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10.1. 축산물등급판정소에 입사했다. 입사를 위해 충남대학교 농대도서관을 수시로 방문하여 법령집, 문제집을 찾아 본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도움을 구할 이가 없었다. 자료를 모아 분류하여 차곡차곡 익혔다. 다만 이 준비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 컸다. 다행스럽게도 식육학 문제집이 개중에 하나 잡혔었고 이를 풀어본 게 입사시험을 치루는데 무척 도움이 되었다고 기억한다. 그러게 왜 도대체 수의학과 사무실로 추천서가 왔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리송한 의문이 남는다. 이때 입사시험은 대학교의 추천이 있어야 했고 주로 축산 관련학과로 향하기 마련인데 때마침 2장의 추천서가 왔고 그중 1장을 동기가 가져와서 내게 연락했다. 참으로 인연이 무섭다. 추천서가 오고 수의학과 사무실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받아오고 그걸 또 기회라 여기고 받아다가 홀로 공부해서 합격했다는 건 지금 봐도 지나치게 우연적이고 어찌보면 필연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수의사가 입사했다고 별종으로 취급받는다. 그래서 언제 그만둘꺼냐는 질문은 더 이상 낳설지 않았다. 3년, 5년을 너머 아이 둘이 생겼음에도 동문은 심심찮게 격려와 함께 거리를 둔다. 내게 그만둘 거냐고 물어본 이들 중 대부분은 때이른 퇴사를 했다. 그리고 난 남아있다.
인정은 받았다. 넌 우리와 다르게 스마트하잖아 하면서 기본 이상으로 대해준다. 난 지금도 식육을 잘 알다가도 몰라서 아이디조차 meatmaster 임을 지향점으로 삼아 노력하고 있음을 볼 때 어쩌면 기대 이상의 대함이 지금의 나를 만들지 않았나 조심스레 확신한다.
따까리. 일명 서포터로서 농림부 일을 도왔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그렇게 보았고 그렇게 대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현장에서 8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등급판정한 일은 본원에 올라와 규격개발팀, 전략기획팀, 성과팀, 인사팀을 두루 거치면서 농림정책 우선주의는 뿌리를 깊이 내렸다. 혁신기획팀에 올라와 1년이 지나지 않은 때 너가 필요하다는 말 없이 보내게 되서 미안하다며 규격개발팀에 가서 열심히 따까리, 일명 서포터로서 협력한 일은 지금도 이후 지금까지 인생을 좌우한 1년 남짓한 시기였다.
일본은 방어했는데 우린 왜 왜 이렇게 밖에 안 되냐는 최원장님의 경험에서 비롯된 SRM방어를 위한 축산물유통시장 파악하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찾고 검증하는 일이 일상인 내게 사실상 정보를 모아 - 흔히 집대성이라 표현한다 - 일목요연하게 보여 달라는 주문은 쉽게 다가왔다. 오히려 기획과 설계 다음인 조사단계에서 엄청난 저항감을 맞이해서 인력이 아닌 전산으로 대체하기 위해 이중고를 겪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모든 인과관계에 이유가 있구나 싶다.
'한국의 축산물 유통'은 그래서 감히 말한다. 내 인생 첫 작품이라고.
아니 왜 답변을 못 하나요? 그래서 간접비가 어찌 200만원으로 모든 경로가 동일할 수가 있나요? 라는 물음에 누군가는 답변을 못했다. 뿔난 사무관은 너가 해보라며 힘을 실어준다. 그래서 탄생한 두번째 인생작은 '축산물 유통실태'이다.
축산물 유통을 집대성 했으며, 유통실태를 꾀뚫어 볼 수 있도록 한 사람. 그래서 난 졸업후 처음으로 충남대학교 은사님을 찿아뵙고 2권을 드렸다. 의미를 담아. 그런데 안타까움을 표하신다. 자기가 그때 잡아 돌려세웠어야 하는데 하며.
교수님, 요건 제 부족한 지식을 채우기 위해 배운 '축산물 경매시장 이해관계자의 의향조사'라는 경매시장을 손 볼 필요가 있음을 연구한 논문입니다 라고 말했지만, 그저 2권 위에 포개질 뿐이었다.
난 도대체 정체가 뭘까?
직장에선 별종이요, 수의학계에선 돌연변이요, 축산유통업에선 나름 인지도가 있음에도 충주에서 태평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난 도대체 정체가 뭐냐?
수의사도 아닌 것이 장롱면허를 갖고 있고, 업계에선 그저그런 획을 긋고 산 한 사람일 뿐이며, 나이 50이 다가오니 아쉬울 것 없이 미련을 끊어내려 하는 지금, 과연 난 도대체 정체가 뭘까?
우연이든 필연이든 뜻밖의 추천서 1장이 잘못 배달되어 출발하여 축산물 유통을 파악해냈든 멀지않은 미래 축산이 고통받을 걸 알게 된 지금, 난 그 무엇도 아니다. 그저 기존 축산이 한 방에 나가 떨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는 석유를 대체하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축산도 각자도생 말고 늦지않게 아람코처럼 대체투자를 하길 바랄 뿐.
소주 1병이 글을 써내려감에 안주 없이 녹아사라진다. 그래서 넌 정체가 뭐냐? 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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