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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궁극에의

M. 존재로서의 자각

by 큰바위얼굴. 2022. 12. 12.
하천으로 내려가는 입구에 있는 벤치

6시 36분.

6시 3분경 도착했구. 5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갔다. 해나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도 나오지 않았고, 가서 만져줬는데 현관에 나가는 인기척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예티랑 둘이 나섰고, 현관을 나섰을 때 생각보다 춥지 않다. 손이 시렵지 않았고, 잠시 머뭇 머뭇거리는 예티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하천변 출발점 위치

그리고, 어느 순간 화장실.

산책에서 남겨진 건 여러 컷의 사진과 그래도 뛰려고 했던 노력. 걸으면서 느끼는 감정들에 대한 수습. 이런 저런 뜻하지 않은 예티의 어떤 보채는 발걸음으로 인해 뛰기도 하고, 뛰다가 머뭇거리기도, 다시 멈추기도 하고, 주거니 받거니 그렇게 다녀온 산책길.

출근길을 나서면서 가는 중에 생각을 한다. (음성 듣기) https://youtu.be/UD-92wrGTZ8


가야 할 곳이 있고 가야 할 시간이 있다는 거. 주어진 제한 속에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거. 마음을 비우고 느긋한 마음을 지니려고 해도 해야 할 어떤 것 때문에, 혹은 맞물린 어떤 구속 때문에 시간이 한정된다 라는 거지.

자, 아무튼 서론이 길었네.

본론으로 들어간다면,

오늘의 주제는 공간.

그러니까 굳이 화장실과 안방을 나눈, 나누지 않은 공간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은 달리 흘러간다. 공간 안의 시간은 달리 흘러 간다.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 그 미세함이라는 정도는 지구는 24시간을 하루로 본다. 지구의 시각으로. 그리고 목성은, 토성은 태양 주위를 돌면서 그 시간의 개념이 지금 우리가 계측하는 그 행성의 태양계를 도는 시간이 각기 다르다.

자전의 속도와 움직임, 거리. 태양과의 거리. 이런 저런 거를 생각했을 때 지극히 타당하지. 일단 지구라는 큰 틀 안에서 보자. 지구는 현재 24시간을 기준으로 하루를 본다. 그렇다면 목성과 토성은 조건이 다르니 다른 시간으로 계산한 게 맞지. 그 환원하거나 다르게 볼 필요 없어. 일단 시간이라는 건 나아간다거나 한다 라는 개념에서 파생됐다고 볼 때 시간에 대해서는 좀 내버려 둬도 된다.

자, 그럼 공간만 보자 이거야.

공간. 지구와 목성과 토성과 태양과의 관계에서 시간이 달라진다는 게 공간이 다른 순간, 관계에서 시간이 달라진다 라는 거야.

그걸 아주 미세하게 지금의 나, 내 안에 있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차 안에 있는 시계와 내가 지금 들고 있는 핸드폰 간에 시계가 달리 간다라는 거지. 시간을 달리 표시한다라는 게 아니야. 시간을 맞춘다 라는 개념이 아니고, 내 앞의 신호를 받고 좌회전하고 있는 차들과 멈춰져 있는 나는 다른 시간으로 가고 있다라는 거지. 이걸 같은 공간, 지구라는 공간으로 보니까 24시간이라는 시간 안에 우리는 같은 시기를 살고 있어 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절대량에 대한 24시간이 같은 시간으로 보이긴 하시겠지만, 이 부분이 목성, 토성 개념으로 넘어간다면 아주 확연히 구분이 될 것이고, 하루 시간에 대한 길이가 그 길이를 무시하거나 느끼지 못할 만큼, 느끼지 못할 만큼의 생존력으로 혹은 적응을 했겠다라고 봐야 될지도 모르겠어. 다시 말해서, 아주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고, 내가 바라보는 시간 저 끝이 닿은 끝과 지금의 나는 다른 시간대, 공간이 다르니까, 머물고 있는 곳이 다르니까 다른 시간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가고 있는 게 다르다 이거야.

태양을 중심으로 목성과 토성과 지구가 도는 어떤 거리와 힘의 작용. 이런 것으로 인해서 달리 다른 시간으로 살고 있는 것을 지극히 당연히 보듯이, 지금 내가 그러니까 변기에 앉아있는 나와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서희 간의 시간은 다르다 이거지. 다르다 라는 관점으로 보자 이거야. 달리 포진돼 있으니 다르다 이 말이지.

공간이 다른 공간에 있으니 다르다. 너와 내가 떨어져 있으니 다르다. 시간은 달리 간다. 느끼지 못할 만큼 미세하겠지만, 다르다.

그렇다면, 자, 이걸 원론적으로 보자.

점 하나를 찍었어. 여기에서 있다와 없다에 대한 개념이 나오더라고.

자, 그러면 우주는 계속 뻗어 나간다고 했잖아. 물방울을 연못에 떨어뜨리거나, 물감을 물 위에 떨어뜨렸을 때 물감이 퍼져나가듯이 우주가 파장을 파문으로 퍼져나간다 이거야. 나가고 있다 이 말이지. 끊임없이.

자, 그렇다면 지금 얘기했잖아. 다른 공간 그러니까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은 모두 시간이 달리 간다.

다리 밑 주름

그렇다면 태초에 우주가 생겼을 때, 우주가 생길 때 태초에 점 하나.

예티가 핧으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빅뱅이 터지기 전에 점 하나에는 아주 미세하게 시간이, 아주아주 미세한 시간에 차이가 있었겠지.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있다. 있다. 있는 순간 시간은 흘러가고, 시간이 흘러간다 라는 얘기는 조금이라도 거리를 두게 된다라는 얘기는 시간이 달리 흘러간다. 그러면 있다라는 순간 자체에 아주 미세한 원자와 전자와 그 안에서조차 시간의 개념이 작동을 하는데, 그 아주아주 미세한 점 하나 안에서도 시간은 흘렀을 거고, 점 하나가 생겼다.

생긴 순간을 있다라고 한다면, 있다. 있는 순간 그 안에 시간은 달리 흐르고, 같은 공간에서는 같은 시간대라고 착각할 수 있다 라는 가설로 접근해 보자 이거지.

있다. 없다.

없다라는 걸 일단 좀 배제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얘기가 돼야 돼. 지구, 지구 안에 '있다' 는 건 우주조차 우리가 보이지 않을 뿐 암흑 물질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잖아. 보이지 않는다지. 없다가 아니거든. 그러니까 우주라는 자체도 이미 점 하나에서 파생돼 퍼져나가고 있다면 우주 너머, 우주가 닿지 않은 그 우주가 퍼져나가는 파장 너머에는 없다? 우주 관점에서는 없겠지. 지구 관점에서 공기가 없다? 아니지. 공기가 있잖아. 그러니까 있다야. 무조건 있다야. 보이지 않는다. 파악되지 않았다. 아직 모르겠다 라는 개념이고 이 공간을 진공이라는 상태를 두더라도 그 안에는 있다. 있는 거지. 없는 게 아니고, 있다.

자, 지금 좌회전을 받고 있고, 차들이 생각보다 많네. 지금 시간대를 6시 반 이전으로 더 당겼을 때 차들이 적어질까? 좀 더 적어지긴 하겠지. 그런데 뭐라고 할까? 급격하게 적어진다란 느낌이 들까? 아닐 거야. 혹시 6시 전이라면 모르겠다만. 그렇다면 6시 전에 나올 이유가 있나? 그럼 더 당겨야 되는데 그럼 산책을 더 앞에 가야 되고, 자 이런 관계에 있어서 시간은 달리 흘러 간다. 저 차와 나와, 앞에 가는 차와 나와의 관계나 거리가 생기는 순간, 시간은 달리 흘러. 이 공간에 있는 이 꽉 찬 공간은 있어. 그냥 있어. 이 공간에는 공기가 있든, 뭐가 있든 그냥 있는 거야. 있는 거에 대해선 없다라고 할 수가 없어.

없다.

없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가 아니라 없는 거거든. 그러니까 만들지 않았다가 아니야. 없는 거야.

만들 재료가 있고 뭔가가 있고 내 손에 쥐어진 연필이 있다면 연필로 그림을 그릴 때 그림에 나타난 어떤 그림조차 나타낸 모양이 있는 거잖아. 그림이라고 표현하든, 명작이라고 표현하든, 그냥 단순히 낙서라고 표현하든 그런 차이가 있을 뿐이지. 재료에 의해서 표현된 어떤 것들이 가상이 아냐.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 지구 안에 우리가 표현하는 모든 만들어 내는 어떤 상상조차 있는 상황에서 가는 거야. 꿈을 꾸는 것도, 잠을 잘 때 드러난 어떤 드라마틱한 영화를 보든, 어떤 징크스, 혹은 뭐 공포, 혹은 뭐 어떤 재미, 어떤 반복, 어떤 것이라도 있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빛이 반사된 물, 현혹된다. 미망에 사로잡힌다. 벗어나려는 의지 또한 시험에 든다.



있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없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에서 되었다. 모든 상상조차. 어떠한 것조차. 우리가 얘기하는 창조가 아니라 모방이 되었다 라고 봐야 된다. 거리를 두는 순간, 시간은 달리 흘러간다 라는 가설처럼, 모든 건 있는 데서 시작했다. 우주라는 것, 우주 안에 지구 안에 벌어지는 모든 것, 상상, 생각, 모든 게 다 있는 데서 시작한 거다. 본 것이고, 들린 거고, 느낀 거고, 자극 받은 거고, 안에 어떤 원자의 어떤 영향으로 혹은 어떤 다른 클라우딩 개념에 연결된 어떤 선에서 탁월한 또는 어떤 독특한 생각이나 사고를 했을지라도 그건 모든 게 다 연결되거나 있는 데서 시작되었다.

있다.

자, 그러면 없다는 뭐야?

예티가 있다.

없다는 우주 너머의, 다른 어떤 또 다른 우주가 있다고 보자고. 우리가 표현한 이 우주 너머에 거기에 점 하나를 찍는 어떤 순간이 있었을 것이고, 점 하나를 찍기 위한 공간이 있었을 거다. 공간이 있을 거다 라는 얘기잖아.

자, 그렇다면 그 공간이 있잖아, 이미. 점 하나를 찍은 점 하나에 대한, 뭔가를 하기 위한 그 공간이 있는 거야. 그럼 공간 전에 누군가가 점을 찍기 위한 액션을 하는 뭔가가 또 있다라는 거잖아. 그러니까 여기에서 전제는 있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모든 건 다 있는 데서 시작했다. 있는 데서 일어난다. 있는 것에서 뭘 추구한다는 건 다른 문제고, 있다. 있다에서 모든 게 일어난다. 일어났다. 일어나고 있다.

