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12개 나라서 '삽질 한' 세 친구
한국경제 2017.7.14
달랑 30만원 들고 호주로 여행
세계 35개 농장 돌며 선진 농업 배워
"여행기 다큐 '파밍 보이즈' 통해 공개"
첫 장면은 경남 산청의 한 농촌. 모내기가 한창이다. 20대 청년 셋이 나이 지긋한 농부들 사이에 껴 있다. 이들에게 쏟아지는 어른들의 구박. “그것도 못 하냐.” 청년들은 한숨을 쉰다. 그러다 잠시 쉬는 시간. “너는 뭐 하고 살 거냐.” “모르겠다.” “취업 안 되잖아.”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청년들. 그중 하나가 불쑥 말을 던진다. “야, 우리 농업 세계일주나 갈까.”
땅에서 꿈을 캔다
13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파밍 보이즈(Farming Boys)’의 주인공들이다. 2년 동안 농업을 주제로 세계여행을 떠난다. 그걸 직접 찍은 게 영화로 나왔다. 2013년 9월부터 2015년 9월까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시작으로 네팔, 인도,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유명 관광지는 거의 안 갔다. 대신 커피농장, 채소연구소 등을 갔다. 12개국 35개 농장을 떠돌았으니 오래도, 많이도 갔다.
출발할 때 가져간 돈은 달랑 30만원. 호주로 향했다. 1년간 농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모았다. 이후로 전 세계 온갖 형태의 농장은 다 다녔다. ‘우핑(wwoofing: 농장에서 일하면서 숙식을 제공받는 활동)’을 하면서다.
이들이 만난 이탈리아 청년들은 비장했다. 국가의 공유지를 무단 점거해 농장을 꾸린다. 개발을 위해 농지를 기업에 파는 정부에 항의하는 의미라고 했다. 프랑스의 젊은 농부 커플은 낭만적이다. 땅을 공짜로 빌렸다. 농사를 짓고 싶지만 여력이 없는 젊은이들을 위해 땅을 장기 대여해주는 재단의 도움을 받은 것.
세 청년은 이런 곳을 가서 그냥 부딪힌다. 농장에 미리 메일을 보내도 봤다. 하지만 긍정적 회신이 온 곳은 80곳 중 7곳뿐. 그래도 농장에 가서 사람들하고 얘기해보면 이상하게 말이 통했다. 하루에 수십㎞를 걷거나 히치하이크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실수의 연속이었다. 프랑스 사과농장에선 대형 주스 탱크를 망가뜨렸다.
대책 없는 농업여행, 왜 시작했을까
천방지축 삼형제 같아 보이지만 사실 이들의 이력은 심상치 않다. 권두현 씨(여행 당시 27세, 현재 30세)는 부모님이 농부다. 산청에서 쌀과 딸기 농사를 짓는다. 후계농이 되기로 결심하고 원예학과로 편입해 농업 공부를 했는데, 부모님 방식의 농사는 싫다. 경험을 쌓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유지황 씨(당시 28세, 현재 31세)가 ‘농업 세계일주’를 가자고 했다. 그 과정을 찍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자고 했다. 지황씨는 이집트 배낭여행 때 노숙자 아이들을 봤다. 마음이 아팠다. 이들에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을 줄 수는 없을까. 해답은 먹거리, 그리고 농업에 있다고 생각했다. 외국에 나가서 부딪히며 공부를 해보자고 했다.
김하석 씨(당시 27세, 현재 30세)는 지황씨의 대학 후배다. 자신을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영화 내내 직접 작곡한 노래를 우쿨렐레로 연주하는 인물. “대학을 막 졸업했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한 1~2년 인생 경험을 쌓는 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세계일주로 얻고 싶었던 게 셋이 다 달랐어요.”
‘안간힘’이 빛났던 순간들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여행 때는 장난이 아니었다고 했다. 몸부터 힘들었다. 그 극한은 이탈리아. 두 달 동안 비가 안 왔다. 땅은 삽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딱했고 감자는 바싹 말랐다.
가장 힘든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였다고 했다. 세계일주 목표가 각자 다르다 보니 부딪힐 일이 적지 않았다. 농장이 다 떠나갈 듯이 오열하기도 여러 번. 한 번은 해체 직전까지 갔다. “서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참다가 한 번 크게 터졌습니다. 다시는 이 친구들을 안 본다는 생각으로 여행 중간에 한국으로 들어왔죠.”
그때 지친 셋을 다시 불러 모은 게 영화 ‘파밍 보이즈’를 연출한 장세정 감독이다. 청년 셋이 블로그에 올린 여행기와 찍은 영상을 보고 매력을 느낀 것. 셋은 세계일주를 이어나갔다. “당시 한창 흙수저니, 헬조선이니 이런 말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들에게선 냉소가 아니라 안간힘이 보였어요. ”(장 감독)
청년 셋은 2년간의 세계일주를 마쳤다. 가장 오래 기억하는 농장은 어딜까. 네덜란드 아니타 아주머니의 ‘치유농장’이다. 두현씨는 이곳에서 목표를 찾았다. 네덜란드의 치유농장 같은 농장을 한국에 여는 것. 두현씨는 지금 고향인 산청에서 부모님과 함께 딸기 농사를 짓고 있다. 지황씨는 청년 농부들을 위한 이동식 농촌주택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땅과 집이 없는 청년들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하석씨는 ‘바른 먹거리’에 대한 고민 끝에 아이쿱 생협 ‘자연드림’ 매장에서 매니저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진짜 여정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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