에 따라오는 예티와 함께 누인 다음 쓰다듬는다. 양배추를 주면 멀뚱거리는 해나와 아작아작 씹어대는 예티. 먹이를 좋아하는 해나. 통통한 해나와 날씬한 예티. 둘은 다르다.
반가움에 꼬리치는 모습이 달라도 반가움을 표현하는 건 같다. 애교를 부리는 것 또한 예티와 해나가 다를 망정 애교를 부린다는 건 동일하다. 밥그릇에 밥을 주워도 허겁지겁 먹는 해나와 시큰둥 하는 예티여도 어찌저찌 밥을 다 먹는다.
때 맞춰 밥을 먹고 어슬렁 거리다가 쉴 땐 같이 쉬고 일어나 함께 기지개를 켠다. 산책을 나서고 함께 뛴다. 무언가 다른 걸 보고 다른 걸 생각하고 다른 걸 하고 있다고 여길지언정 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함께 있어 동일하다.
생각이 다르니, 가령 딴 생각을 하니 함께 있는 게 아니다 라고 보는 것보다는 딴 생각을 할망정 함께 있고 눈을 마주치면 어색할망정 할 이야기가 많다. 자연스럽게 원하는 부분을 서로에게 관심을 표현한다. 그러게 말이야. 아름다운 말을 하자며 서로 눈을 마주친다. 미언.
그래 이제 좀 달라져 볼까 한다. 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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