있다와 없다에 대한 개념 차이를 지금 충분히 살펴보고 있다.

성호와 예티가 있다.

선각자가 된다.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라는 것에 대한 설명과, 판타지 세계에서 얘기하는 지구의 신과 혹은 다른 판타지 세상의 신이 달라. 그 다를 수밖에 없는 이원적인 구분은 그 공간을 지배하는 공간 안에서 파생된 어떤 역할, 그 고리가 있는 데서 벌어지는 맥락에서의 신적 존재와 우주의 점을 찍는 어떤 존재로서의 그 있음이 차이가 있다.

거리를 두고 있다. 달리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그런 개념으로 봐야지. 근데 연결돼 있다. 공간조차. 우리가 우주 안에 지구, 은하계, 수많은 은하계와 은하의 태양계, 지구의 안에 있잖아.

자,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모르는 거지 . 못 느끼는 거야. 그러니까 차이가 있고 구분이 되고,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할 때에 있음이 우주조차 누가 점을 찍은 하나의 존재가 있다라고 본다면 뭐 여럿 연합체든 어쨌든 액션이 일어난 하나의 포인트로 보자고. 그러면 포인트를 지목한, 지정한 그 시작점이 있다라는 거지.

시작점. 그러면 시작점 너머에 없어? 없는 거야.

그냥 깜깜한 게 아니라, 깜깜한 것도 있는 거라니까? 없다는 건 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무. 무도 유무로 따졌을 때 무라는 존재감이 있다면 이것도 있는 거야. 있다. 없다라고 표현한다면, 이것도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공. 그러니까 빈 곳에도 진공 속에서도 있는데, 공. 비었다란 개념도 있지. 그러니 도를 닦는 거야.

바닥에서 바라본다.

없다라는 것에 닿을 수가 없어.

한계가 있다. 있는 곳에서 태어났고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뭐 모든 논리와 이치와 깨달음과 모든 이 속은 있는 데서 벌어졌다.

있는 데서 벌어진 것은 있다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없다는 몰라. 있다와 없다로 구분했을 때 없다는 모른다고. 모르는 게 맞는 거 같애. 지금 우주 너머에 우주 저쪽에 은하계와 수십 광년을 가야만 닿을 수 있는 어떤 곳에 대해 우리가 그 빛, 달빛을 보듯이 빛은 보고 있구나! 지구 외에 다른 게 있구나! 있는 건 알지만 모르잖아. 그러니까 없다라는 건 알지만 몰라 딱 이게 맞는 거 같애. 모른다. 알지 못한다. 근데 없는 게 있다라는 건 알겠지? 우주에 우주가 시작했을 때 누가 점을 찍어서 시작을 했는지, 빅뱅으로 시작됐는지, 팽창을 시작했는지 하나의 포인트 점에서 어떤 식의 연결고리가 나와서 두 개 점에서 시작했을 수도 있잖아? 아무튼 여러 점에서 시작하면서 파문이 지금 여러 겹쳐서 지금 흘러갈 수도 있잖아?

어떤 상황이든 어떤 시나리오든 가능하다 라는 거잖아? 모를 뿐 있는 거지. 모른다라는 건 없는 게 아니야. 있지. 있는 거고. 없는 거라는 거는 모른다 라는 거야. 이해돼?

모른다고. 모른다. 없다가 아니라 모른다고.

자, 이걸 본다면 모른다 라는 거야. 없다 라는 건 모른다. 넘어왔어? 모른다구?

없는 게 아니라, 모른다.

세상은 있다야. 없는 건 생각할 조차 필요 없어. 필요가 없다구. 필요가 아니라 없는 거는 외적인 거라구. 있는 것에 외적인 거. 그러니까 있는 데서 없다로 갈 필요도 없고, 닿을 수도 없어. 구분자이기 때문에 있는 순간 있는 데서 벌어진 거야.

모든 세상의 이치와 깨달음조차 상상, 가상 뭐 어떤 모든 다른 어떤 걸 꿈꾸든 생각하든 상상하든 모든 것은 있다에서 파생되었단 말야. 그러니까 없다. 없는 건 알아. 없는 게 뭔지는 알겠어. 있으니까 없는 거지. 우주가 시작했으니까. 뭔가 어딘가에서 시작했다는 걸 알잖아. 어디서 시작했는지. 시작한 걸 안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몰라. 근데 없는 게 아니잖아. 모르는 거지. 그러까 없다는 모른다 라는 거야. 그리고 실제로 없다라는 걸 알 필요는 없어. 왜 외적인 존재야. 외적인 영역이라고. 있다에서 없다로 갈 리가 없어. 자 그렇다면 있는 거야.

하늘에 달
지상에서 보는 나



있는 데서 벌어지는 모든 이치나 어떤 흐름, 이런 것들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고 파악하고 있는 거야. 그 속에 사는 아주 작고 작은 알갱이야. 그 속에 속에서 어떤 파생들이 어떤 일들이 왜 필요했는지 짜맞추고,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어떤 제도나 이런 사람 속에서 만들어 낸 거잖아.

일자리는 만들어 낸 거라고. 아주아주 아주 연결된 그러니까 기본적인 게 뭐야? 지구 안에 벌어지는 무수히 많은 일과 사람들. 사람들이 생겼고 동물이 있고 자연이 있었어. 나무가 있었고, 자 나무는 그냥 생겼어? 인간관점에서 그냥 생겼을 수 있지? 심을 수도 있겠지만, 태초에 물과 흙이 있었다.

자, 물과 흙이 있었다. 물과 흙이 가만히 있겠어? 관계가 생성되는 순간 시간이 달리 흘러 간다니까. 그럼 달리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뭔가를 만들어내거나 버무려지거나 뭔가가 일어났다 라는 거잖아. 물론 흙과 물 이전에, 더 전에 원자든 어쨌든 미생물이든 뭔가가 있었다라는 거잖아. 있다. 그러니까 모를 뿐이지 있었다라는 거야. 그걸 왜 알아야 되지?

궁금하니까?

자, 전제로 했잖아. 모를 뿐, 없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근데 우리가 모르는 걸, 없는 걸 굳이 알 필요는 없다고 했잖아. 알아서 그게 명확하게 됐어. 그래 클리어 됐어. 거기에 어떤 존재론적인, 그리고 신적인 영역과 세계를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어떤 영역으로 볼 수 있어. 접근법이지. 왜냐하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지금 제도를 바꾸고, 어떤 제도에 파생되는 영향을 끼친들, 그게 우리가 먹고 살아가는데 지배적인 영향을 끼쳐? 아냐.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어떤 산물들. 더구나 인간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해서 만든 제도들은 더더구나 그 영향력은 아주아주 미세해.

그렇지만 우주의 태초에 점 하나를 찍었던 존재론적인 거기에 접근한다면, 그 접근법이 우주의 탐험과 우주의 끝을 가거나 우주 태초의 점으로 가서 그 점을 파악했을 때 그 흔적을 파악한다고 하면, 그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존재로 인해 파생된 부분을 안다면 우리는 그 영역에 닿을 수 있다. 그걸 펼칠 수 있다. 그럼 우리도 우주를 만들 수 있다. 우주에 대한 신비가 벗겨진다. 우주가 퍼져가는 속도와 우주의 탄생의 비밀이 벗겨지는 순간 우리가 그만한 기술력. 볼 수 있는 시간. 알게 된 모든 것을 갖고 있게 된다라는 거 아니야? 그러면 그런 걸 펼칠 수가 있다 라는 거야. 그럼 그런 걸 펼친 존재가 있었겠지? 인간만 그랬겠어?

다리 밑 물을 따라서

자, 그러면 지금 상황도 누군가 펼쳤다라는 거고. 모를 뿐이고. 인간적 존재인지, 산소와 수소의 어떤 개념인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신적 존재인지 모를 뿐이지. 없는 게 아니야. 있잖아. 있는 데서 벌어졌다고 우리가 얘기하고 있잖아.

모든 건 있는 데서 벌어졌다.

없다라는 것은 '무'와 '공' 한 세계조차 아니라고 했잖아. 공조차 비었을 뿐, 진공이 비어있어? 아냐. 있다니까. 아무리 있는 세상에서 있는 공간, 지구 안에서 뭔들 한들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이지. 없지는 않아. 있다니까.

그러까 태초에 가는, 태초에 파고드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태초에 대한 신비. 우주로 나아가라는 나아가는 바다를 항해하는 나아가는 쪽에서의 연구의 목적은 최초의 신비, 영적인 그 힘, 힘과 기술을 터득해서 기술과 그러니까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 반복의 어떤 시작점. 우리가 빅뱅 시작 이전에 거기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거다 라고 표현하는 그것. 근데 있는 순간에 시작됐을 때는 그 미세한, 아주아주 미세하지만 시간이 흘렀을 거라고 얘기했잖아. 있게 된 순간부터. 있다와 없다로 구분된 순간부터 있다라는 순간부터는 아주아주 미세하지만 거리를 두었고, 거리를 두는 순간 시간은 발생했고 시간이 발생하는 순간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나아간다. 간다야, 뒤로 간다는 안 돼, 일단 가는 거야. 간다.

유독 막히네. 7시 3분이나 됐어. 6시 36분이었나? 다소 늦은 차이에 아우 엉덩이가 따뜻해. 하이 레벨로. 의자에 불을 떼고 있거든. 좋아 뭐. 지금 시간이 가고 있어. 가서 어떤 다른 일들을 하지 않겠어? 아니 해. 아하, 이 앞의 앞이었던 굉장히 느린 포크레인 같은 게 있다라는 얘기로 봐야 되겠지. 무척 느리겠네. 자 아무튼 나에겐 달리 시간이 가고 있는 거잖아.

