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
맞춰 나온 듯 한데, 어슬렁 어슬렁 돌아오는 그. 6시라면 내가 이해를 하더라도 (벌써 산책한 후 돌아오는 걸까?). 그리고 거리에 떨어진 낙엽을 솔질하는 그. 이제 시작했겠거니 하는 위치. 오늘 따라 해나는 자꾸자꾸 멈칫거리며 멈춘다. 아래 계단으로 회피하지 않고 "뭐 어때?" 하는 마음으로 쭉 뻗은 길로 나아간다. (피하지 않는 마음에 대하여) 어쩌면 다른 사연이 있겠거니 하며 그 사연이 이어 이어져 내게 닿는다고 하더라도 반가운 인사만 할까. (그러니 피하지 말자며 쭉 걸어간다)
(그들을 스쳐 보낸 후 하천변에 내려오니)
어슬렁 길 건너편으로 가고 있는 고양이를 보며,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빵~ 하는 경적소리에 뒤돌아 보게 되니 횡단보도의 정 가운데 남녀 커플이 서 있었다. 남자는 전동기를 타고 있었고 여자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한 가득 봉지를 안고 있는 걸 보니 출출 했던 모양. 그리고 지나가는 대형 버스와 승용차. 좋을때다 하는 감정과 조심했어야지 하는 안도감.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나도 저때가 있었는데. 나도 실수할 때가 있었고, 나도 출출할 때, 혹은 하루종일 그녀와 붙어 있으면서 그 자체로 행복했었던, 다른 것에 눈이 돌아가지 않는 오직 그녀만 바라보는 시간이 있었음을 기억해낸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다를까. 그런데 지금은 둘이 함께 하는 시간 보다 함께 할 다른 장소, 다른 시간을 고르는데 바쁘다. 아마도 아이를 낳기 시작하면서 부터 관심을 너와 나가 아니라 다른 쪽으로 돌렸기 때문일까.
새벽에 나오는 산책길, 이어지는 독백(원문 소리). https://youtu.be/TwDNfeTLMOQ
그리고 오늘은 참 잘했다 스스로에게 칭찬하는 것. 해나의 멈칫거리며 멈추는 것에 화가 올라오다가도 기다리는게 정답이지 하며, 혹시나 해서 엉덩이 쪽을 쓸어 낙엽이 묻었는지 확인한다. 다시 멈칫, 멈추고 세 번 네 번 어느 순간 간격을 좁힌다. 목을 채기도 하고 줄을 짧게 잡고 얼릉 가자고 바삐 걸음을 놀리기도 하고 일종의 밀당이랄까. 마냥 기다릴 수는 없고 기다리느니데 지치고 기다리다보면 화가 날테고, 그러면서 드는 생각. 얘가 산책을 싫어하는 걸까? 그냥 집으로 들여보낼까? 이런 조치가 다시금 해나에게 멈칫멈칫 멈추는 행위를 멈추게 할까? 뭔가 연결고리가 이상타 드는데, 그러니까 이상한 연속의 고리. 내 스스로를 먼저 챙기는 앞선 마음에. 우선, 오늘은 기다리는 걸 주로 했고, 줄을 짧게 잡고 강하게 가자며 이끈게 주효했지 않았을까. 잠시의 휴식, 근데 말이야 이놈들이 새벽 2시반? 2시 42분이라고 기억나. 자꾸 짖는 소리가 났다는 거지. 일어날까 말까 망설이다가 나가보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나갈까 말까를 많이 고민했기 때문이었을까? '볼 일'을 보는 거지. "짖으면 되겠니?", "어! 이 새벽에". 그러면서 예티야, 짖지마. 그렇게 반기는 아이들을 외면했다고 봐야 하겠다. 아무 생각없이 볼 일만 보고 들어와 누워서 이런 생각을 한 거지. 헐. 다시 나가야 돼? 아니지. 그래도. 다시 잠들기를 시도하고 머리속은 멤멤멤 돌고돌아..
