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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이슈/시장상황

뼛속까지 양반, 땅의 숭고함에 고개 숙여

by 큰바위얼굴. 2013. 11. 29.

뼛속까지 양반, 땅의 숭고함에 고개 숙여

 

한겨레 2013.11.27

 

털석 주저앉아 미소짓는 정용수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의 모습이 주변의 들판 풍경과 잘 어울린다. 대한민국의 귀농운동을 이끌어온 정 상임대표는 이곳 논밭과 종택을 귀농운동본부의 사무실과 실습장으로 내놓았다. 군포/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나는 농부다] 정용수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경기 군포의 수리산 자락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 건너 농장, 손바닥만한 팻말이 다소곳하다. 저녁 햇살에 빛나는 잔물결의 갈치 저수지를 앞에 두고 널찍한 밭 한켠에는 올망졸망한 항아리 수십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전국귀농운동본부의 배움터이자 일터, 수리산 자락에 기대어 사는 경기 군포, 의왕, 산본, 과천 시민 68명이 함께 밭을 일군다.

귀농운동의 터줏대감인 정용수(66)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뼈대 있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손발에 흙 묻혀 가며 일해본 적 없고 농사는 무지렁이들이 하는 일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뼛속까지 양반의식에 젖었던 이가 20년 전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짓는 삶의 신봉자로 우뚝 섰다. 그 내력이 궁금하다.

군포에서 명문가로 손꼽히는 ‘정부잣집’ 아들인 그는 일찌감치 서울 중심부 주류사회로 진입해 “농사를 싹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90년대 초 “땅을 놀리면 안 된다”는 아내의 성화에 마지못해 밭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향에서 농사라니’ 도통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농사를 지으러 왔을까’ 남들이 곁눈질이라도 할 듯싶었고, ‘가세가 기운 증표로 보이지 않을까’ 싶은 자격지심도 들었다. 동네 사람이 볼세라 도망치듯 드나들기를 10여년. 그에게 농사짓는 삶은 떳떳한 일도 신나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아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거드는 정도였다.

나이 50줄에 들어서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돈 버는 삶’이 아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싶어서였다. “직장살이는 남의 머슴살이”라던 부친의 말씀도,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한 작은형님의 행적도 그의 결심에 힘을 보탰다. 나무 강좌, 숲 해설가 교육, 생태건축학교 따위 교육 프로그램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아내 곁다리로 지어온 농사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농사라는 게 함부로 볼 게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이 굳어져갔다.

2002년 아내와 수제 햄과 베이컨을 만드는 교육에 갔다가 만난 안철환(텃밭보급소 대표)씨의 삶이 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흔들어놓았다. 지체장애인인 안씨가 옆동네인 바람들이농장에서 “기어다니다시피 농사짓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저 몸으로 혼자서 400여평의 땅을 일구다니….” 한 인간이 절실하게 갈구하는 농사짓는 삶의 가치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로는 농사를 이해한다고 했지만 아직 몸이 따르지 않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양반입네 하는 자의식을 내려놓으니 종갓집 자손이라는 내력은 농사문화의 원형질로 통하는 문이 되어주었다. 가라앉아 있던 앙금이 일어나듯 잊었던 삶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왔다. 그것을 건져올려 ‘우리 농사 이야기’로 살을 붙여 나갔다. 모르는 것은 책을 찾아보고 동네 형들에게 물어보았다. 전통농사법을 수집하거나 토종 씨앗을 구하러 전국 곳곳을 바람처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쌓인 정보와 지식을 귀농학교에서 함께 농사지으며 검증했다. 전통농사법 가운데 버릴 것은 버리고 추릴 것은 추려 귀농자들이나 도시농부들과 나누었다.

 

23일 열린 귀농운동본부의 소농학교 수료식에서 정 상임대표와 예비 귀농인들이 정담을 나누고 있다. 군포/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아내 곁다리로 농사짓다 만난
안철환의 삶은 그를 뒤흔들었다
기어 다니다시피 하며 갈구하는
삶의 가치에 자신을 돌아봤다

500년 된 고택과 인근 대지, 전답
시가로 100억원에 이르는 재산을
문화유산으로 신탁했다
“버림으로써 영원히 얻은 거지요”

 