내가 뭔가를 하고 있고 충분히 얘기하고 있어. 얘기는 뭐야?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얘기라는 거야? 아니야. 아주 원론적인 부분에 대한 접근이라고. 이치를 파악하는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에 대한 흘러간다, 반복된다, 기록된다. 이 세 가지만 하더라도 엄청난 정리가 아닐까? 받아들였다라는 차이란 말이야. 어떤 책을 읽고 내가 얘기한 걸 누군가 이해를 됐어. 이해가 됐어. 그래도 그게 자기 거야? 깨달았거나 자기화되지 않는 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아하 그랬구나 라고 맞장구치지 않는 한, 자기 게 아니라는 거지. 자기 게 되는 순간에 이어지게 되는 거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거지. 자 그렇다면 내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있다와 없다에 대한 근원. 기본. 자, 지식이라는 걸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고, 지식은 그냥 이어지는 어떤 현상에 대한 쌓아지는 축적되는 걸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글로 써지고 역사나 문화, 어떤 뭐라고 할까? 전달을 위한 매체나 매개체. 내가 지금 말로 통해서 지금 얘기를 하고 있잖아. 있다라는 표현을 내가 어떤 걸 느꼈어. 그래 있잖아. 끝이야. 그럼 있는 걸로 끝나는 거야. 근데 저기는 저게 있고 저게 있고 나무도 있고 지금 앞에 차가 엄청 밀리고 있고 옆에 어떤 기업들이 있고 아직은 불이 켜지지 않았어. 이렇게 표현되는 순간 표현의 다채로움이 전달이 되잖아. 그리고 다채로운 과정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상상을 해. 이 상상을 하고 상상을 펼치고 연상, 상상, 생각, 어떤 생각들의 고리가 이어져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나만에 머무는, 그러니까 있다는 하나의 점, 빅뱅 이전에 어떤 하나의 포인트 포인트가 시작될 때에 멈추지 않고 우주가 팽창하고 있는 이유는 거기 있다라는 거지.

그냥 있다라는 순간에 그건 그냥 있는 거잖아. 단 하나 있다. 뭐 재미가 없다 라거나 어떤 다른 사람 관점에 할 게 없고 무료하고 따분하고 했을 때 재미가 없다 라는 표현을 했을 때에 재미가 없다. 있다라는 걸 재미가 없다 라고 표현하는 건 또 웃기지. 재미가 없다라고 지금 표현했거든. 자 없는 건 없는 거야. 모르는 거야. 모르는 거라고 했잖아. 없는 게 아니야. 세상은 다 모든 게 있다니까. 없는 거에 대해선 우리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니까. 우리는 있는 존재들이잖아. 있는 거야. 우주 너머에 다른 우주가 있든, 아주 뭐 깜깜한 게 아니라, 그냥 뭐라 그래 혼동 자체, 아니면 몰라. 아무튼 모르는데 없는 거야.

없는 건 없어. 그냥 없다고. 그걸 그러니까 우리가 이분법적으로 얘기하고 있잖아. 있다와 없다. 할 때 없다는 굳이 우리는 알 필요가 없다.

자, 빼내. 그럼 이제 있는 거야. 있는 거의 시작이 어디야? 빅뱅. 어떤 한 포인트.

자, 포인트에서 어떻게 시작했어. 그 시작을 아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돼? 우주의 신비. 그걸 알 만큼의 기술력이 발달하면서 닿았잖아. 그럼 그 다음 닿는 순간 만큼의 에너지와 힘. 그 얻어낸 기술력이 과연 인간으로서 닿을 수 있을까? 그 무수히 많은 걸 캡슐에 재워서 다시 깨어난들 그 시간이 멈춰져 있을까? 아주 미세하지만 미세한 시간들을 잡는다고 해서 늙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이 흘러가지 않은 걸까?

공간이 다를 뿐. 시간 흘러가 멈춰져 있는 건 아니야.

벽에 등진 거리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뿐이겠지. 착각.

그러니까 지금 지구의 시간이 24시간. 토성과 목성은 다른 시간대. 착각, 그러니까 거리를 두고 시간이 달라졌을 뿐.

우리가 우리 관점에 지구 관점에 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게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달리 보이는 거고, 차이를 느끼는 거지. 만약 그 차이를 차이로 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있다 라는 게 있다. 그냥 있다로 끝나는 게.

이 땅과 바다 물이 생겼고 거기에 사람이 결국에 생겼고, 사람이 만들어내는 무수히 많은 산물들이 얽히고 설킨 풍경.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다시 그림들이 파생이 돼서 전달이 되고, 전달이 돼서 역사가 되고 이 무수히 많이 반복되는 이 기록들의 원천. 정보화.

그러니까 이걸 무수히 쌓았단 말이야.

쌓이고 쌓여 쌓이고 있어. 있다가 하나로 끝난다면 있는 것에 계속 쌓이면서 있다가 있는 순간에 모든 게 펼쳐졌다 이거야. 우주가 왜 계속 팽창하겠어? 우주가 만약에 팽창하지 않았다면, 그냥 머물러 있다면 하나의 점을 찍었겠지, 포인트로.

그것과 무슨 차이가 있지? 멈춰졌잖아. 왜 내가 얘기했잖아. 거리가 벌어져야 시간이 흘러간다. 나아간다. 간다. 앞으로 간다라고 했잖아. 간다.

가지 않고 머물러 있다. 서 있다. 멈춰졌다. 멈췄다. 시간이 멈췄다 라고 표현하는 건 뭐야?

거리가 벌어지지 않았다 라는 거잖아. 내가 움직이지 않았다. 거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그냥 있는 것과 그냥 점을 찍었을 때 그 포인트와 다른 게 뭐야?

뭘 만족하냐의 어떤 감정 영역은 아니더라도.

자, 있다 로 끝난다고 보자고. 불운과 어떤 불행의 개념이 아니고, 행복과 불행을 나누고 싶은 개념이 아니야. 있다의 하나의 말로 하나의 표현으로 그냥 있어. 보기 좋았더라 이 말이 아니고. 만들어낸 어떤 것들이 움직이고 움직이는 순간에 펼쳐지는 것들이 다시 나에게 오잖아. 그러니까 만든 존재조차 포인트를 찍은 존재도 만들어 놓은 걸 보고 흘러가는 걸 개입한다와 안 한다의 문제가 아니라, 해 놓고 보니 변화가 생기고 변화에 대해서 그냥 우주가 팽창하게 뒀더니, 그냥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버라이어티하다, 다이나믹하다, 볼만하다.

그러니까 그게 멈췄다라고 본다면 안에서 멈춘 세상, 멈춘 세상에서 우리는 유한한 있는 영역으로 다가가겠지.

그렇게 되면, 팽창에 제한을 뒀다면, (이런 고민을 하는 끝이 닿고 닿아 어디로 갈지 흥미진진하다.)

자, 지금은 근원에 대한 힘. 힘, 에너지, 기술력이 결국엔 우주 빅뱅의 탄생 배경을 밝혀냈을 때, 그 존재들이 과연 지금의 인간 형태로 과연 가능할 것이냐? 우리가 얘기하는 무수히 반복되는 에너지만 줬을 때 무수히 반복하고 연상하고 인간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사이보그나 로봇을 만들었다 이거야. 인조 인간이 만들어졌다. 장기 교환이나 어떤 기계화된 어떤 다른 물질로 변화된, 이 정신세계조차 논리적인 사고로 메커니즘으로 모듈이 어떤 블럭이, 블록 개념들이 연결이 돼서 생각이 사고가 논리와 이성이 우리가 감정 영역 외에, - 지금 감정을 떼고 있거든 - 아무튼 감정조차 만약에 갖게 된다고 했을 때 감정도 있는 거에서 시작했으니까.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의 마지막 자존심처럼 모든 게 반복되는 순간 감정을 지닌다. 나아간다. 살아있다. 움직인다.

바위가 깎였어. 깎인 티끌들은 어디로 갔을까?

궁리한다.

먼지가 되어 쌓이고 쌓여 먼지가 덩어리가 되겠지. 머리카락이 흘러 실타래가 되어 뭉쳐져 있어. 단지 더러움의 표현이 아니라, 실타래가 뭉쳐 있어. 뭉치고 뭉쳐 점점 거대해졌네. 그래 실타래가 실타래의 모양이야? 아냐. 어떤 갖가지 모양의 먼지와 쌓이고 쌓여 어떤 형태.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눈사람이 될 수도 있어. 그 안에서 어떤 파장과 어떤 벌어짐이 관계가 빠지직 빠지직하면서 원자의 어떤 관계에서 무수히 많은 시간이 흘렀어. 머리카락은 실타래처럼 엉켜서 뭉치고 뭉친 대로 두었더니, 어느 순간에 뭔가가 일어나더라.

있는 데서 일어나는 건 모든 게 가능하다.

상상조차
가능하다 이거야.

상상한다라는 건 있는 데서 벌어졌다니까. 있는 거에서 일어난 거야. 우리가 상상하는 건 없는 데서 일어난 게 아니야. 있는 데서 벌어졌기 때문에 상상하는 모든 건 일어나고 있고 일어났거나 일어날 것이다.

좋다와 나쁘다의 의미가 아니야.

일어난다 라는 개념이지.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났거나 다른 차원이든 다른 관점이든 어떤 걸 달리 보더라도 모든 건 있는 데서 벌어졌어. 이게 지구인지 토성인지 목성인지 은하인지 어떤 다른 우주라는 영역으로 봐서 그걸 하나의 바구니 안에 넣고 봐야 될지. 하나의 바구니에 바구니라고 하더라도 바구니조차 바구니 안에 담긴 계란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어. 그렇게 계란 하나하나의 우주들이 담긴 바구니가 결국은 누군가 들고 가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수도 있어. 우리가 길을 걸어갈 때 개미를 유심히 보지 않잖아. 개미 인생이, 개미 일상이, 개미의 생애가 다르게 흘러가고 달리가.

자, 그럼 만든 사람이 개미를 만들었다손치더래도 개미를 꾸준히 봐야 하나?

궁리한다.



안 봐. 관심이 있거나 없거나 그런 거에 상관없이 있게 된 순간부터 관계는 멀어진 거지.

그로부터의 주어진 사명처럼 내가 지금 이렇게 떠들고 있잖아. 마치 주어진 사명처럼.

모든 게 벌어질 수 있고 일어날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이 도로와 형상은 만들어진 것이고. 만들어진 현상의 근원은 있다에서 시작되었다. 있다라는 것의 기본 룰. 있다. 있는 순간의 차이는 거리가 벌어지는 순간, 있다. 있다라는 게 하나에 머물러 있지 않아. 시간을 움직이든. 있다 라는 점 하나를 보더라도 점 하나에 묻을 만한 거리감이 생겼다. 그런 거리감이 생긴 순간부터 시간은 달리 흘러간다 이거야. 시간이 흐른다 라는 거지. 달리 간다. 달리 본다. 다르다라는 얘기는 시간이 달리 간다. 흘러간다. 간다. 나아간다 라고 표현하는 부분이야. 뒤로 가지 않아. 있는 순간 간다야. 반드시 앞으로 간다. 넘어간다. 뭐 나이가 든다. 이건 보여주는 현상일 뿐. 나이가 젊어진다도 간다야. 거꾸로 간다 라고 표현되는 말도 간다야. 그러니까 있다와 없다로 구분했을 때, 있다가 있듯이 없다를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얘기했잖아. 그 영역은 왜야? 그러면 간다. 거꾸로 가든,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간다야. 간다. 가는 건 당연한 거야. 가는 거야. 있는 순간 가는 거야. 어디로 가냐 뒤로 가냐 .

