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빛이 따사롭게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린다. "이제 일어나야지" 하는 듯하다. 그래도 투정을 부린다. "아, .. 안돼. 조금만 더!"
장면 2.
볼 일 볼 때 어울리는 노래를 튼다. 두 귀를 막는다. 그런데, 어! 어! 김건모가 "미안해" 한다. 가슴이 촉촉이 젖어든다. 내 나이 42.
장면 3.
마루를 거닐면서 큰 소리로 되새긴다. 외우자, 쫌 이제는 좀 머리속에 들어가렴 하고 꼬신다. 그런데 쉽지 않다. 시끄럽다고 한다.
장면 4.
"축산물의 품질은 품종, 생산기간, 지역에 따라 다르며 소비자의 기호와 식습관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딱 이거다 하고 맞출 수 없다. 그나마 소비자들은 해당 품질에 대한 적정한 가격인지 의구심을 갖기 때문에 이를 해결코자 등급을 표시해준다." 라고 배운다. 등급은 가치이며 지표이다. 그런데 획일성을 띌 수 밖에 없다. 등급은 말 그대로 쭈~욱 나열한 다음 1, 2, 3, 4, 5... 순서를 정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서를 정하면 당연히 높은 순번에 대해 가격을 더 쳐준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 마치, 누군가가 시키기라도 했던양 지육 중개상인이 그러하며, 수많은 유통상인들이 그렇다고 여기며 소비자 또한 그렇다고 여기며 구매한다. 이건 누가 뭐라하건 식습관이다. 법칙처럼 형성된.
등급제는 효용성과 효율성을 지닌다. 경제의 한 파이이기 때문이다. 등급에 대해 그 이상을 요구한다면 그건 등급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장면 5.
TPP. ~를 바라보면서 세계가 뭉치고 있다고 느낀다. 수많은 국가가 있는데 더이상 국가의 경계가 의미없다 하고 허무는 듯 하다. 누군가의 이익을 논하기에 앞서 경계를 허물면 비록 한 공동체가 되기 때문에 경제가 동반해서 움직이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또한 묶여진 효과에 비해 그리 걱정할 꺼리는 아니라고 말하는 듯 하다. 경제학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교역은 서로에게 이익을 준다고.
교역을 여는데 있어서 자국을 보호하고 미진한 부분의 경쟁력을 갖춰야 함은 당연히 챙겨야 할 일이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이 또한 나아가는 방향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이지 이 때문에 교역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 즉, 빅피처(big picture)가 작은 알갱이 때문에 못한다는 건 변화와 성장을 막는 행위다. 이는 국익에 위배된다.
장면 6.
21시까지 아이들과 놀아주고, 22시까지 나(아내)와 함께 하고 그 후에 당신이 하고 싶은 것(무협판타지 읽기 등)을 해~ 라고 한다. 그런데 난 잠이 많다.
장면 7.
아빠는 저한테만 그래요? 흥, 칫!
여보, 그렇게 아이들과 대화가 부족하면 나중에 외로울꺼야.
아빠는 치형이만 이뻐해.
이걸 돌려 말하면,
큰 놈(?)은 나와 동류다. 닮았다는 말이다. 그것도 무척. 꼴에 존심은 무척 강하고 부드러움이 참으로 부족하다. 아니, 낯설어한다.
외로움은 이미 느끼고 있다. 일에 대한 열정도 식고 있고 '즐거울' 낙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면서 두 팔을 걷어부치고 설겆이를 한다. 난 머신(세척기)이 된다.
나두 너희들 모두와 함께 하고 싶다. 그런데 공부하랴 숙제하랴 친구랑 놀아야 하랴, 도대체 나랑 언제 논다는 거냐, 응?
이렇게 제각기 살아간다. 만나 즐겁고 반가워야 함에도 투정과 불만이 가득하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아~ 아.. 아..
말을 하기에 앞서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언제적 있었던 일일까? 이제는 여러 사람 앞에서 강의할 때조차 목소리를 가다듬는 일이 흔지 않다. 그만큼 긴장을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오늘 불연 듯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속으로.
.. 가끔 떨어도 좋지 않을까? 긴장된 목소리를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배웠으면서 나서려면 쉽지 않다. 에이 씨, 스스로를 책망한다.
장면 8.
도대체 왜 이렇게 세밀하게 공공기관을 통제하는 겁니까? 라고 묻고 싶었다. 경평단 앞에서, 도대체 무엇을 원하건데 이렇게 까지 수치게임을 하는 듯한 상황 속으로 몰아가느냐고 묻고 싶었다. 공공기관은 통제할 대상이 아니라 육성할 대상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기껏 필요에 의해 만들어놓고 일일이 인건비네 사업비네 뭐네 하면서 일일이 간섭할 것이라면 왜 만들었냐고, 아니 왜 이렇게 믿지 못하냐고 묻고 싶었다.
평가는 필요하다. 아니, 필요한가? 그렇다면 왜 필요한가? 당연히 믿지 못하니까 그렇다. 그래서 계속 답답해진다. 세부적인 내용으로 주고받는 대화를 보다보니 자꾸만 쌓여간다. "도대체 왜냐구?", "난 도대체 왜 태어났을까?" 라는 물음에 대해 직면한다.
'나' 라는 정체성은 믿음 위에 커갈 수 있으며 말 그대로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것이다. 그 수단이 굳이 평가여야 할까? 굳이 한데 묶어서 같은 잣대로 바라보는게 과연 가당키나 할까? 제각기 태어난 이유가 모두 다르다. 태어난 이유조차 다르고 자라갈 토양과 경쟁상대 또한 제각기다. 그런데 경영, 회계를 전공하신 분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잘 하라고. 그러니까 D 밖에 안된다고."
'나'는 과연 D인가?
'나'는 과연 D를 받고 생존을, 발전을 논해야 하는가?
D는 보통 밑이라는 말인데 내가 그렇게나 부족한가? 위에서 시키는 건 모두 한다. 해낸다. 그건 사명이다. 그런데 더 요구한다. 이론을 들먹이고 학문을 논한다. 공공은 배울 '학' 속에 매몰된 채 배움이 좋아, 배워야지 하는 악마의 속삭임에 제살이 깍이고 있다.
너가 잘하는 걸, 진정 국민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하라~ 고 말한다. "맞다".
장면 9.
나는 누구인가? 김성호? 남자? 이성친구? 젊은이? 일꾼? 박사? 전문가?
나는 왜 태어났나에 대한 고민은 필요악(?)이다. 태어났는데 잘 살 껄 걱정해야지 왜에 매몰되면 성숙하는데야 좋겠지만 잘못하다가는 내동댕이 쳐지기 때문이라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었다. 그래서 탐구했고 아직도 답은 못 찾고 있다. 다만, 나도 살아야 하겠기에 밀어놨다. 저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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