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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궁극에의

'인생은 왜 사느냐'

by 큰바위얼굴. 2024. 4. 14.


“거두절미하고, 누나의 질문은 궁극적으로 인생은 왜 사느냐는 거잖아. 맞지?”

“응.”

“그건 답이 없어.”

“책 박사님치고는 대답이 싱거운걸?”

현상은 본래 아무런 의미가 없어. 우리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야. 어떤 사람이 웃는 모습을 봤다고 치자. 그 사람은 정말 기뻐서 웃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상사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웃는 걸 수도 있어. 그것도 아니면 속으로는 울고 있을지도 모르지.”

“…….”

“즉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웃고 있다는 현상뿐이야. 해석은 각자의 몫이고.”

“그럼 윤성이 너는 왜 살아?”

“나?”

김윤성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누나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서.”

“으음… 뭔가 근본적인 대답이 아닌 것 같아.”

이수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모든 생물은 계속 살아가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어. 그 프로그램에 따라 사는 거지.”

“그것도 마음에 안 들어.”

“누나, 진지병이었네?”

그는 내시경이나 검사 결과를 확인한 의사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진지병이란 말 그대로 세상 모든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병이었다. 윤동주의 서시를 빌리자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깊은 뜻을 발견하려고, 고통스러워하는 병이었다.

“뭐야, 그게.”

그의 설명을 들은 이수연이 자지러졌다.

“이름을 장난스럽게 붙여서 그렇지, 무서운 병이야. 이게 잘못 깊어지면 허무주의에 빠져. 어떤 사람들은 자살까지 한다고.”

“진짜?”

“어떤 문제든 끝까지 파고들면 답이 없어.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여야 하는 영역이 와. 왜라는 질문이 끝나는 지점이라고 할까.”

“…….”

“그 끝에서도 왜를 붙잡고 있으면 골치 아파져. 거기서부터는 아까 말한 대로의 현상이니까. 진지한 성찰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해. 나한테 사는 게 뭐냐고 물어봐 줄래?”

김윤성의 말에 이수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는 게 무엇인가.

이는 박식한 철학자와 예술가의 말문을 막아 버리는 최고 난이도의 질문이었다. 김윤성이 그 질문에 벌써 해답을 가졌다는 게 놀라웠다.

그녀는 세상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윤성이 네게 산다는 건 뭐야?”

“한 번 들이마신 숨을 내뱉고, 뱉은 숨을 다시 들이마시는 거. 간단하지?”

“엄청 심플하네.”

“나는 단순한 게 진리라는 말을 좋아하거든. 삶이라는 거 너무 추상적이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잖아. 숨 쉬는 게 사는 거야. 반대로 숨을 못 쉬면 죽는 거고. 딱 이거면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끝이지. 안 그래?”

- 책 보고 가라 1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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