슬퍼하냐? 아파하냐? 행복하냐?

아니야. 이건 다른 문제야. 파생된 감정. 어떤 살아가는 중에 제도처럼 만들어진 필요에 의해서 생성된 다채로움을 위한 하나의 영역을 하나로 표현하지 않기 위한, 있다 라고 머물러 있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발악. 있는 순간, 한계가 생겼고 차이를 버리는 순간 우리는 흘러가고 있어.

어디로 갈지. 그 안에 있는 티끌. 실타리가 얽힌, 바위가 깎인 그 먼지 한 톨처럼 그런 존재다.

하늘을 떠 받든 길

나아간다라는 건 거꾸로 본다! 우주의 태초 신비, 블랙홀을 보겠다! 우주 너머 끊임없이 나아가겠다!

우주를 벗어날 수 없어. 있다라는 건 있는 순간에 이미 한계가 생겼기 때문에 있는 중에 파생된, 물론 다른 어떤 재미들이 발생할 수는 있어도, 있는 중에 주어진 속성 속에서 버라이어티 한 파티를 열면서 버무러진 무수히 많은 건 발생해. 조합과 합쳐지고 스킬을 부리고, 응 그렇게 벌어지는 거지. 그게 어떤 재미와 파생된 주어진 여건에 그냥 하나로서 있었다면 너무 재미없었을 거 같애. 근데 하나하나가 합쳐지고 뭉쳐지고 다시 태어나고 리플레이 되고, 다시 가상을 하고, 상상을 하고, 상상의 영역까지 있는 중에 만들어진 거거든. 그렇다면 그 재미가 무한하니 끊임없이 나아가는, 있는 한계 속에서 우리는 충분히 짧은 100년을, 만 년을 살든 차이가 없다.

존재로서의 자각이 필요할 뿐.

빅뱅을 파고들 듯이,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건 그거야. 있는 순간, 태어난 순간, 한계 속에서 살아간다. 나아간다. 뭘 하든 뭘 만들든, 있는 속에서, 공간 속에서, 꽉 짜여진 속에서, 지지고 볶고 합치고 파생돼서 다른 다채로운 음식들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근원에 대한 탐구, 그것조차 심어진, 있는 속에 벌어진, 하나의 고리들.

자, 보자고. 어디에 닿을지 흥미진진 그 자체만 남는다. See U. 성호.




다시 이어간다. 2022.12.14. 출근길, 눈이 내려 40~60km/h의 속도로 가는 차 안에서 멍한 가운데 이야기를 풀어본다. https://youtu.be/sNHAsSdqDHU


눈이 내렸고 길이 얼어있다.

다행스럽게 찻 길은 제설 작업이 된 상태. 평상 시 80 정도에 다닐 수 있는, 좀 더 속도를 낸다면 110까지 밟을 수 있는 도로가 채 60이 되지 못한다. 살금살금 조심조심 가고 있다. 흠.

왼쪽 코가 막힐 만큼 잠을 똑바로 잤지. 그러니까 숨을 쉬기가 버거웠을 것이고. 왼쪽 코가 막혔다. 그러면 애매하네. 한쪽이 막힌다. 왼쪽이나 오른쪽 한쪽으로 자야 된다라는 얘기인데, 한쪽이라도 뚫어놓고. 아무튼 버거웠다. 숨쉬기가.

더구나, 술 기운에 숨이 좀 더 깊었어야 되니까. 술 한 잔의 여유, 세 잔 네 잔을 마신 후 어떤 잠에 빠졌다. 술이 결국엔 지금 못 느끼지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본다면 술을 줄여야 된다 라는 게 분명하지.

자, '존재로서의 자각'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 ..

있다. 없다.

양분된 어떤 시각에서, 있으니까 벌어진 거야 라는 없다 라는 거에 대해선 버려도 된다. 생각지 않아도 된다. 우주 너머에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한 닿기에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있든 없듯.

자, 태초의 시작이 점으로부터, 점 안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본다면, 무수히 퍼져가는 우주라는 것들이 파생되는 어떤 작용들이 점점 차원을 달리해 간다면, 보다 먼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있겠지 라고 이렇게 생각하기 싶다. 조합 된, 어떤 물질의 조합으로 인해서 발생을 했다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 주어졌다 라는 말은 뭐야? 있는 데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없는 데서 있는 것으로 넣었다?

자, 그렇다면 이 또한 다른 세계에서 이곳에 인류를 뿌렸다 라고 보자고. 그러면 다른 세계라는 것도 이 세계에 연결돼 있다. 그러면 인류 만 뿌리고 차단을 했다? 없어졌다? 이건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결국은 인류가 속한, 탄생한 이 우주는 있는 데서 시작했다. 한 통속이다 라는 말이 되는 것이고.

있음으로 해서 벌어졌고 있게 된 순간, 점 하나에 내가 너와 딱 붙어 있을 수 없으니 거리를 두게 되었다. 하나하나 오로지 올곧이 딱 한 알갱이만 있었다. 알갱이 하나조차 안에 원자와 전자가 있었다면 전자와 전자 간에 거리가 생겼다.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다. 하나. 시작이 하나. 티끌 하나였다. 근데 하나조차 안에 원자와 전자, 이 전자들 간의 어떤 거리가 있었다. 전자는 그렇다면 가만 있지 않고 움직였다 이 말이지. 겉으로 보기에 원자 하나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에서 전자는 계속 무수히 움직였다 이거야. 그렇지 않으면 죽으니까. 죽은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없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당연하게도 있게 된 순간, 전자의 거리처럼 각각의 거리가 생겼고 거리가 생긴 순간 흘러간다. 그러니까 흘러간다가 아니라 다르게 간다 이거야. 다르게. 각각의 거리가 생긴 순간, 각자가 보는 시각이 생기면서 차이가 생겼다. 보는 시각의 차이라든지.

어떤 차이로 인해서 그 차이가 우리는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 거리가 있는 공간을, 공간 거리가 존재하는 2차원 3차원 4차원 다차원 고차원 너머, 다른 곳, 다른 어떤 뭐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이 다 거리를 두게 되는 순간 차이를 보였고, 그 차이를 우리는 시간이라고 얘기하지.

전자가 전자끼리 움직이는 차이. 거리 만큼의 차이. 그 차이를 두고 움직인다. 어떤 목적, 어떤 태생적 할 일을 가지고 움직인다. 그 생긴 이유가 거기 있으니까 그 일을 하게 되는 거지.

끊임없이 나아가라. 뻗어가라.

이런 어떤 처음에, 태초에 점을 찍었을 때, 점이 점점 물을 들여 점점 팽창해 나가는, 그 어떤 힘. 기본적인 나아가는 방향. 지항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이 뻗어가라. 뻗어가라 라는 기본, 그 잣대, 지침, 기준. 뭐라고 해야 될까?

그 태생적인 점을 하나 찍으니 점이 홀로 있지 않고, 뻗어가라. 힘을 줬다. 점 하나에 힘을 주었다. 점 하나에 점 하나를 찍으면서 힘을 주었다. 그 점 하나에 힘이 담기니 나아간다. 차이가 생겼다. 시간이 달리 흘러간다. 차이를 보인다. 그러면서 나간다. 뻗어간다. 우주의 팽창만큼이나. 이게 하나의 바구니. 그 바구니 안에 계란. 계란이 많이 담긴 바구니.

차이라. 차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 이전에 관계. 우리는 이를 관계나 차이라고 부르지. 원자와 전자의 관계. 원자 하나에, 원자가 모여 어떤 생명체나 물질을 형성했을 때 그 형성된 태생적 역할. 숙명적인 벗어날 수 없는, 어차피 버무렸어. 티끌, 먼지, 눈, 가로등, 사람이 만든 것조차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잖아?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사람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뻗어가라 했으니 뻗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만들어진다. 뻗어가라 라는 것에 점 하나가 무수히 많은 점을 찍고, 그 점, 점, 점들이 홀로 나올 수 없으니 무리를 형성한 것이 은하야. 그렇다면 점 하나하나의 크기를 은하라고 본다면, 그런데 사실은 그걸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어. 무수히 많은 은하든, 점 하나의 은하든, 점 하나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면 그냥 덩치가 큰 점 하나일 뿐이야.

지구 안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지만, 지구 하나 이듯이.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그 점을, 그 점에게 부여한 것은 뻗어가라. 나아가라. 그 나아가라라는 사명, 사명을 두고 우리가 보는 시각에서는 팽창하게 보인다라는 거지. 하지만 달리 본다면 관계와 차이만 두었을 뿐이야. 저기와 여기를 그냥 거리를 두었을 뿐인데 서로 결국엔 연결이 되더라. 뭐, 먹고살기 위해서? 아니면 어떤 이유건, 바람에 날리든, 어떤 속성에 의해서든 하나 안에는 섞이고 섞이기 마련이다. 지구 안에서 우리가 섞여 섞이고 살아가듯이 우주라는 큰 울타리인 은하라는 은하의 우주 전체를 하나의 점으로 본다면, 그 안에 섞여 섞여서 돌아가고 있다 라고 봐야 되겠지.

자, 여기에서 우리가 보는 차원? 아니면 관점의 차이들이 나오는 거 같애.

면면들이 다양한 면을 형성할 때, 있어라 라고 해서 있었고, 그로부터 시작된 씨앗이 있어라 했어. 있어. 나가기 위해선 뭔가가 필요해. 뭔가 필요해. 가령 사고할 수 있는 능력. 뭐? 나아가지. 나아가야지. 그러니까 육체,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 그냥 단순 반복적인 어떤 역할에 지나지 않지만 또, 단순 반복하는 역할자들에 속한 그 톱니바퀴를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한, 우리는 통제하고 지배한다라고 착각하는 인류의 어떤 역할처럼, 인류는 윤활류에 가깝지. 톱니바퀴를 좀 더 원활하기 위한 역할이 생긴 거야. 맞물려 돌아가는 건 무수히 반복되는 지구가 토성이 태양계가 그리고 뭐 은하계가 큰 우주에 쭉쭉 뻗어서 나가는 것처럼.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눈길을 가는데 지금 60 정도거든. 무척 빠른 속도지. 다른 차들이 한 30, 40 정도니까. 다행히도 지금 차들이 멀어. 그리고 차선이 두 개야. 나는 쭉쭉 60으로 가고 있고, 다른 차들은 삼사십으로 가고 있고. 저 멀리에선 같은 무리. 좀 더 빠른 길, 좀 느린 길을 나눠서 양분해서 가고 있지. 미끄러짐에 대한 조심은 왜 필요해?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 미끄러질 범주가 멀리 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미끄러진다면 이 큰 도로를 생각하면 된다는 거지.

