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대책 세우지 말라
동아일보 2017.6.20.
1980년대 초반은 건국 이래 물가가 가장 안정됐던 시기다. 1980년에 무려 28.7%였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 대비)이 불과 4년 만인 1984년 2.3%로 떨어졌다. 1981년 경제성장률은 7.2%로 1962년(3.8%) 이래 가장 낮았지만 물가가 잡히니 서민들의 실질소득이 저절로 오르는 효과가 있었다. 60대 이상이 ‘경제는 전두환 때가 최고’라고 회고하는 이유다.
30%에 육박하던 물가 상승률이 단박에 잡힌 것은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었던 김재익의 공이 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며 신임하던 그 김재익이다. 감사원이 ‘몽둥이로 패서라도 물가를 잡겠다’며 경제부처 특별 감사에 나서던 시절이었지만 김재익은 달랐다. 한국 경제를 근본적으로 수술해야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봤다.
몽둥이 대신 메스를 들었다. 정부가 시도 때도 없이 하던 물가 단속부터 거둬들였다. 물가 점검은 설과 추석에만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대신 공정거래법을 제정해 독과점 규제에 나섰다. 추곡수매가, 임금상승률은 묶고 수입규제는 풀어 공급비용이 올라갈 여지를 줄였다. 1983년 정부 예산 동결은 화룡점정이었다. 나라 곳간이 조여지면서 인플레를 야기하던 통화 팽창이 마침내 잡혔다.
1987년 개헌 이후 정치가 민주화되고 시장경제가 정착되면서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유독 물가정책만큼은 1980년대만도 못한 수준이다. 보수-진보 정부를 막론하고 가격을 통제하겠다는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52개 생활필수품을 뽑아 ‘MB 물가지수’를 뽑고, 공정거래위원회가 물가정책에 협조하지 않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담합 조사를 벌였다. 기름값을 잡겠다며 확산시킨 셀프주유소는 결과적으로 휘발유값 10원을 낮추기 위해 주유원 일자리를 없앤 게 아니냐는 비판만 받았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으면서 나타난 외부 변수 탓이 컸는데도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새 정부의 물가정책은 더 강해지고 있다. 물가에 미치는 영향과 상관없이 국민의 공분이 큰 품목들이 주요 타깃이다. 휴대전화 요금이 대표적이다. 이동통신 3사의 1인당 평균매출이 지난해 일제히 감소하면서 게임, 동영상 등 유료 콘텐츠로 새 돌파구를 찾는 마당에 정부는 기업을 압박해 요금 할인율 확대, 공공 와이파이 확충 등을 요구하고 있다. 통신사가 마진을 남기는 게 죄라면 민영 체제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 치킨값 끌어내리기도 마찬가지다. 제품 값을 2000원 올린 회사를 상대로 공정위는 현장 조사라는 칼을 빼 들었다. 완전경쟁시장에 가까운 치킨시장에서 불합리한 가격을 받는 업체는 정부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저절로 도태된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뒤늦게 “개별 기업의 가격 결정 개입 권한이 없다”며 한발 물러섰지만 업체들은 바짝 엎드려 정부 눈치만 보고 있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형성된다는 것은 경제학 원론 교과서 첫 페이지에 나오는 기초 중의 기초다. 시장 가격이 언제나 옳진 않지만 합리적 경쟁이라는 조건에서 형성된 가격을 억지로 깎거나 훼손해선 안 된다. 가격에 인위적으로 손을 대는 것은 규제 중에서도 가장 나쁜 규제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대인 나라에서 1970년대식 물가대책을 들이미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차별화된 품질과 서비스로 승부를 보겠다는 기업에 ‘왜 그렇게 비싸냐’며 칼자루를 휘두르는 나라에서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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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Politics/3/00/20170620/84962806/1#csidx0989fddbafebe699ab3ef06e0a25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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