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에 강한 애착을 느낀다 라고 닉네임과 소개말을 바꾼 지 두 달 하고 반 정도 지났다. 요즘 짧은 감상을 나열하고 있다. 마치 오래된 지인을 만난 것처럼 처음이 아닌 과거 어느 때 했던 걸 다시 꺼내 한 번 더 되새기는 느낌이 강하다.
이토록 멋진 휴식 이란 말에 반했다. 찾아 본 문장 하나 하나를 옮겨 적으면서 기록한다.
연연할 필요가 없다. 연연하지 않겠다. 연연 이란 말에 대한 강한 애착과 왠지 반대쪽에 있는 듯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반대편이 아닌 함께 공존하는 용어로 선택한 단어. 양압기와 같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숨을 쉴 수 없는 무거움에 이르기 까지 어느 한 면만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모습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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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살아갈, 사는 순간의 이야기 어떤 것이라도 좋다. 가족에 대한, 친적, 지인의 범주와 내 활동반경에 대한 방향성을 정한다. 망설임이 없도록 관계를 정한다. 가족의 일에는 간다. 마음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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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강하게 말할 껄이란 후회를 한다. 뒤늦은, 일어나고서야 알게 되는,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했던,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 일어나고 나서야 후회를 한다. 빈 자리, 그에 대한 추억이 배짱이가 되지 않도록, 그와의 추억이, 그의 이미지가, 그의 삶을 바라본 나의 랜즈가 엇나가지 않고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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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내가 설계하고 그렇게 해 보는 것. 오랜만에 듣게 된 사연을 들으면서 아버지를 위해 살았었는데 그의 빈 자리로 인해 삶이 위태롭게 흔들거려 일상조차 살아가기 버거워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스님은 말한다. 누가 누구를 위해 살았다 라는 말은 자기를 위한 말인거여, 결코 그를 위했다고 보기 보다는 그로인한 자기위안이나 자기만족에 가까워, 그러니까 그런 말로 해봐야 결국 심란할 때면 누군가를 위해 살았는데 하는 후회로 회피하려는 행동을 보이게 되지. 그러지 마. 그냥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 누구도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삶에 대해 강요하고 있지 않아. 갖혀 있는 것이 싫으면 다소 많이 불편하더라도 그만 두어도 좋아. 만약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면 그 변화된 삶 또한 자기가 감당하는 거지. 해보고 알 것이냐, 그냥 받아 들일 거냐의 문제라고 보는데, 사실 이 또한 마음대로 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니까 살아지는 거여.
산책길에서 후진하는 차에 치여 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안하다고 속죄한다. 잠깐의 방심이 만든 사건에 대해 반성하고 더불어 살아간다. 누구나 아픔은 간직하게 된다. 잊혀지지는 않는다. 받아 들이고 사죄하고 반성하고 그렇게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거지 라고 받아들인다. 아니면 다른 대안이라도 있을까!
죽음이 그렇게나 가깝다. 방심이 불러온다. 나와 내 주변의 무관심이 혹은 관심은 있는데 행동으로 이어지지 아니한 놓침에서 우린 직면하게 된다. 다치고 나서야 알게 된다. 후회를 하고 다시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다. 내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저, 아버님 어디 불편한 데 없으세요? 라고 묻거나 이젠 걷는데 쓰는 보조도구 사용하셔야 해요. 아셨죠? 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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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내가 쓴 짧은 글들이 나중에 엮여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그 걸 볼 때 엄청 울 듯하다.
울상을 짓고 소리없이 흘러내릴 듯 하다. 아마도. 마음을 너무 주었어. 그리고 퇴색해져 간 아버지와 할머니처럼 잊혀져 가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가끔 혹은 종종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를 추모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우린 정해진 답을 놓고 그렇게나 싫은 티를 내는 것 같다. 죽는다. 사라짐이 그렇게나 야속해 강한 애착을 느낀다 라고 한 그 문장에 갖혀있다. 이제 사라짐 이후 과연 영생을 논할까? 윤회를 기대할까? 결국 사라짐에 대한 오늘 할 일은 어제 했던 일이 아니라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그렇게나 바라고 바란 일이면서 바라고바라면서 이루어 나가는 일인 것. 어쩌면 내 옆에 없기 때문에 간절해 진 그 마음이 그녀를 볼 때 그렇게나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은 원인일 지도 모른다.
아침에 했던 약속, 산책길에서 어디에서건 만나는 사람과 반갑게 인사하자는 약속을 지킨다 라는 것에 덧붙여 '여보, 사랑해' 라는 말을 다정하게 전할 수 있는 것. 그냥 그래도 돼. 뭘 그리 감춰. 뭐가 좋다구.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것이 뭔지 그런 때가 있었던 듯 한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난 당신이 좋은데 그냥 정인가 좋은 감정인데 부부관계는 글쎄 하는 말에서 부족함을 느낀다. 관심을 주고 있는가? 할 도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난 또다시 갖혀 있는 것인가? 어찌할 바를 모를 때는 그냥 상대방에게 전하자. 부족한 것, 채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 모두. 반드시 함께 옆에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마음이라도 전하자. 오늘 이 글 또한 어쩌면 일기에 가깝다. 읽힐 만한 스토리를 입혀 재밌게 보게 만드는 것,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이거다. 상상이든 추억이든 수필이든 일기든 어떤 것이든지 가능한 스토리의 세상에 내가 보이고 싶은 것,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그리고 함께 하고 싶은 것, 전하고 싶은 것 그 모두를 스토리로 만들어 보는 것. 이제 시작이다.
사라짐에 강한 애착을 느낀 지 두 달하고 반이 지난 지금, 결국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편한, 일상에서 바로 재미를 줄 수 있는 '이야기' 자체에 들어섰다. 아는 것, 모르는 것, 윤곽을 짜임새를 세상을 한 토막 엮어 내는 일이 기꺼움에서 출발 할 수 있도록 내 자신에게 전한다. 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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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自`2022.06.09 16:33
내 역량을 녹여보자.
내 역량을 들여다 보면서 하나씩 일깨우자.
함께 만들어 보자. 나누고 이야기 하고 윤곽을 짜고 뼈대를 세워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는 데 가장 재밌는 방식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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