자, 지구는 외길로 가고 있어. 태양계 자체가. 다른 은하는 좀 더 빠르게 갈 수도 있고. 그 관계라는 게 누군가 볼 때 상대적으로 차이가 난다라는 거지. 이걸 우리는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계산했을 뿐이고.

간격의 차이, 관계.

자, 잘 봐. 우주라는 건 하나야. 점 하나. 우리가 보는 무수히 많은 점을 찍었고, 그 점들이 은하를 형성했고 뭐 거꾸로 보더래도 하나의 점이 은하가 되고 먼지구름이 형성되더니, 어느 순간 별들이 탄생하더라. 빠지직 빠지직. 자, 그거까진 이해되겠지? 그냥 그럴 거 같애. 당연히 그럴 거 같애. 하나가 그냥 쏙 하고 어디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과관계에 의해서 별이 탄생을 한다라는 거잖아. 별이 사멸을 하는 거고. 이 흐름은 반죽을 버무리고 버무려 뭔가를 새로 넣었던 존재. 역할을 만들어내고 그 역할들이 계속 나간다라고 봤을 때, 어느 하나의 우리 눈에 관측된 별에는 인류가 살든 살지 않든 어떤 역할들이 있다라는 거지. 역할이 우리가 얘기하는 인간, 소통, 인간의 언어로 소통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적 생명체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잣대로 굳이 구분하지 않더라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토성 안에 토성을 움직이는 먼지구름이 오히려 토성을 움직이는 톱니바퀴에서의 다만 코드가 안 맞을 뿐이지. (생명체든 아니든 역할 측면에서 보면 동일한 개념이라는 말).

내가 이제 두 길에서 느리게 혹은 빠르게 가는 길을 벗어나 지금은 뭐 시골길로 접어들었고 외길를 타고 가. 줄줄이. 우린 닿지 않아. 지적 생명체든 먼지든 티끌이든 목성에 토성에 어떤 가스든 닿지 않아.

자, 그렇지만 닿는 순간 어떻게 될까?

닿는 순간 관계가 붙어. 그렇다면 뻗어가라 라는 사명과 뻗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붙어. 합쳐지고 조합되고 이야기하고 말하고 붙어. 관계가 생기는 순간, 우리는 관계에서 말하지. 지금도 봐. 저 멀리 있는 우주의 끝을 보고 그 별빛을 보고 이름을 붙이고,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관심을 두고, 관심을 둔다는 게 뭐야? 정신 영역으로 이어진다. 저기 멀리 봤어. 이걸 굳이 텔레파시라고 하지 않더라도 파장. 내가 생각하는 관심과 이런 것들은 굳이 신적인 존재나 신앙심이라고 하지 않더라도, 관심과 필요에 의한 것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관계가 내 눈에 띄는 순간, 좀 더 강렬해진다. 좀 더 표면화된다. 현실에 와닿는다. 단지 생각에, 혹은 머릿속에 머물던 어떤 끈이 현실로 와닿기 위한 기술이 발전하던가. 그 노력의 끝에 결국은 닿을 것이다. 이게 있는 데서 벌어진다라는 얘기잖아. 있는 데서는 벌어진다. 그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 이미 우린 닿았잖아. 닿는 순간, 본 순간 갈 수 있거나 만날 수 있거나 교신을 할 수 있다라는 거지.

어떻게? 상상도 못할 방법이지.

몸이 간다?

광년을 떠나서 나를 실어 보낸다?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잖아.

내가 원자로 변해서 나를 광년. 빛으루 쐈어. 몇 십억 광년을 가. 자, 소모되지 않을까? 이걸 바래?
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건, 점 하나를 찍어서 뻗어나가라고 했고, 뻗어나가라고 한 사명이 우리 DNA에 주어졌어. 우리 인류 만이 아니라 돌, 먼지, 지구, 태양계, 은하, 저 멀리 무수히 많은 은하의 별들에게도 다 주어진 사명이야. DNA에 심어져 있다고.

(1) 뻗어 나가라.
(2) 너와 나의 차이,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어라. 관심을 두고 뻗어나가라 이 말이야.
(3) 톱니바퀴를 맞물려 돌아가는 역할자로서 기능을 해라.

자,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할게 있어. 이런 생각들, 상상, 이런 어떤 것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고 무수히 많이 탄생을 하고 있어. 그렇다면 내가 지금 저 멀리 끝에 있는 우주의 하나를 봤단 말이야. 눈으로 봤든, 사진으로 봤든, 상상을 해서 봤든 봤어. 표면화되지 않았어도 봤다고 본 거야. 생각을 했다. 봤다. 인식을 했다. 관심을 두었다. 어떻게 보면 관심을 두었다. 상상을 했든 어쨌든 그게 있을 거라 라는 믿음을 주었다.

주로 사실이라는 관계가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을 뿐, 내 눈앞에 인정을 못 받았을 뿐. 없다고 할 순 없는 거지. 지식이라는 건 우리가 알고 보고 서로 관계에서 인정할 만한 걸 지식이라고 하잖아. 하지만 내가 상상한 거, 생각한 거, 이런 어떤 얘기들, 논리들, 이치를 따지고 들었을 때 이게 없다고 할 거야? 아니. 있는 데서 모든 게 일어난다니까.

지식이란 범주가 아니라, 있는, 닿을 수 있는 관계에서 파생될 수 있는 모든 것.

그러니까 참 애기가 돌고 돌아 나도 몰라. 내가 지금 무슨 얘기 하고 있는지. 뭘 바라는지. 태생적 한계를 거듭 뛰어넘는다는 건지. 점 하나를 찍었는데 그 점이 무수히 팽창했다. 그렇지만 멀리서 보니 우주는 그냥 점 하나야. 그 안에서 팽창했을 뿐. 차이, 관계가 끈끈이 혹은 관심을 두고 멀어지고 있을 뿐.

그냥 구분을 해 본다면 우주가 뻗어나가는 걸 물리적인 작용이라고 본다면, 하나하나의 별이 탄생하고 사그러지고 다시 생기고 사그러지고 어떤 반복이 팽창하는, 그냥 팽창하는 자체, 점 하나의 팽창으로 본다면 꽉 차 있든 꽉 차 있지 않든 이거는 없다라는 공간과 구분할 필요가 없지. 그러니까 이 점 하나의 우주가 다른 점, 하나의 우주와 겹쳐 있거나 붙어있거나 교집합이거나 혹은 이 자체만 있다라고 치더라도 외에는 없다. 아예 없는 거라면 사실은 그냥 점 하나, 우주가 하나야. 그냥 우리는 그냥 우주가 하나라고. 다차원이든 어쨌든 고차원이든 우주를 건너 뛴 어떤 다른 차원에 닿든, 그냥 점 하나라는 거지.

자, 여기에서 우리는 물리적으로 구분했잖아. 우주에 뻗어나감을.

그렇다면 정신, 상상, 생각. 이 전제는 이거잖아? 있는 데서 (정신, 상상, 생각을 포함하여) 모든 건 일어난다. 가능하다.

먼지가 뭉쳐 결국에는 빠지직 빠지직 별까지 되는 이 상황 속에서, 별에서 별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조물조물했더니, 사람이 또 태어난 거야. 지구라는 애는 사람을 태어나게 했잖아.

자, 그러면 사람이 태어났고, 사람이 다시 어떤 역할을 하면서 생각을 했네.

자, 그렇다면 지구가 만든 사람이라는 존재가 이 우주가 점 하나에서 출발한 이 점 하나가 지구를 만들었어. 지구를 만든 이유가 있겠지. 뻗어 나가기 위해. 태양계라는 거. 그리고 지구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그 역할 속에서 지구는 나가고 있는 중에 지구는 내적으로 다시 사람이라는 걸 만들고 또 나아가도록 했어.

자,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게 있잖아. 우주가 점 하나에서 저 멀리 물리적인 방향으로만 보자고 했다고 했잖아. 뻗어나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볼 때는 뻗어 나갔잖아. 물리적으로 팽창했다고. 그럼 팽창된 면에 지구를 만들었고, 지구와 안에 지구에서 다시 사람을 만들었어. 사람이라는 우리가 구분하는 지적 생명체. 좀 더 고차원적이라고 표현하는 지성. 좀 더 사고와는 생각하는, 생각하는 사고하는 능력을 심었다고.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우주는 지구를 만들고, 지구는 사람을 만들었다. 우주가 지구를 만든 이유가 있고, 물리적인 이유만은 있지 않을 거라고.

지구의 역할이 태양을 돌기만 해? 아니라는 거지. 태양을 돌면서 어떤 역할이나 기능들 하라는 거잖아. 그 기능들이 이 팽창하는, 팽창해 나가는 에너지를 주는 거잖아. 서로 교환, 교신. 지구의 힘찬 맥동, 돌고 있는 움직임이 움직이면서 파생하는 힘이, 태양계의 힘이 결국에 쭉쭉 뻗어나가는 에너지가 된다. 근원적인 힘, 그 하나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나아간다. 팽창이 과연 팽창일진 모르겠지만, 팽창에 대한 사명, 단 하나야, 너에게 점을 줬고, 점이 뻗어 나가라 했어. 뻗어 나가. 나아간다. 뻗어 나갈지 나아갈지 앞으로 갈지 뭐라 그래 뛰어넘을지 혹은 뭐 깨달음을 얻고 점프할지, 그 방향(이유)은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해서.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우주가 뻗어 나가는 것이 그 방향이겠어? 난 아닐 거라고 봐. 왜? 재미가 없잖아. 재미가.

자, 근데 사실은 관점의 차이야. 우주가 팽창을 무수히 하고 있고 언젠가 터져. 점 하나가 터져? 아니야. 점 하나는 변동이 없어. 점 하나의 크기가 우리가 관점을 달리 해서 나갔다, 무수히 많다, 닿지 않는다. 이 거리를 쟀더니 광년이다. 이거는 우리 얘기고. 그냥 점 하나라고.

점 하나가 팽창했다.