그렇게 눈을 다시 뜨니 4시 58분. 얼릉 알람을 멈추고 (아내가 깨지 않도록), 일어날 체비를 하고. 그리고나서 일어난 일들. 횡단보도 커플의 예처럼
"해나,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우리 셋은 오늘도 달렸다.
(한 참 달린 후에)
"좋아? 해나, 좋아? 예티, 좋아?"
"좋아가 뛰어로 들려? 아니, 뛰어가 좋아로 들려?"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어디든 주의하고 편한 길이 있고 다소 위험하지만 주의할 길이 있는 것처럼. 사념들, 생각들, 성공이라는 바람, 명예로운 자리, 휘두르는 권력, 그리고 사람 관계. 지금도 짜여진 것으로부터 별반 다를 것 없이 속해 있지만, 마음만은 얽매이지 않기로 한다. 어젯밤에 11월에 놓치기 아쉬운 곳이 카톡 메시지로 와 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서 말이 끊긴다.)
"해나, 시원해? 예티, 시원해?"
"정말 좋다. 좋아. 좋지?"
해나를 보며 멈칫거리지 않기를. 예티를 보며 짓지 않기를. 그리고 나를 보며 그러지 말기를.
서희의 눈에 비친 나는, 믿음직스럽고 듬직하면서 꾸준하며 점점 부드러워 지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삐죽삐죽 돌출된, 아픔, 실력, 야망, 꿈, 기억, 희망, 바라고 바라는 것을 계속 깍고 깍아내는 그 것. 그리고 글쓰기를 좋아한다. 꾸미고 만드는, 이야기를 하고, 혹은 이야기를 바라보고, 혹은 이야기를 수집하고, 혹은 이야기를 경험하고, 꾸미고 갖은 도구를 사용하여 나타낸다.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도록. 한 때 그런 생각을 했지? 영화감독이라. 어쩌면 내가 하는 일의 정점이 영화감독이지 않을까. 근데 문득 같이 따라오더란 말이지. 그건 페이크. 감동을 줄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쩔수없이 사람들에게 뭔가 주려는 순간, 나타내려고 하는 순간, 뭔가를 보여주려는 생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섞여들어가는 각색, 각본, 편집. 물론, 그게 어디냐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걸 위해 평생을 노력하고 싶니? 라는 질문을 내게 던졌지. 그랬더니 그 정점에 있던 영화감독이라는 어떤 자리가 빛이 바래더란 말이야. 그러니까 치고박는 그 상념 속에 어떤게 남겠어? 이도저도 아닌, 그러니까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건 어찌저찌 했든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 밖에 없더라. 그걸 뼈저리게 느끼든, 아니면 혹은 하나씩 빼어내든 그게 어디냐 하는 생각만 바꾼다면 답은 하나로 이어진다. 연연하지 않는다. 미련을 버린다. 어떤 이런 말들도 반대로 본다면 미련을 갖고 있고 연연하고 있고 뭐 그런 거지. 그럼에도 꾸준히 되내이고 얘기하는 건 나의 정체성, 나의 바른 삶. 거짓을 거짓이라 하고 본 것만이 진실로 믿지 않고, 여기는 생각과 사고방식 또한 짜여진 판에 드는 자연스런 공식처럼 느낀다 라는 어떤 리얼, 살아있다라는 건 1 더하기 1은 2 라고 정하는 것이 아닌, 공백이어도 좋은, ,https://meatmarketing.tistory.com/4972 어쩌면 답을 내지 않고 답을 구하지 않으려는, 그런 의지나 거기에서 오는 느낌, 감정이 아닐까. 참으로 느끼기 어렵고 얻기가 힘든, 왜냐하면 본능처럼 기계처럼 톱니바퀴 속에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녹아서 돌아가니까.
봐봐. 지금도. 똥봉투는 일반쓰레기. 봉투가 있는 저 곳에 버려야 해. 편안함을 좇고 좇다보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잖아. 찾지 않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다른 맛을 볼 수 없다는 거지. 그래 좋아. See U.
"출근 중이다."
