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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알기/경제기초

정치공세 속 사실관계에 따른 표심 향방

by 큰바위얼굴. 2016. 11. 5.

 

잘잘못은 논하면 족하다. 법정에서.

작금의 상황은 세가 부족하기 때문에 국민동원령을 발동했다고 본다. 야측에서. 딱히 원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바통은 이어 받았다.

 

 

1부. 국정마비와 맞바꾼 한 방 쏠림의 미학(그 미화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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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한국의 위기, 실익없는 힘겨루기의 폐해

http://m.blog.daum.net/meatmarketing/3283

 

 

감정을 들이밀고 "넌 나빠" 하는 건 비합리적이다.

 

공분을 사니 넌 무조건 처벌해야 해 하는 건 비민주적이다. 어쩌면 똑같은 행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 자리에서 그만큼 할 수 있었을까? 어떤 의미의 대단함을 대한 대서 오는 그에 준하지 못할거라는 자괴감의 발로이자 시샘의 표출이다. 속마음은 숨긴채. 의혹처럼. 그래서 발가벗겨 주겠어, 그게 맞아. 마치 나는 너를 욕할만큼 떳떳해 하는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촛불 하나하나 떳텃함의 무게를 더한다. 의혹과 부정의 무게를 달면 그 무리의 삶에서 과연 떳떳하지 못할 이, 생태의, 경쟁사회의, 노출되었을 때의, 같지 않음을 같음의 잣대로 대는, 너가 그럴 줄 몰랐어 라는 이름은 나는 너를 제단할 만큼 떳떳함의 발로임을 밝힌 것이다. 지금의 촛불은 분노의 표출이라기 보다는 여전히 상대비교적 민초적 자기삶의 인정을 바라는 호소에 가깝다. 있기도 하다.

 

1000억 갈취? 이익?

아직 밝혀진 건 없다. 그렇지만 대부분 갈취했다고 했기를 바라면서 시청한다. 과연 도덕적인가? 결론은 내놓고 봐줄께 보여봐 하는 건 자리의 무게를 떠나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이는 바로 갑질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이름으로 갑의 행사를 한다.

 

단위가 큰 금액 때문에 서민 가슴을 울렸고 그 과정이 석연치 않아 의혹이 불어터졌다.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 하는 의혹이 90%에 달할 만큼 밝혀진 사실은 없고 수사를 하라고 요구한 토대가 되었다. 탈탈 털면 넌 끝이야 한다. 잡으려고 하면 잡히고 그와 반대로 해도 가능한 나일롱 잣대를 들이민다. 이번만 그런 것도 아닌데 유난을 떠는 건 단 하나 그들이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통쾌감이 시작이라면 지금은 더 유지해줘 하는 기대감이 내재되어 끌고가고 있다. 누군가의 일대기를 하루종일 보고나누고 또보고 나누는 지금의 일상이 과연 정상인가?

마치 끝까지 가야 끝나는 드라마로 여기는 듯이. 그렇지만 드라마는 소재가 바뀔 뿐 반복될 뿐인데도 불구하고.

 

모르게 취한 과다이익들은 온전히 인정받고, 털린 비도덕적 의혹들은 불신을 받는다. 바로 이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다면 당신은 쏠리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과다의 판단기준, 비도덕적인 판단과 의혹에 대한 형량의 부여여부(법치에서 가능한가?), 의혹과 사실은 엄격히 구분된다. 의혹으로 조사받고 탈탈 털어 들어간다. 이는 대통령도 가능하단다.

 

의혹은 의혹일 뿐이다.

사실은 없고 심증으로 몰아서 결론에 도달케 한다면 우리는 "의혹은 곧 사실에 근접한"이라는 착각 판단에 직면하는 우를 인정하는 꼴이다. 이는 비논리적이고 비민주적이다. 어디에도 사실은 없고 의혹 뿐이다. 사실이 시작이 아닌 의혹이 곧바로 법정에 선 이상한 법치주의가 된다. 일단 집어넣고 탈탈 털어 형량을 부여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가장 큰 상실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는 바란다. 이건 아니잖아 하는 자성의 목소리에 촛불을 기꺼이 든다. 내옆에 있어야 할 사람조차 내곁을 떠났다. 시위는 몰아세움이다. 혁명은 궐기에서 시작한다고 여긴다. 자발적 의사에 따른 촛불시위는 자유다. 그렇지만 지금 든 촛불은 2008년 쇠고기 광우병 사태가 빚어 들었던 촛불과 다르다. 여기에서 착각의 오류에 빠졌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촛불을 들면 된다고 보는 건 성취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쇠고기는 내아이를 비롯한 우리들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데 의의를 두고 기꺼이 들었다. 나와 밀접하다. 직접적이다. 그런데 지금은 노의 탄핵에서 국회의 만행을 보면서도 나설 방법이 없었던 국민의 분노가 표심으로 나타났음을 안다면 지금의 정국을 혼란이나 어수선함으로 몰아가는건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색함은 곧 드러날테고 비논리적고 비민주적인 쏠림은 그에 부응하는 한방에 뒤집어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걱정하는 건 이거다. 너도나도 털면 다 문제투성이인데 판도라가 열렸다. 경중의 문제지 정치가는 의혹과 의심, 때론 비리부정을 안고 산다. 그게 그들의 부침이기 때문이다. 너도 마찬가지네 한다면 지금 선동한 기회주의는 한 방에 휩쓸릴 것이다. 대안없는 쏠림은 그렇다. 특히 국민선동으로 - 나와는 달리 - 기꺼이 촛불을 든 사람들은 그 분노에 맞설 때 어떤 행동을 보일까? 그래도 정권교체를 선택할까? 분명하다. 경중의 문제일 뿐 누구나 살다보면 있을법한 의혹에 국민관심의 쏠림 미학(그 미화의 이면)이 발생한다면 그에 못지않은 후폭풍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린 알아야 한다. 아니 안다. 작금의 사태에 왜 국민감정이 부추겨졌는지, 그리고 그 의혹들 중에서 과연 사익이 아닌 국익을 해친 일로 판명될 것이 무엇인지, 그 판명을 위해 법리해석과 법적 근거까지 들이밀고 싸우고 있는 현재 첨예하게 깊어질 수록 그 피로는 나중에 올 너도 똑같네로 뒤집힌 표심으로 나타나거나 너는 정말 문제였군 하는 성취감으로 나타날 수 있다.

