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兆 투입 R&D, 열매가 없다
동아일보 2015.2.23
GDP 대비 투자액 세계1위인데도 성과못내 누적 기술무역적자 41兆
“기관들 연구비만 눈독, 개발 소홀”
한국의 원자력 안전기술은 2010년 세계 최고 수준보다 4.7년 뒤처져 있었지만 2년 뒤인 2012년에는 이 격차가 7.8년으로 벌어졌다. 정부가 원자력 연구개발(R&D) 예산을 2010년 2824억 원에서 2012년 3580억 원으로 27% 늘렸지만 기술력 차이가 더 커진 것이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원전 선진국들이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 관리 및 안전기술 쪽으로 R&D의 방향을 틀었지만 한국은 기존에 해오던 각종 사업을 유지하는 데 매달리다 기술 격차가 벌어졌다고 평가했다.
역대 정부가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을 키우기 위해 매년 R&D 투자를 늘려 왔지만 제대로 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2일 동아일보 취재팀이 2006년부터 올해까지 진행된 정부 R&D 사업을 전수 조사한 결과 10년간 정부가 R&D에 투입한 재정은 140조5000억 원이었다. 그 사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R&D 규모는 세계 1위, 국가 예산에서 R&D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 2위로 올라섰지만 2006∼2013년 특허권 등 기술무역수지에서 375억5000만 달러(약 41조5000억 원)의 누적 적자가 발생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이뤄지는 국가 R&D 투자의 악순환을 끊지 않으면 박근혜 정부가 강조하는 창조경제도 제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2002년 한국형 고속열차 기술 개발 이후 대규모 R&D 예산이 투입된 분야에서 국민이 기억하는 뚜렷한 성과는 드물다. 이와 관련해 R&D 예산을 받는 공공기관들이 ‘연구비 타내기’에만 집중할 뿐 상용화처럼 국가경제에 실질적 도움이 될 성과를 내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정부는 누차 R&D 투자의 효율성을 제고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박희재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는 “연구과제 수립, 기획 단계부터 사업성, 시장성 중심으로 평가하는 방식으로 R&D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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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비 따낼 만큼만’ 논문 쓰면 끝… 사업화 추진 7%뿐
동아일보 2015.2.23
[140조원 쏟아붓고 열매 없는 R&D]나랏돈 축내는 공공연구기관
에너지기술연구원은 2011년 3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9억 원의 국가 연구개발(R&D) 사업비를 받아 발전소나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흰 연기를 줄이는 기술을 연구했다. 이 기술을 개발하려면 각 사업장의 굴뚝에 연기 저감장치를 설치해 연기가 줄어드는 정도를 반복적으로 측정해야 한다. 하지만 연구원은 당초 사업계획서와 달리 주로 실험실에서 테스트를 했다. 또 발주처인 지역난방공사는 지금도 이 기술을 현장에 적용하지 않고 있다. 돈을 주고 연구를 주문한 공공기관이나 실제 연구한 곳 모두 나랏돈을 연기처럼 날려 버린 셈이다.
사상 최대 규모의 정부 R&D 예산이 투입되고 있는데도 반복되는 초라한 성과는 ‘연구비 지원 대상으로 선정만 되면 그만’이라는 연구기관들의 안일함과 실패를 우려해 사업화를 외면하는 공공기관의 보신주의가 낳은 결과다. 이런 식으로는 정부 R&D 사업이 ‘국민의 세금만 먹는 하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 ‘논문 기술자’ 된 정부출연연구소
정부 R&D는 △정부가 연구 주제를 기획해 이를 연구기관에 위탁하는 하향식 지원 △연구기관들이 신청한 연구 주제들 중 일부를 지원 대상으로 선정하는 상향식 지원 △연구기관에 연구비를 먼저 주고 알아서 연구하도록 하는 총액지원 방식 등으로 추진된다.
하향식 지원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가지는 연구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지원 방식이어서 창의적 연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고위험 고가치 연구 활성화를 위한 연구개발 부문의 개혁의제’ 보고서에서 3가지 지원 방식 모두 사실상 정부 통제 아래 있다고 분석했다. 각 부처의 관련 공무원 몇몇이 연구사업을 발주하고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원하는 연구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다음번 지원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구조여서 연구자들에게는 결과물 자체가 ‘족쇄’가 된다.
이런 관(官) 주도의 R&D 지원 체계하에서 연구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건 논문 발표 건수다. 특히 미국의 톰슨로이터사가 개발한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 ‘SCI’에 등재돼 있는 저명 저널에 몇 편의 논문을 실었는지가 연구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핵심 잣대다. 2011∼2013년 21개 공공기관의 박사들이 SCI급 저널을 포함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은 2595건이나 됐지만 이 중 사업화가 추진된 건수는 6.9%인 179건에 그쳤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은 없는 것이다.
정부출연연구소가 논문 발표 건수에 집착하면서 연구 과제를 따내고, 논문을 작성하는 데만 능숙한 연구자들이 양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민간의 부족한 연구 역량을 보완했던 출연연구소들이 최근에는 기초연구와 사업화 중 어느 쪽에서도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국책연구원의 A 연구위원은 “논문 건수를 중시하다 보니 많이 알려진 주제를 토대로 쉽게 연구하려는 경향이 강해졌고 한 논문을 2, 3개로 쪼개 쓰는 부작용까지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2013년 말 기준 산업통상자원부가 지원한 R&D 사업의 특허 출원 건수 대비 우수 특허비율은 3.6%에 머물고 있다. 2012년 기준 국내 정부출연연구기관의 R&D 생산성(투자비 대비 기술료 수입)은 2.89%로 미국(2010년 기준 10.73%)의 3분의 1 수준이다. R&D를 통해 기존 연구를 완전히 뛰어넘는 성과물을 만들어 내 미래 성장 동력을 키우기에 역부족이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연구 성과보다 연구비에 관심
연구기관과 대학들은 장기적 안목의 연구를 토대로 기술 수준을 높이려 하기보다 눈앞의 R&D 사업비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연구과제 입찰 과정에서 각종 편법과 비리가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한국수력원자력은 2011년 10월 3억6000만 원짜리 용역과제를 미리 점찍어 둔 A대학에 주려고 편법을 동원하다 감사원에 적발됐다. A대학 이외에 용역제안서를 내는 곳이 없어 입찰 자체가 무산되려 하자 다른 대학 관계자에게 허위로 입찰에 참여토록 해 형식상 경쟁 입찰이 되도록 한 뒤 계획대로 A대학을 낙찰자로 정한 것이다.
정부 R&D 평가가 요식행위에 그치는 점도 문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0년부터 3년간 실시한 468건의 연구과제에 대해 대부분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미흡하다’는 평가는 한 건도 없었다. 다른 부처도 연구과제 평가에 대체로 관대했다. 연구과제가 현장에 적용되고 있는지 면밀히 검증하는 ‘실용화 수준 평가’를 실시한 부처는 없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논문 편수보다 질을 중시하도록 연구과제 선정 기준을 바꿔야 할 뿐 아니라 ‘성장 가능성’이 높은 업종에 R&D 예산을 집중적으로 투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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