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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나의 이야기

나를 알아가는 과정

by 큰바위얼굴. 2024. 5. 21.

체력단련실에서 나와 밖에서,
노래가사에 더한 바람에 절로 상쾌하다.

농식품공무원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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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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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단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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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에 앞서 측정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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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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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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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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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햇빛이 어둔 그림자와 마주한 길에서 땀을 식힌다. 헐떡이는 숨을 고른다. 눈이 부신 태양을 힐끗. 쭉 뻗은 주차장 도로를 따라 걷는다. 오른 손에는 운동화를 넣은 가방을 걸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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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잤고,  일어나 체력단련실에서 몸을 깨우고 늘리고 줄이며 풀어낸 다음, 한 바퀴 크게 원을 그리듯이 걷는다. 아침 공기는 시원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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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다시 방문할까마는 아쉽지 않다. 식사는 맛있게 했고, 잠 자리는 편했으며, 수업은 흥미로웠다. 50이란 나이를 잊게 되었고, 아침 저녁으로 몸을 움직이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도서사랑방에서 마신 커피와 읽은 책이 배부르게 했고, 시공간이 4차원을 만든다는 걸 들었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라는 말에 격한 공감을 했다.

끝은 없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순환의 시작이요 밑거름이다. 시공간은 흐르지 않고 찰라에 머문다. 토막난 마냥 그때 그때 있어 사라진다고 여긴다. 잠에서 깨거나 인식을 하거나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었을 때, 그때가 시작점이다. 꿈은 미지의 통제되지 못한 시공간이요, 잠은 현실처럼 인식되는 창구다. 상상은 띄워놓은 그림이요 생각이 가라앉아 있다면 상상은 무한히 치솟는다. 닿는다. 연결된다. 생각이 아래로 연결되는 창구라고 한다면 상상은 위로 연결되는 창구다. 잠이 비통제 시공간으로의 도약 창구라고 한다면 꿈은 현실이라 칭한 시공간과 실체감에 차이가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존재를 부인할 이유가 없다. 생각, 상상, 꿈은 존재를 만든다. 몸, 잠을 매개로. 터를 가꾸고 존재를 만든다. 점차 실체감 보다는 그럴까 하는 짐작감이 주를 이루게 되다보면 몸을 매개로 한 현실감은 잠을 매개로 하거나 기기를 매개로 한 가상 시공간이거나 나아가 상상을 매개로 한 토막들이 주를 이뤄 우주의 시작과 끝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손을 쥐었다고 폈다.

단지 그 뿐이다. 인생이나 우주나. 그렇다고 그 너머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받아들이고 수양하며 실천하다보면 토막의 끝이 마지막이 아니라 연장되거나 이어짐을 기꺼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 다만 아직은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벗어남이란 지고한 경지가 아니다. 초월은 하층과 비교된 개념일 뿐, 토막은 동등하다. 진전이나 발전이 궁극에의 접근 방법이 아니다. 나아간다는 말이 지닌 한계는 현실에 적을 두고 있기 때문. 바라고 바라면 이루어짐을 알았다. 멈춘다면 멈춘 것일까? 흔들림이 나아가기 위한 재료일까? 역할에 지나지 않을까? 나아감이나 바람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있어 멈춘다.

멍해진다. 혼선이 인다. 세상을 이룬 질서가 반향을 반긴다. 더한 힘을 발휘한다. 힘을 얻고 싶은가? 아니다. 순환일지 윤회일지 반복일지 모를 있어 있는 이유, 원인에 가깝다. 태어난 이유에 가깝다. 어디로 가야함은 의미를 잃었다. 간다. 어디든. 닿는다. 만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있어 없이 찰라와 같이 머문다.

0과 1이 이룬 세상에 섞여들어감을 느낀다. 양자의 변화를 이해하게 된다. 확률이 이룬 세상이라 함에 일면 공감한다. 높은 확률로 세상을 이룬다 함을 정치와 종교, 역사에서 찾는다. 군집. 그런 세상에 섞여 있음을, 자아라는 것조차 클라우드를 이룬 파티클이라는 걸 느낀다. 그래서?

어디로 향해야 함이 아니라, 있어 없이 찰라와 같이 머문다.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머물러 우주와 양자의 세계가 곧 동일선에 있음을 느끼고, 머물러 행함은 격차는 없이 있게 되니 섞여 찰라와 같다.

굳이 길을 찿는다면 찰라임을 자각하는 것. 있어 없이 찰라와 같이 머문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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