내가 저기 멀리를 보고 있다. 이건 그냥 시간의 차이. 시간의 차이를 벌린 이유가 뭐야? 에너지를 얻기 위한 것.

차이가 시간이 달리 흘러간다라는 것. 차이가 발생했다라는 거. 관계가 생겼다라는 것. 모든 건 다 에너지를 얻기 위한 거야. 그 차이는 에너지를 얻기 위한 것. 실제 뻗어나가기 위한, 우주가 물리적인 측면에서의 뻗어나감을 위한 에너지를 얻기 위한 것. 너와 나는 벌어진 간격 만큼의 차이. 관계가 형성된 순간 에너지를 얻는다. 관계가 서로 멀어져 있다 하더라도 태양계와 저쪽 은하가 따로 있다고 하더라도 점 하나에서 벌어지는 그 하나하나의 은하계들은 이 우주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주고 있는 거야.

그 안에, 그 안에, 지구 안에 우리 인간은 그 에너지를 주기 위해 움직이는 아주 티끌 같은 아주 작은 톱니바퀴, 알갱이와 같다.

자, 여기에서 우리가 관계와 멀어진 어떤 물리적인 측면에서의 관계와 에너지를 위해 직접적으로 석유 에너지를 쓰는 것처럼, 전기 에너지를 치환해서 우리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있는 거라는 걸 알지. 그렇기 때문에 이건 있는 거라고 물리적인 측면에서 봐야 돼.

자, 그렇다면 물리적이지 않은 측면에서 에너지는 어떻게 주고 있지?

자, 과연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물리적인 측면에서의 에너지만 움직이나? 아냐. 지구가 사람을 만든 이유가 있다라는 거지.

관계를 형성했더니 톱니바퀴가 돌드라. 이건 재미가 없드라. 좀 더 푸쉬할 수 있는 거. 윤활류라거나 어떤 변수 좀 더 어떤 역할을 주고 싶었던 거지. 역할을 주기 위해서 사람이라는 걸 만들고 버무렸더니, 알아서 지지고 볶고 재미있게 논다는 거야. 폭탄도 터뜨렸다가 폭삭 망했다가 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 복작복작하구 지지고 볶구. 그럴 때마다 지구가 조물조물 해줬다 라는 거지. 좀 더 그러지 말라고? 그러라고? 아니. 그런 관점이 아니야. 관여라기 보다는 변수에 대한 변화를 주는 거야. 오로지 하나. 뻗어 나가기 위한 것. 에너지를 얻기 위한 것. 에너지의 관계를 위한 것.

자, 그 측면에서 우리는 생각이란 걸 하고 사고를 해. 근데 생각과 사고의 방향은 뭐야?

결국에 물리적인 에너지로 닿는다. 물리적인 힘에 닿기 위한 힘이다. 내가 상상하고 생각하고 하는 것들의 궁극은 뭐야?

내가 게임을 하고 있어. 내가 에너지를 쓰고 있잖아. 내 에너지를 쓰고 있다 라는 건 뭐야?
활황. 내 알갱이 하나에서도 뿜 뿜 뿜, 열이 난다라는 거야. 이 에너지들이 모인다고. 어디에? 내 주위에. 나로 인해서 내가 쓴다라는 거지. 내가 뭘 먹고 똥을 싼다 라는 에너지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대사 과정을 말하는 게 아니라.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 사람이라는 매체. 무수히 많은 원자의 집합과 세포로 인한 뭔가 유기적인 어떤 생명체에 에너지를 발생하는 게 오히려 효율이 좋다라는 이 말이지.

그냥 바위 하나에서 뭉쳐서 바람에 깎이듯이 변화하는 어떤 변화 차이가 생겼다. 바위 하나와 바람과의 관계에서 티끌이 생겨 깎여서 이 차이에 의한 에너지가 뻗어 나간다 라고 봤을 때 관계에서 차이는 시간이 달리 흐르고, 시간이 달리 흐른다는 것은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했잖아. 그 에너지를 그렇게 얻기에는 너무 뭐라고 할까? 하나의 방향이라는 거였지. 그러니까 변화로 변수 요인으로 사람이라는 걸 만들었고. 사람은 무수히 많은 집합체에 각각의 기관이 역할을 하면서 그 하나하나의 원자와 세포들의 기능들이 관계에 의해서 역할을 통해서 뭔가를 뿜쁨 에너지를 뿜고 있다는 거야.

얼마나 많은 일을 발생시켜.

그리고 더구나 다 그냥 혼자 있지는 않잖아? 뭔가를 계속해. 뭔가를 한다라는 건 뭔가 관계를 맺고, 관계 안에서 관계를 조합하고 합치고 또다시 이렇게 한다는 거야. 그게 지구라는 태생이 망할지라도, 망하게 할지라도 힘을 주었다라는 건 뭐야? 전체적으로 지구가 망해도 태양계가 망해도 블랙홀이 생겨 쭉 빨아들일 거라는 거지. 소거할 수 있는 기능은 있어. 전체 위해를 가한다면, 혹은 구멍이 뻥 뚫려가지고 다시 다른 곳으로 다른 우주, 혹은 다른 곳으로 점프해서 연결되어 있을 수 있겠지.

눈이 내려 서둘러 도착했다. 사무실 책상 위의 모습


우리가 얘기하는 우주가 하나의 점일지, 여러 개의 점이 합쳐진 점의 연결일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난 그게 더 타당하다고 봐. 하나의 점이면 너무 재미없잖아.

하나의 점을 뻗어 나가라고 했다? 글쎄.

점과 점이 부딪치면 어떻게 되냐? 이런 걱정보다 에너지. 뻗어 나가라고 했다. 점 하나 티끌 하나가 뻗어 나가라고 사명을 부여했다. 사람은 점들의 집합으로서 역할 기능을 하고 있다. 세포들의 관계에서 움직인다 한다라는 건 모두 에너지를 내기 위한 에너지를 발생해서 그 에너지로 이 우주가 뻗어 나가는데 하나의 역할에 힘을 주기 위한 기능이다.

생각과 사고가 물리적인 측면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거보다 생각이 멀리멀리 상상이 닿는 모든 것이 내가 보고 자란 어떤 것을 뛰어넘었을 때 비로써 다른 곳에 닿는다. 그 다음은 그 닿는다는 건 뭐야? 내가 지금 얘기했잖아. 이 우주가 하나의 원이 아닌 수많은 점들의 집합이지 않을까? 라고 한 순간 이미 생겼다. 이미 있다. 있는 중에 생각이 발생하고, 그런 중에 일어난다고 했으니까. 그 말이지.

등급판정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뭐겠어? 생각이 닿는, 생각하는, 상상하는 그 모든 재미를 위했든 무료하든 모든 어떤 것들의 궁극은 이 우주가 뻗어나가는 점이 탄생한, 하나의 점이 뻗어 나가라 라는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무수히 많은 경험과 관계, 추억은 되새김질하고 대뇌이고, 단지 하나에 단초가 있다고 한다면, 생각의 범주가 근원과 나아감에 대해 그 거리를 줄여서 내 존재로서 흔히 얘기하는 깨달음, 혹은 자각. 존재로서 자각을 함으로 인한 받아들임. 숙명적인 틀, DNA에 새겨진 뻗어 나가라라는 어떤 부분들은 지울 수 없을지라도, 그걸 받아들였을 때 차이는 세상을 보고 움직이고 나아가는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죽음이라는 게 죽음이 아니지. 무수히 많은 별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그 무수히 많은 시간의 연속 속에, 다만 시간의 연속이라고 얘기했듯이, 점이 팽창하는 것이 점 하나에 불과하다.

결국엔 점이야. 팽창한 점이든 그 물리적인 크기로 재지 않아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점 하나가 점 하나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무수히 많은 원자와 전자 단위까지의 움직임을 본다고 하면, 통으로 퉁 찼을 때 그 안에 나. 이런 생각들이 어디로 이어질진 모르겠다만 충분히 흥미진진하다. See U. 성호.




그리고, 다음날 2022.12.15. 출근길 차 안에서 다시 이어간다. https://youtu.be/LbTpHG9ENqs


중심잡기라고 이름 붙인 걸, 살아간다라. 존재론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을 살아간다라 라고 바꾸고.

그 안에 존재로서의 자각. 그 전에 풀어낸 중심잡기에서의 핵심 키워드인 이 세상은 흘러간다, 반복된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어떤 역할 존재로서의 역할을 본다면, 혹은 우주로서 힘의 원동력 모든 건 기록된다. 축적된다. 누적된다. 이 개념이 살아있는 거지. 흘러간다. 반복된다. 기록된다. 이 세 가지 속성이 이 세상, 우주를 포함한 알갱이가 모인 이 우주, 우주를 움직이는 큰 법칙.

물리력만이 아니라, 정신력이나 상상력까지 포함한 흘러간다 라고 했을 때, 오늘 문득 든 생각은 흘러간다 라는 건 물리력이 상상력보다 유리한 게 뭘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왜 나는 반복할까?

왜 새벽 5시에 일어날까?

싫어하는데. 싫은데, 어떤 감정들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눈이 올 거고, 눈이 왔고, 눈이 올 수 있고 길이 미끄럽고 달릴 수 없는데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게 보다 앞선다. 일어나야 뛰든 걷든 뭘 하든 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데 있어서.

새벽 5시. 하천변 초입. 눈이 내리고 있다.

더 잘까? 자도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아니하는 면이 내 의지로 일어난다면, 이러한 생각으로 새벽 5시에 눈을 떴고 일어났지. 그렇게 보니까, 왜 반복적인 것에서는 무던히 해나가는 거. 특별한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무던히 해 나가는 거. 흔히 얘기할 때 물리력이나 기술력. 반복적으로 눈에 보이는 어떤 것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거. 반복되는 거.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자고 이렇게 어쩌면 본능처럼 반복되는 거. 그거는 물리력. 흔히 그냥 물리력이라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상상력과 구분하기 위한 힘으로 볼 때 물리력이 훨씬 유리한 거 같다 싶다.

그렇다면 상상력은 뭐가 유리하지?

뒤를 돌아본다. 눈 위에 발자국이 남아있다.

우주를 구성하는, 우주를 움직이는 세 가지 속성.
흘러간다. 반복된다. 기록된다.

이 세 가지 속성을 다시 한번 넣어보자. 대입을 해봤더니, 상상력은 흘러간다. 나아간다. 흘러간다라는 표현 중에 플로우(flow) 쭈욱쭉 흘러간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데 있어서 우리가 지향하는 건 나아간다. 위와 아래의 개념이 아니고, 좌우의 개념이 아니라, 나아간다거나 앞으로 간다 라는 개념이지.

