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현의 경우, 메타버스의 현실의 재구성이라는 측면에 주목했다.[11] 「메타버스 내 게임형 가상세계와 생활형 가상세계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그는 『웹 2.0의 경제학』에서 메타버스를 "기존의 현실 공간이었던 현실계(도구로서의 가상공간)와 현실의 것을 가상세계로 흡수한 것이었던 이상계(현실의 모사공간), 그리고 현실과 다른 상상력에 의한 대안의 가상현실인 환상계(인간의 환상과 욕망이 표출되는 공간)가 융합된 공간"이라 정의했다.[
헐, 이는 이미 이야기 했던 생각, 잠, 상상을 돌려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메타버스는 곧 정신세계를 말하며 육체가 아닌 잠이나 정신으로 접속가능한 세계를 잊지않는 서로 소통하는 세계로 구축한 것이다.
무한히 확장될 정신세계는 생각이나 잠을 통한 꿈 이상의 상상에 의한 생성, 연결, 확장을 나타내 마치 현실에서의 우주 개척과 유사한 패턴을 그린다. 즉, 현실에서 미지의 우주세계에 맞닿을 수록 정신세계 또한 미지의 세계 혹은 흔히 차원이라 불리는 경계를 뛰어넘어 현실과 조우한다. 연결되고 확장을 가속화 한다.
현실과 정신세계의 경계가 모호해진 세상, 현실에서의 육체적 에너지 공급이나 실물자산은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는 기록으로서 공유하고 정신세계에서 느끼는 모호함이 점차 뚜렷히 느끼게 될 수록 인류는 그 느낌에 집중하여 정신세계에 접속한 생각, 꿈, 상상이 펼치는 모험, 어떤 것도 실현가능한, 상상이 곧 현실이 되는 회차 인생에 시간을 보낸다.
시간은 현실과 다르게 적용가능한데 이 조차 흘러가는 걸 멈추는 것은 아니기에 생각, 꿈, 상상을 가속화하는 기술 개발에 초점을 두어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
공간은 곧 우주에 진출하는 순간 그 어떤 맞닥드릴 환경이 모두 가능한, 다시말해 상상이 곧 현실이 되는 순간을 만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현실의 확장판이 우주개척이라면 우주를 살짝 베껴 잘라낸 차원도약은 정신세계에서 더이상 신선하지 못한, 그저 현실에 구현된 기술로 여겨지고 정신세계의 무한한 확장은 우주개척의 진의와 맞춰지는 순간까지는 참으로 많은 경험이 축쥑될 것이다.
현실에서 체험은 정신세계에서 기록된 경험이며 인류의 바람은 어쩌면 더 자극적이고 더 구체적이며 더 환상적인 세상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흘러갈 텐데 사실 이 모든 일련의 체험과 경험은 새롭게 쌓이는, 그저 상상이 곧 현실이되는 체험 수준에 도달하기 까지 계속 될 것이고 상상에 의한, 접속이 생각의 몰입에 의하든, 잠을 통한 통제가 쉽지않지만 내면의 변수가 무척 큰 꿈에 의하든, 상상은 곧 김국현이 말한 환상계의 표출로 인한 자극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체험이나 경험은 무념무상에서의 세계까지 반영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현실에서의 우주개척이나 상상으로 만든 환상계든 직접 혹은 살아있다고 느끼게 되는 체험과 경험 만큼 무념무상이 현실과 정신세계의 구현된 세상과 균형을 맞추려 할 것이다.
길고 긴 시간이 지나 상상이 곧 실제와 같이, 죽음이 아닌 회차인생을 살 듯이 현실이든 정신세계이든 삶은 어느 곳이든 체험과 경험이 가능한 남들이 만든 세상을 탐험하든 자신만의 세상을 죽을 때까지 대를 물려 구축하든 그 확장성이 곧 인류의 탄생배경이라고 모두가 공감하는 그 때, 어쩌면 육체는 정신체로 거듭나서 살아있음을 기록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든 갈등 너머 현실에서의 죽음조차 신성시 되는 그때, 죽음과 삶의 경계조차 모호해진 때 생명에 대한 재정의가 된 때 과연 인류가 탄생하여 그때까지 다다른 마치 신의 영역에서 신이 된 듯한 공간에서 재창조, 윤회, 회귀, 관조, 개입, 체험, 기록되는 아바타를 관망하는 그때, 드래곤이 유희를 떠나듯 나는 유희야 말로 지금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라 여기며 무념무상이 쉬이 도달하기 어려운 유리알 유희가 우리네 모습으로 보며 욕망과 집착은 결국 이루어낼 것임은 분명한데 과연 바라던 바인지는 인류의 진화가 정신체 혹은 전자기체인지 혹은 체험을 통한 수없이 다른 변수의 총집합인지 그것도 아니면 무념무상함 그 자체인지 도달해봐야 알 터이다.
현자나 영웅은 필요에 의해 탄생하듯이 재벌과 수많은 선각자, 위대한 으로 추앙된 인물은 앞으로 기술의 개발이라는 결국 기술이 정신세계를 구현한 세상에 도달했다.
기술의 지향은 인류의 탄생과 그 지향이 향하는 걸 하는 도구. 맞닿은 정신세계는 메타버스를 타고 모험이라는 긴장감을 통해 다시 한 번 떠난다.
멈출 수 없다.
죽음조차 사라진 다면, 멈출 수 없이 일한다. 원하든 원하지않든.
이제 그 조차 경계를 깨려하는 지금, 과연 행복하다는 건 홀로 주변을 본 지극히 만족한 마음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거꾸로 보아 멈출 수 없다면 그건 잊고 그저 쉼없이 일하는 기계처럼 조금나은 기술로 입은 인류라는 기계가 조금더 자신을 위하도록 무념무상을 통해 위안을 얻자.
내 할 일이 변기에 앉아 두드리는 모습이라니.
과연 알까?
뭐에 환호성을 질러야 할까?
아니 같이 갈 수도 없이 떠밀린다.
스스로 움직이고 알아서 하는 세상에서 상상이든 꿈이든 열심히 확장한 정신세계에서 기록될 경험들, 시간조차 알뜰하게 쓸테고 이조차 주어지게 되니 뭐가 다를까?
만든 이조차
만들 이조차
만들었던 이조차
결국 도달해야 할 그 곳이 아니라
결국 답은 지금 그저 받아들이고 즐기는 것 뿐.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그저 유리알 유희를 즐기는 것이라는.
돌고돌아 수없이 고뇌했던 시간들이 오늘에 이르러 과거 읽었던 헤르만헤세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삶이 그렇다. 우연처럼.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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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自`2021.12.15 14:06
우연처럼, 뜻밖의, 생각지도 못한 반가움이 일상의 반복을 벗어날 대안이 될까?
우연에 기대야 하나?
살아간다는 건 우연이든 뜻밖이든 의도했든 아니든 본 것과 느낀 것을 체감한다는 것이다.
멀리 보아 세상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 그 방식이 어찌 되었든 인류의 목적은 체감하는 것.
그리고 축적하는 것. 나아간다는 건 기술의 진보나 발전이라기 보다는 체감을 극대화하는 방향.
하나씩 알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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