 

약하다. 뻔히 보이는 또는 보여왔을 일의 확인에 지나지 않음을 쉬이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정점에 선 이들조차 우리와 같다는 걸 봐주지 않는다. 마치 넌 우리와는 달리 완전무결해야해 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우리는 인정범위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범위에 지나치게 인색하다. 단지 드러났다는 차이일 뿐인데 누구는 정치적으로 놀아나고 누구는 냉정해졌다. 난 지금 국민이 반반으로 나뉘었다고 보지 않는다. 지나치다는 말이 수근거린다는 걸 모른채 촛불시위가 광풍에 휘말리길 바란다. 그런데 촛불은 광풍에 휘말리는 순간 꺼지고 만다. 민심이 촛불이라는 건 언론에 선동된 국민일 뿐이고 이의 대다수는 그만큼 박심에 표를 줬던 이들과 선동된 이들이 주류를 형성했음을 볼 때 이또한 관망하는 중간층은 있을 것이고 그 중간층은 결코 작금의 국민동원을 썩 유쾌하게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걸.

 

항시 의도한 때는 반대급부가 상존하며 그건 어디로 튈지 예단하기 어렵다. 여론은 몰면 야금야금 선동된 국민이 늘어갈 것이다. 그렇지만 지연될 수록 피로가 더해지고 마비된 국정공백에 대한 비판과 자성은 이의 사태를 재평가할 것이다. 만일 의도한 희극 '너나 나나 마찬가지야' 인 것으로 나타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야는 선택해야 한다. 앞선 패배는 나나 너나 마찬가지 국면에서 딱히 너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고 그 대안적 상황이 현재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표심이 그대로라는 걸. 기꺼이 찍는게 아니라 너나 나나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제보다는 니가 좀 났네 하는 정국은 결국 5:5 국면에서 표심 향방을 정하기 어렵다는 걸. 결국 지금 할 일은 문이네 안이네 누가 나왔네 하는 것이 아니라 문이 이런 걸 해보려 한다는 군 어때? 할때 과거와 달리 좋군. 대통령할 만큼 창의적이네. 나라가 좋아지겠어 하는 인정이 필요한데 여전히 너와나는 마찬가지네 하는 정국에서 뭘 더 기대할까? 차이없는데서 어떤 도드라짐을 바랄 수 있겄는가? 과연 바로 이게 놀아난 꼴이 아니고 뭐겠는가?

 

제대로 하자.

국민은 촛불을 들고 싶은 게 아니다. 언제까지 촛불을 들게 할 것인지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가!

잘 살게 보다 낫게 살게 해주겠다면 촛불이 아닌 생각을 하게 해야지 이건 아니다.

 

지성은 날카롭고 깊다. 나도 아는 걸 누군들 모를까. 들어보라. 과연 작금의 사태에 대해 우려하고 걱정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촛불을 들고 안 들고의 선택이 아닌 국가비전을 주었는지 주려고 했는지 그런 일련의 노력은 없이 드라마 연출에 편승한다. 답은 시험지에 작성해야 하는데 엉뚱한 교실에서 답을 찾는 꼴이다. 어느 누가 커다란 걸 바란다고 하던가!

소소한 일상에서 부딪히는 불편이 나아지길 기대하고, 벌고 쓰고 나누는 삶이 윤택하다 라는 걸 바랄 뿐인데.

 

뭔가 큰 걸 기대하지 않는다. 나날이 커져가는 불안감을 해소해주면 그게 바로 삶의 안정이 아닐까!

조선해양, 휴대폰 배터리, 자동차, 어느 것 하나 국제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기업위기가 국익을 위협한다. 업친데덮쳐 메르스(질병), 지진, 곧 화산, 침몰 또는 추락, 붕괴, 참으로 탈도많고 일도많은 정국을 어찌 풀어나갈지 암담한데 이권편향적 입법에 매몰된다.

 

필요하다. 다만, 이권이 개입되지 아니한 입법은 없다. 누군가의 사망선고는 곧 누군가의 생명이 된다. 발전은 생과사의 번가람이다. 흘러가는 것, 결국 흥망에 초점을 둘 일이 아니라면 흥은 돋구고 원활히 흐르도록 하는 일.

 

유구한 역사 속에. 난 반성한다. 게으름뱅이일 뿐이라고.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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