하나의 우주에 점 하나를 찍었을 때, 뻗어 나가라.
그 점의 크기가 팽창했든 하지 않든 어찌됐든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 이 말에 있어서야 흘러간다 라는 표현이다 라는 면이야. 나아간다 라는 게 표현이 맞나? 뭐 그건 논외로 일단 치고.
자, 일단은 흘러가는 데 있어서의 무한한 상상은 물리력 이상이지. 물리력은 눈에 보이고 뻔하고 반복되고 그 반복을 시키기 위한, 이제는 AI의 도움을 받아서 그 일들을 하려고 하는 데 있어서, 사람보다 AI가 더 월등해. 반복에 있어서. 심지어 글짓기까지 한다잖아. 편집까지 하고. 이제 미세한 뭐라고 할까? 나노머신으로 몸을 치료하고, 어떤 미세한 공정이나 편집, 찾아내는 거, 의학적 진단을 내리는 것, 치료하는 것, 이런 어떤 모든 것들이 훨씬 유리하다.

물리력은 어쩌면 이 지금 말들이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좀 조심스러워 해야 하겠지만, 생각의 범주를 거기다가 가둬버리니까. 아무튼 구분하는 건 필요해.

점 하나만 찍고 그냥 내비뒀다. 이것도 의미가 없듯이. 점 하나에서 일어날 무수히 많은 일들이 팽창을 위하든 움직임을 위하든 살아있는 생존의 본능을 위하든, 우리는 어차피 점 하나를 찍었고, 그 점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지금과 같은 반복적으로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잔다 라는 어떤 물리 개념의, 육체적인 개념의, 현실 개념의 일어나는 일들이 반복적으로 됐을 때, 반복된다에 좀 더 좀 더 월등해. 어떤 것보다 월등해? 상상력.

나를 인식한다.

흘러간다. 앞으로 나아간다. 뭔가를 생각한다. 뭔가를 눈에 잡히지 않지만 뭔가를 상상해. 그리고 이거 어떨까? 저건 어떨까? 그 기반이 물론 경험에 기반한다고 했고, 경험은 대다수가 본능적으로,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자는 동안에 본 것, 느낀 것, 어떤 감정적인 것, 기록된 것에서의 토대를 두고 있겠지. 그럼에도 상상력이라는 건 반복된다 라는 면보다는 흘러간다 라는 면에 더 어울린다. 그러니 기록이 되어 다시 면면히 이어진다 라는 게 반복되고 흘러간다라는 게 교집합으로 포함돼 있잖아. 그건 기록된다라는 건, 축적된다라는 건 사실은 그 속성을 풀어낸 말일 뿐이고, 흘러간다와 반복된다와는 사뭇 다르지.

흘러간다라.

나아간다. 반복된다. 어쩌면 말장난일 뿐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를 탐구하고 나아가면서 하나로 합일시키기 위해서는 흘러간다와 반복된다를 합치면 되겠지. 앞으로의 과제는. 그 표현할 말이 하나가 떠오른다면 그게 각성일 것이고. 깨달음이겠지.

그냥 가만 있는다고 각성이 되나?

그렇진 않다고 본다 그렇담 흘러가고 반복되고 기록되는 그 삶을 살고 있고, 그런 삶을 살아가려고 해. 살아간다라 라는 주어는 나 외에도 우리, 그 너머 우주까지 닿을 수 있다라는 거야.

살아간다라. 살아간다라. 존재로서의 자각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거지. 바위가? 먼지가? 어떤 것이라도 만물이 반복되고 반복된다라는 건 모든 속성이라고 했잖아. 어느 하나에 머물러 있지 아니해. 조합되고 편집되고 다시 재탄생되는 과정을 겪는다고 했잖아. 그렇다고 본다면 상상에 어떤 것들이 그게 실제 내 눈앞에 보이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어떤 반복과 형상과 사고력이 필요하겠어. 에너지가 필요하겠냐고? 에너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게 아니야. 일어났지. 이미 상상하는 순간 그림을 그린 순간 일어난 거야. 일어난 것이 다시 실제로 내 눈앞에 보이기에는 무수히 많은 반복을 해야 돼.
머신 러닝의 개념도 사실은 무한한 반복이잖아.
속독 개념이지. 사람이 평생을 걸쳐 깨우쳐야 될 걸, 무수히 반복을 시켜서 깨닫게 한다. 야, 이거야말로 무식한 방법이긴 한데.

반복되면 기계도 AI가 된다.

이 말이야. 알고리즘이든 모듈이든 뭔가의 틀을 통해서 언어 개념으로 통해서든 어쨌든 반복이 된다. 그러니까 가장 큰 힘은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반복이 더 큰 힘이지. 물리력 기반에. 하지만 지양하는 건 흘러간다. 상상력 기반의 지향을 해야 되겠지.

반복에 치우치면 사실은 반복의 단점이 뭐야?

무료함. 따분함. 지겨움. 그걸 이겨낼 수 없어.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잠을 자. 이 지겨움조차 깨려면 어떡해 해야 되겠어? 안 자면 돼? 아니지.
일어나는 게 행복할 만큼 마음을 먹거나, 일어나는 게 행복할 만큼 기대감을 품거나, 일어나는 게 너무나 좋고 뻘떡뻘떡 일어날 만큼 유익하게 다시 한번 더 그렇게 살거나, 그러니까 반복이라는 틀 안에, 그 안에 유희는 비록 유리알처럼 쉽게 깨질 수 있겠지만, 유희라는 건 반복을 위해 필요한 요구되는 상상력과 같다.
(너무 빨랐어. 흥분했고. 창문이 지금 뿌옇다. 열기지. 그래 열기. 뜨거운 공기로 지금 시아는 티였으니 지금 보면서 가고 있긴 해. 좌우를 확인하기에는 조금 애매해. 불빛 정도만 보여. 잠시... 아이고 미나리도 다 맛셨다. 좋다. 이제 옥산 사거리에 거의 다달았지. 언덕을 넘고 더 저쪽으로 가면 좌회전 받을테지. 자, 이어가 봅시다.)

되돌아온 하천변 초입. 빛을 등지고 나아갈 길을 바라본다.

흘러간다.
반복된다.

그걸 하나로 합친다. 기록되고 축적된다 라는 속성처럼, 저변에 깔든가. 흘러간다. 나간다. 나아간다 라는 말이 더 와닿는 거 같애. 근데 나아간다 라는 속성은 좀 의지가 필요한 말처럼 되잖아. 근데 우주가 하나의 점을 찍고 나아가게 되었다. 나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은 또 좀 필요한 말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 의지 없이 어떤 일들이 펼쳐질 수는 없는 거 아니냐고. 또 다른 면에서는, 이걸 나간다라고 한다면, 우주가 주어라 그렇지만 내가 주어라면 존재로서의 자각은 사실은 기초는 나잖아. 나 니까 나를 기준로 한다면, 나아간다. 우주나 어떤 나 외에 다른 걸로 기준으로 한다면 흘러간다.

자, 봐봐. 반복된다도 마찬가지잖아. 반복한다가 아니야. 내가 반복한다. 의지를 갖고 반복한다. 이러면 성공해. 사실은 근데 이 세상의 어떤 법칙이나 운용되는 규칙처럼 본다면, 내가 반복하든 안 하든 이 세상의 규칙은 반복이 돼.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 반복이 된다. 너와 상관없이 나와 상관없이 반복이 된다. 그런 어떤 인칭 개념이 들어가 있는 거지. 수동과 피동에 대한 그런 관점에서 흘러간다 라는 걸 썼던 거고.

만약 나로 바꾼다면, 아니면 우주로 바꾼다면, 우주는 나아간다. 반복한다. 우주가 반복해. 반복돼. 반복한다. 반복된다. 그럼 기록도 기록한다. 의지로 품어서 다 바꿔 나아간다. 반복한다. 기록한다. 축적한다. 뭐, 좋아. 이게 뭐 아카식 레코드든 어떤 말이든, 뭐 세계 도서관이든, 세상의 도서관이든, 상상의 산물이든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주체로서 존재로서의 자각은 반복된다. 반복되니 너가 반복해라 반복해야 된다 라는 말을 하기보다 반복해라 라는 건 결국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뭐야?

반복해라. 반복이 되니 받아들여라가 아니라 반복해라. 세상의 원칙이나 어떤 것들을 나가 아닌 내가 속한 세상을 기준으로 본다면 반복된다거나 흘러간다 라는 말이 좀 더 근사하겠지. 기록된다 라는 말이 좀 더 근사한 것처럼. 그렇지만 존재로서 자각을 한 입장에서 본다면, 나아간다. 반복한다. 기록한다가 맞는 거지? 그렇지? 좋아. 그렇게 결론 내리고.

자, 그럼 반복한다. 상상력도 반복한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내가 지금 이렇게 얘기를 하고 풀어내고 얘기하는 것들, 어떤 일들, 그리고 엄청난 에너지를 쏟지. 어제는 좀 쉬었나? 아무튼 한번 쏟아내면 다음날은 정말 녹초가 돼. 다음날까지. 그리고 다시 또다시 이어져. 그리고 다시 오늘로 이어졌잖아.

원해서 한 건 아냐.

사실은 너무 피곤하거든. 몰입이라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야. 사실 그냥 단순히 일어나고 자고 뭐 보고 이런 어떤 물리기반이나 육체 기반의 일이 오히려 에너지 소모는 적지. 그 차이를 얘기했던 것 뿐이야. 앞에 물리력과 상상력을 굳이 나누려고 했던 게 아니라, 에너지를 얻는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하는 어떤 그런 관점에서는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나 상상력이라고 표현되는 힘이 보다 더 크고 멀고 쭉쭉 뻗어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동기에 가깝다. 그런 세상이니까 우리 잘해보자 라는 말처럼, 그럼 그걸 그냥 일으키나? 아니지.

반복하고 기록하고, 반복하기 위해선 기록은 필수야.

어쩌면 나를 믿으면 안 돼.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했다고 다음에 또 생각해? 아니야. 감정을 들여다 봐봐. 감정이 그때 당시의 감정을 기록해 놓지 않으면, 그때 당시의 감정을 알지도 못하고, 기록해 놓은 걸 다시 보더라도 그 감정에 다시 빠져들 수 있어? 쉽지 않아. 쉽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기록한다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지.