또 하나의 숙제. https://youtu.be/7zN2ruUzXtA
어차피 상념에 빠져있다면, 사뭇 다르긴 해. 상념에 빠져있을 때 생각들이 다시 입을 통해 나올 때는 조금 걸러진다고 해야할까?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생각 보다는 어떤 짜임새 있게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게 되지. 아마도, 배우고 익혀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 물론, 상념들은 감정, 혹은 감각에 가깝다고 봐야 할테고. 어찌되었든 지금 운전하는데 졸려. 그러니 졸린 상태로 운전해도 좋다만 그래도 안개가 자욱한, 다행스럽게도 도로 위에는 안개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길을 가면서 기꺼이 녹음어플을 켜게 된다. (만두를 먼저 먹었기 때문에 식는 걸 안타까워 하지 않아도 된다.)
뭘 그렇게 원하고, 뭘 그렇게 바랄까.
코가 자꾸 막히고, 쌕 쌕 소리가 나고, 양압기 호스에서 나오는 냄새가 살짝 불쾌해질 때는 내부를 세척해야 한다는 생각 보단 그 현실에 살짝 우울해지지.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 어디야 할 수 있겠고, 어제도 막상 계족산에 가는데 가니 올라가지더란 말이지. 가기 전에는 뭔가 핑계로 밍기적 밍기적 했는데 (물론 시도는 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정하라고 미루었을 뿐), 그 속 마음은 집에서 따스한 햇살 아래 즐겨도 좋겠다는 감정이 컸지. 그렇지만 그 전주에도 그랬고, 그 마음이 미안했던 건지. 아니면, 당신 말에 전적으로 따르리다 하는 실천의 연속 선상에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갔지.
가서 주차하느라고 이리저리 찾아 헤매고, 그러면서 잊어버리는 거야. 뭔가에 닥치면 내가 미루어 두었던 감정들, 그랬던 감정들이 없어지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든 주차하려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알아보고 해. 이건 해 나가는 쪽에선 좋게 바라봐야 하겠지. 근데, 하나의 해프닝으로 볼 만한, 오른쪽 눈이 파열? 눈의 반 정도가 시뻘겋게 되었어. 갔다와서 보니.
그렇다고 아니 갈꺼야? 가야지. 가야지. 안 가면 뭐 할껀데. 낮잠을 자도 좋겠다. 미련스럽고 곰탱이 짓을 한 것은 그거지. 당장 눈 앞에 닥친 소재들, 일들을 간과하고 있는 거지. 보아 넘긴다는 표현이 맞는 거 같은데 무수히 많은 어떤 것들, 그러니까 오늘 아침 이야기 했잖아. 전동기를 타고 무단횡단 하던 아이들 말이야. 20대. 빵 소리에 뒤돌아 보니 횡단보도의 가운데에 있었지. 그리고 여자 애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을 본 것이고. 저때는 참으로 참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알 길 없고, 뭘 알고 뭘 모르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뭘 알고 뭘 모를까? 그러니까 사실은 그거 보단 좀 지쳤다고 해야할까? 뭔가 켜켜이 쌓인 어떤 것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 잔재되어 쌓여있다고 볼 수 있겠어. 불이 활활 타오른 후에 잿더미가 남아있듯이, 후~ 하고 불면 날아가 버리고 말 그 잿더미들이 쌓여있는 느낌처럼. 그 나마 다행인 건 후 불어서 다시금 다시금 시작하려고 지금 이런 궁리 저런 궁리를 하고 있다는 거. 뭐든 하겠지. 뭐든 하고 있어. 단지, 테니스를 알아보러 가지 못했을 뿐이지. 그런 준비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고. 그리고 계족산에 갔고. 아마도, 무료하고 따분하고 재미없는 건 서희가 더 한 거겠지, 나 보다. 나는 그래도 일상을 살면서 변화가 있잖아. 직장에 갔다오고. 피곤해서 들어오고. 저녁을 어떤 식의 산책과 서희, 강아지들과 뭘할까 궁리하면서 보내고, 아이들의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고. 막내가 이제 교회를 가겠다. 가고 싶다고 말해서 주말 내내 가족회의가 이루어졌고, 영록이가 얘기를 잘 했지. 요령껏 굳이 소속되지 않아도 그쪽에 어울리는데 있어서 그냥 어울려도 좋지 않겠느냐. 찬찬히 생각해봐도 좋지 않겠느냐. 너에게 축구냐? 교회냐? 라고 했을 때 축구라고 했듯이. 그 안에서 미안함 감정들이 들겠지만 그 또한, 그러니까 누군가의 밀당들이 삶을 어딘가에 다니고 꾸준하면 일어난다는 거야 당연하니 그저 어쩌면 실리를 취해도 좋지 않을까. 그건 서로 마찬가지니까.