하지만 고향에서의 미덥지 않은 시선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가 농사일을 하노라면 언덕 위에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내려다보곤 했다. ‘손으로 모를 내고, 낫으로 베고, 약도 안 치고…, 저렇게 농사지어 나락 몇가마 나오는지 보자’ 하는 냉소가 느껴졌다. 하지만 태풍이 불어 들판의 모든 벼들이 쓰러졌을 때 그가 심은 벼들이 꼿꼿이 서 있었던 ‘사건’을 계기로 동네에서도 농사꾼으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사회적 활동의 폭도 넓어졌다. 2005년 도시농업의 깃발을 드는 일에 힘을 보태 도시농부학교 교장을 맡았다. 당시 그가 들려준 ‘우리 농사 이야기’는 도시농업이 유기농이라는 큰 흐름으로 자리잡는 데 씨앗이 되었다. “지난 13년 동안 너무 재밌게 보냈어요.” 그의 농사짓는 삶은 2008년 전국귀농운동본부 대표를 맡으면서 무르익어 갔다.

“농사가 삶의 중심이 되는 세상이 되려면 귀농해서 희망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해요.” 귀농운동본부가 제구실을 하자면 활동가들이 사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9년 귀농운동본부가 서울을 떠난 이유였다. 그는 경기 군포 종택의 행랑채를 사무실 자리로 꾸리고, 주변 논밭 1만㎡를 실습장으로 제공했다. 그 뒤 5년. 귀농운동본부의 ‘우리, 농사를 짓자’는 운동은 도시에서 또 농촌에서 힘차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곳의 소농학교를 다닌 이들의 절반 이상이 실제 2~3년 안에 귀농하고 있다. 생태귀농학교를 나온 이들도 10%쯤은 귀농한다. “돈 버는 농사가 아니라 삶의 근본을 바꾸는 생태적 소농”의 화두를 새기며 귀농할 수 있는 밑돌을 놓은 것이 그로서는 뿌듯하다.

농사문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콘텐츠라면 그는 기꺼이 받아안았다. 농사꾼이라면 집을 짓거나 고치는 일, 단열과 난방, 먹을거리 가공, 장 담그기, 몸 돌보기, 자녀교육 등을 돈에 의존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살림강좌를 마련했다. 흙푸대로 집짓기, 로켓 스토브, 화덕, 개량 구들, 태양열 조리기 등으로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자급하는 ‘적정기술’도 접목했다. 석유문명을 극복해나갈 대안적 삶의 기술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그런 인연으로 올해 출범한 ‘전환기술 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직도 맡게 됐다.

그는 고향 군포가 농사문화를 세워나가는 솟대로 쓰이기를 바라며 한걸음 더 나아갔다. 500년 된 가문의 고택과 근처 대지, 논밭 1만8176㎡를 문화유산으로 신탁했다. 100억원에 이르는 큰 재산이니 사회에 내놓기 쉽지 않았을 터. 풍광이 빼어나 그린벨트를 풀어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호시탐탐 도모되는 곳이기에, 이곳을 농사짓는 이들의 보루로 남길 수 있으려면 그 길이 안전하다는 판단이었다. “버림으로써 영원히 얻는 거지요.” 소유의 욕망을 버리기는 쉽지 않건만 그는 가치있는 일을 따라 움직이는 품격을 보여주었다. 100살이 되던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나 9남매 자식의 공감을 끌어내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을까? “다들 선뜻 뜻을 모아주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한 끼 챙겨 먹기 힘들 땐 두 끼만 먹어라’ ‘흉년에는 이웃에 쌀을 나눠줘라’ ‘마을에서 인심을 잃지 말고 덕을 베풀어라’는 증조할아버지의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거든요.”

정용수 상임대표, 그는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삶의 양식을 앞장서 만들어가고 있는 귀농운동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농사짓는 삶을 한층 더 대중화시킨 도시농업의 물꼬도 텄다. 나아가 생활에너지 전반의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할 적정기술 운동을 태동시켰다. 지속가능한 삶의 양식을 정립하려는 운동 전반에 걸쳐 우리 시대의 누구보다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지난 6년 동안 맡았던 귀농운동본부의 상임대표 직을 내놓을 생각이다. 누군가 또다른 역량으로 그가 떠난 자리를 거뜬히 메울 거라는 믿음에서다. 자신은 산자락에 버려져 있는 논을 일구려고 한다. 논에 물을 댈 수 있게 물길을 내고, 논둑을 바루는 삽질을 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신명이 난다. 그 땅에서 거둔 쌀과 곡식을 북적이는 마을장터에 내놓을 꿈을 꾸니 어깨도 들썩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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