기록을 어떤 식으로든 우주 관점에서, 나 외의 관점에선 기록이 됐지. 된 거야. 근데 내가 그걸 끄집어내서 쓸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물론 세상의 부속으로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해? 그냥 살아도 돼. 그냥 그냥 쭉쭉 뻗어 나가면서 할 거 하면서 뭐 어떤 것들을 굳이 뭘 한다거나, 뭐 욕심 부리거나 하지 않아도 되고, 뭐 그냥 한량처럼 그냥 살아도 된다고 봐. 응. 그렇게 살아도 돼. 그렇지만 그렇지 아니한, 좀 더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의의를 찾거나, 좀 더 보람이나 어떤 재미, 어떤 것들에 좀 더 바람이 있다면, 바라는 걸 이루기 위해서는 기록해야지.

기록의 습관만큼 기록은 반복만큼 겹치잖아. 이렇게 기록은 나아갈 때도 필요하고, 반복할 때도 필요한 거야. 그래서 기록이 굉장히 중요한 거야. 기록은 글로 쓰거나 영상으로 찍거나 어떤 매체를 불문하고, 내 머릿속에 각인을 시키거나, 누군가에게 전달하거나, 모든 게 다 기록이야. 흩날릴진 모르겠지만, 내가 우리 가족 방에 여럿 가족이란 범주에 넣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쓰는 이유는? 그럼, 흩날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옴에 쓰는 거잖아.

자, 그런 면처럼, 이 숙성에서 가장 기본은 뭐야? 기록이야. 왜 겹치니까.

상상을 했어. 나아가려고 상상을 했다고. 그래서 안 남기면 어떡게 하냐고? 남겨야 될 거 아냐. 전해야 될 거 아니야. 혼자 할 거야? 혼자 하는 힘은 한계가 있다고 했잖아. 사그러진다고. 그래서 상상력이 반복이 되는 힘이 약하다고 했잖아. 책 하나를 써냈어. 책 하나로만 본다면, 책이 읽히지 않네. 그럼 책은 그냥 점 하나 찍어놓고 팽창하지 않는 안에 머무는 단계지 . 하지만 책을 쓰고 다시 작가가 업데이트를 해서 다른 책을 내고 또 업 되어서 다른 책은 또 냈어. 그렇다면 무슨 얘기야? 이건 반복을 한 거잖아. 거기 기록까지 하고 전달을 했네. 그리고 그로 인한 어떤 사람들의 감화가 엄청나게 됐네. 이게 성령 말씀과 부처와 종교의 기본 탄생배경 아니겠어? 이념. 기본 이념. 논리. 이롭게 한다. 이로움을 받아들이니 퍼져나간다. 그만한 기록물이 어딨냐고? 교리가 어딨고, 그 사상이 먼저일 수도 있겠지만, 사상이 반복을 통해서 쭉쭉 몇 천 년, 몇 만 년을 가려면 기록된 뭔가가 이어져야 된다라는 거야. 사람이 사람으로 전승이 되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조차 기록됐다고 봐야지.

사람을 기록의 매체로 본다면, 어쩌면 가장 큰 몫을 하고 있잖아. 기록물이면서 기록 매체이기도 하지.

자, 그래. 그런 거지. 자, 속성에 대한 차이. 우주를 들여다보려고, 우주의 속성을 보려고, 우주가 도대체 뭘로 구성돼 있느냐 뭘로 일어나느냐 무엇 때문에 가고 있느냐 라는 어떤 기본 개념들을 찾고 우주가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건, 모르지. 모른다고. 모르는 건 알 필요가 있다? 없다? 아냐. 탐구는 해도 좋아. 근데 없어. 없는 게 모르는 거지. 분명히 얘기했잖아. 그 이전에 이전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이 우주 안에서 벌어졌다며, 이 하나의 틀, 우주를 만든 누군가를 포함한 존재로서 본다면 누군가라고 지칭하자고.
그 우주주주 우주는 다면. 면면의 다면 세상이지. 다면세상. 차원을 넘나드는.

내가 지금 이렇게 가고 있는 이것 또한 하나의 단면. 자고 있었던 것도 단면. 내가 다른 걸 선택하는 순간 면으로 다시 펼쳐지는 거. 그랬을 때 에너지는 폭등. 갑자기 폭등. 관심을 유발하겠지. 그렇지만 반복. 어떤 다이나믹함이 끊긴다면, 좌절한다면, 절망한다면, 그걸 바라진 않겠지.

자, 그래서 우리는 뭐 여러 안전장치를 가지고 있잖아.

게으름. 부지런하게 꾸준히 상상하고 생각하고 반복하고 기록하는 이 꾸준함과 열정이 있는 반면에, 열정을 태운 만큼의 훅 빠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단계 계단을 내려갔다가 잠시 쉬어가자 라는 피로감. 휴식 개념들이 생긴다라는 거지.

우상향하기 위해서는 단계를 밟고 점프 해야 돼. 그냥 꾸준히 올라갈 수도 있겠지. 근데 사랑 마음이 어디 그래? 세상의 움직임이 그렇지 않아. 밝고 밟히고 밟힌 만큼 힘차게 뻗어 올라가겠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물론 단절로 본다면 과거에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다라는 건 이거는 낙관하는 것이고, (이쪽으로 생각이 가면 안 되는데 아무튼 결론만 내리고)

(자, 지금 시점에서 봐야 된다. 지금 시점. 지금이 가령 US500이 4000이야. 지금 시점에서 어느정도 수준이야? 4400 대비, 3600대비 어느 정도의 중간점.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중간점. 물론 좀 더 하한은 3800 정도로 보지. 그럼 상한은 4200으로 봤단 말이야. 그 안에서 우리는 변동폭 안에서 움직인다 라고 봤는데, 더 큰 변동폭을 일으켰다? 더 큰 충격이었다는 말은 뭐야? 더 위로 올라갈 여지가 있다. 해소가 되는 순간 여지를 열었다 라고 봐야 된다.)

눈이 온 세상에서 산책을 한 나를 기록한다.

하나하나가 다 움직이고 있는 면들이기 때문에 그래.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하나의 글이 하나의 글로 인해서 파생되는 일들이 이름을 비록 카테고리 안에 어느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부여했다. 이렇게 포함시켰다소 치더라도 하나가 아니야. 아니잖아? 그거에 가장 근접하다 라고 해서 넣어놓 걸 뿐이 넣어놓은 것일 뿐,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녹아 있잖아. 지금도 그래. 살아간다는 라는 말과 존재론이라는 말의 차이가 뭐라고. 궁극에의 와 뭐가 달라? 사실은 궁극에의와 뭐가 달라?살아간다라가 단지 지금 카테고리에 무엇을 할 것이냐, 어떻게 살 것이냐, 그리고 뭔가를 액션을 실제해. 세상 보기. 미래는 어떨 것이냐? 앞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될 것이냐? 나는 도움닫기처럼 세상 보기를 넣어놨고, 원래 미래탐구였잖아.

자, 그렇다면 궁극에의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게 뭐냐? 도달하고자 하는 게 뭐냐?

끝에 도달하는 것. 도달하기 위한 것. 그렇지만 끝이 어딨냐고? 끝이. 그러니까 지금처럼 궁극에의 라는 언어. 단어를 쓰는 순간 지향점이 생겨서 지금 이렇게 하고 있잖아. 기록하고 반복하고 끊임없이 탐구하고 의지를 불사르고 여기에 부유함이나 돈, 먹고 마시고 즐기고 가족과 어울리고 하는 것들은 원동력. 삶 자체가 돼. 내가 죽을 때는 가족만 한 게 없드라 라는 말을 해. 그건 당연한 거지.

아니, 그때 상상을 할 수 있겠어? 더한 상상을 위해서, 긴 영면. 잠을 자는 그리고 재탄생을 위해서 터널을 통과하는, 넘어가는, 숨이 넘어가는 과정을 겪을 수는 있겠지. 끊김이 아닌 이어짐으로 본다. 다시 기록하기 위해선 포맷이 필요하다. 일상을, 일생이 그러니까, 나라는 매체가 신적 혹은 신의 어떤 자손,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다르지 않다 라는 개념이 여기에 또 들어오는 거잖아. 나는 예수가 아니야. 그렇지만 예수일 수가 있지. 내가 이 우주 안에 티끌이잖아?
근데 이 우주 안에 티끌인데 나는 그럼 우주가 아니야?

우주에 속해 있지 않아? 우주가 아니냐고? 우주지. 내가 우주가 아니지만, 난 우주 안에 있잖아. 그런 개념 차이가 아닐까?

거대한 우주를 팽창하는 우주를 엄청나게 크다라고 봐서 나는 티끌. 알갱이라고 표현했잖아. 하지만 우주를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하다 라고 바라보고, 여전히 그 상태에 있다라고 본다면 나는 점 하나보다 크잖아. 지금 내가 점을 찍을 수 있잖아. 그냥 단지 그런 관점 차이로 볼 때.

이렇게 불사르면 쉬어야 한다. 어딘가에 닿겠지 닿는 순간 또 다시 노력하겠지. 열정을 불사르겠지. 그것이 단지 사람이 필요를 위해서 만든 제도권 내 사람이 살아가는데 먹고 사는 데 있어서 필요하다고 만든 돈에 너무 구애되지 말아라. 재미. 재미를 찾는 어떤 즐거움을 위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 바탕. 토대로 삼을 뿐이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안 된다. 그 생각을 바꾸지 못하면 살아 뭐하나. 살아 뭐해 라는 말이 나오기 마련. 안에 이뤄 놓은 것들이 거대한 부. 거대한 부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커넥션이나 연결된 네트웍, 그리고 나아가는 힘의 원천에서의 역할이라. 그러니까 역할 속에서 본인이 얼마만큼의 보람과 힘, 재미 그런 것들을 찾았느냐? 거기에 의를 두자. 그런 면에서 내가 일으킬 어떤 기업이거나 재벌이라고 하자 이거야.
무용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충분히 유용하메, 거기를 쫓아 정작 내가 원하는 바, 왜 하느냐?
우주가 왜 탄생했느냐 라는 탄생론적인 근원을 파고들자라는 개념은 아니야. 그렇지만 노력의 점은 그쪽으로 향한다 이 말이다. 그 말을 하고 싶다 이거야.

잠깐, 차를 세우고 사무실에 들어왔다. 난방기들을 다 틀고, 지금 뭔가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가 뒤에서 나는데 뭔진 모르겠고, 하 자 다음에 또 할 게 있어야 재미있는 거 아니겠어? 다음에 찾을 건 뭐겠어?

나아가는 거. 그래. 왜 그러느냐라는 게 아니라, 그래서 내가 원하는 건 뭐냐? 자, 좀 더 봅시다. See U. 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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