(포크레인을 싣고 가는 화물차를 앞지르기 하려고 한다.)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바라면서 원하면서 바라면서 하면서, 우리가 헷갈리는 건 과거를 짚어보고 반성을 하고 오늘을 돌아보며 다시금 하고, 또 하고, 앞으로 나아지겠지 라는 기대로 앞날에 대한 생각에 빠져 지내다보면 기대에 부풀고, 그런데 현실은 녹녹치 않아. 달라질 게 없는 것처럼. 그렇게 급변하진 않아. 그런데 어느 새 지나면 달라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거야. 그 달라져 있는 모습은 은연 중에 자기가 놓쳤던 소홀히 했던 열심히 했던 어떤 모습들이 얽히고 섥혀서 생성된다는 거지. 그 모습 그대로 자기가 거기에 대한 불안감만 없다면, 아쉽지만 않다면, 아쉬움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는다면, 이게 사실 답이지. 지금 내가 품고 있는 생각들이 답이야. 긴 긴 시간을 50을 살아오면서 거의 짜임새 있는 틀 속에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이 살아왔잖아. 해꼬지 하지 말고 착하게 살라 여기고 욕하지 말고 사람의 본성은 착한거야. 혹은, 어떤 그런 그래도 그렇지 않을까. 좋은 게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어떤 생각들이 좀 더 지배적이었다는 거지. 그 와중에 얽히섥히고 얽매이는 그런 관계가 조금 피곤한 거잖아. 그냥 좋을 때 만나고 헤어졌다가 생각날 때 만나고 하는 삶을 살았다고 봐. 후회? 아쉬움? 글쎄, 누군가의 끈끈한 그 집단의 어떤 어울림을 볼 때는 부러움이 있어. 솔직히. 그 안에 드는 자기를 좀 더 버리고 모임에 어울리고 위하고 위함을 받는, 위계질서 속에서 느끼는 집단의식. 나는 조금, 아웃라이어. 돌출된, 사뭇 다른. 지금이라고 다를까?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지금 보는 책에서 말하잖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태양인이 폐가 약하다고 했던가? 그런 체질로 타고 났으니 가능한 그 체질에 맞는, 굳이 혹사할 일이 아니라면 그냥 몸에 좋은 걸 먹으라는 거지. 충분히 납득가능하다. 그걸 연구했고 탐구해왔으며 무지하게 많은 시간 속에 축적된 산물이잖아. 우리는 그걸 너무 쉽게 생각하지. 당장 궁금한 건 나는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중에 뭘까? 불 같이 화가 치미니까 태양인 일까? 땀이 잘 나니까 태음인 일까? 그러니까 믿을만한, 아니 경험이 쌓인 특히 체질 관련해서 지식과 경험이 축적된 한의사를 찾아가는 게 맞다. 대체로 밀가루를 피해라 하는데 서양인도 이런 체질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때, 서양인이라고 다르겠어 라며 그들에게 밀가루를 피하라고 권하고 있을까? 아리송해. 아니, 어쩌면 서양인에겐 쌀을 피하라고 하려나? 그들은 밀가루를 먹고 그걸 주식으로 살아왔는데, 그래서 숙제가 뭐다. 각자의 체질을 살피고 그에 맞는 음식과 식습관을 실천하자. 오케이. See 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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