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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궁극에의

● (Guide) 정착이 일으킨 질병, 지루함과 한가함의 윤리학에 대한 동.반감. 그리고, 인류, 우주, 있게 된 존재의 도리와 없음에의 탐구

by 큰바위얼굴. 2024. 4. 14.

泰山不讓土壤 河海不擇細流

태산은 한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았기에

그 높이를 이룰 수 있고,

황하강과 황해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기에

그 넓음과 깊이를 이룰 수 있다.

 

'인생은 왜 사느냐' (tistory.com)

인간은 어차피 죽으니 그냥 살지 (tistory.com)

성호라는 남자 (tistory.com)

동뜰무렵 사진전 (tistory.com)

책보고가라 말미 - "작별은 항상 옳다" (tistory.com)

 

지금부터 며칠 '한가함'과 '지루함'에 대해 생각해보며 지낸 결과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우선, 밝혀둘 것은 책의 내용을 정리한다 라기 보다는 읽어가면서 저자의 주장에 공감을 표한 페이지를 추리되, 저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들게 된 의문을 나름 풀어보면서 향후 살아가는 방향을 설정함에 있어 자양분으로 삼고자 한다.

 

"괴로운 것은 힘들다. 그러나 자신을 어떤 행위로 몰아넣는 동기가 없다는 사실은 더욱 괴로운 법이다.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른다는 지루함의 괴로움. 그것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라면 외부에서 주는 부담과 괴로움 따위는 비할 바가 아니다.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이유를 부여받기 위해서라면 사람은 기꺼이 괴로움을 택한다."

삶을 살아가메 부딪히는 각종 사건과 사고들로부터 양산된 괴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건과 사고는 지루함의 괴로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기꺼이 택한 괴로움일 뿐. 전후관계를 명확히 하고 있다. 일상을 갈아넣는다 거나 일상에 푹 빠져 지낸다거나 하는 일련의 행위는 지루함의 괴로움에서 도망치기 위해 선택했다 라는 가설이다. 바로 그렇다. 한가함이나 지루함처럼 익숙한 조직생활과 사명감, 비전과 미션을 제1형식에 맞춰 왔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벗어났다가도 다시 상념이 일고 다시 반복됨을 볼 때 참으로 끈질기다 못해 지독함을 체감하고 있다. 익숙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인지, 익숙함 속에 바라던 바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조직 속에 진리라도 있는 양 미련을 부리는 건지, 그도 아니면 어차피 매한가지인 상황이니 이도저도 아니게 된 상황 자체가 못 마땅한 건지, 새로움에의 도전을 기꺼이 원하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함은 익숙치 못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러저러한 상념들이 몰아쳐서 평화를 깨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이 참으로 많아 선뜻 길고 긴 정리의 시간을 기꺼이 하겠노라 선택한 면에는 '정착'을 버림으로써 발생된 지루함에 대한 원인 분석이 참으로 명쾌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인류는 새로운 도전을 기피하게 되었을까?

아니, 다시 말하면 몇 몇의 일부 인류 외의 대부분 인류가 첵바퀴 돌듯한 일상에 익숙해져가면서 생각머리 자체를 잊어버리고, 노예화(?) 소비생활에 익숙해져 버렸을까? 이는 모두 선택에 따른 결과라고 말한다. 이동생활을 했을 때는 항시 긴장하거나 함께 해야만 한다는 강한 의념이 있기 때문에 생각을 끊임없이 했어야 했고, 그로인한 한가함이나 지루함은 없었다는 말. 결국, 여행자와 같이 머물렀고 떠나는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면 아마도 한가함이나 지루함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지루해 하는 인간은 괴로움과 부담을 추구한다. "

"우리들은 보통 정신적, 신체적인 부담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궁리하며 살아간다. 예를 들어, 오래 걸어서 피곤해지지 않으려면 자동차를 탄다. 그러나 지루하면, 혹은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일부러 부담과 괴로움을 찾는다. 힘들게 산을 걸어 오르고 땀에 흠뻑 젖어서 누가 거저 준다고 해도 반갑지 않은 토끼를 쫓는다. 다시 말해, 파스칼이 말하는 비참한 인간,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고 지루함을 견딜 수 없어서 기분 전환할 일을 찿고야 마는 사람은 괴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지루함의 반대는 쾌락이 아니다."

"지루함이란,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좌절된 상황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건이란 오늘을 어제와 구별해주는 것이다."

"사람은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같은 일이 반복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오늘을 어제와 구별해주는 일을 추구한다. 만약 오늘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똑같은 나날의 반복이 단절된다. 그러므로 사건을 바란다. 그러나 사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지루해진다. 사건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좌절된 상황이라는 지루함의 정의가 의미하는 상태가 된다."

"인간은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열중할 수 있는 기분 전환을 찾는다. 그리고 욕망이 향한 대상(토끼 사냥에서의 토끼)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원인(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욕망의 대상과는 별개인데도 말이다."

1. 토끼 사냥터로 향한 사냥꾼에게 중간에 토끼를 건낸다고 하자. 과연 그는 좋아할까? 라는 내용과 함께 살펴보자. 

2. 인간은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가설에 대해 인정할 것인지 의문을 품을 것인지에 따라 앞으로 전개의 향방이 달라진다. 인간은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있다 라는 가설을 세울 수만 있다면 한가함과 지루함이란 용어 자체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쉬워 보이진 않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있다 라는 방향성, 혹은 방의 범주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만하다고 여겨졌다. 방이 내가 머무는 1개의 방이 아니라 작게는 집, 좀 더 크게는 지역, 좀 더 한국, 지구, 태양계, 은하, 우주, 차원(측면, 면면)... '있음'으로 상태를 놓고 본다면 어떨까? 그저 (존재하고)있기 때문에 움직인다. 혹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소소한 움직임이 나비효과를 일으킨다손 치더라도 아주 미미하기 때문에 인간의 지루함 따위는 무시할 만 하다고 볼 수는 없을까? 가령, 아주 거대한 움직임, 예를 들어 은하의 생성과 소멸을 통한 우주의 팽창에 있어서 태양계 안의 지구, 지구 안의 한국, 한국 안의 세종시, 세종시 안의 도담동, 도담동 안의 아파트, 아파트 안의 방, 그리고 나의 움직임은 인간이 눈에 보이는 개미를 보거나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보는 것처럼, 혹은 이전에 몰랐던 것을 새롭게 발견한다거나 알게 되었다손 치더라도 이는 무척 미미하다 라는 걸, 그렇기 때문에 인간 따위의 지루함은 착각도 이런 착각이 아닐 수 없구나 하고 바라보고 있진 않을까 하는 관점 말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태어나 있게 된 것처럼, (우주 팽창처럼)  '없음'으로부터 발생한 '있음'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물적 화학적 작용 외에도, 감정, 이성, 정신, 혼과 같은 비물질적 작용까지도, 거기에 더해 휴식을 취할 잠이 들면 꿈의 작용까지도 알뜰살뜰 착취(?) 하기 위해 그냥 두고보아도 좋은 정도의 일이기에 용인되는 게 아닐까 하는. 이런 생각으로 지루함을 벗어나고자 기분전환을 꾀하고, 전환을 통해 괴로움이나 부담조차 감당한다는 논리전개는 모두 인간이 그 중심에 있다. 마치 천동설처럼.

인간은 부속이다. 

인간이 주체라는 생각 자체를 떼어놓고 바라봐야 향후 등장할 '동물 되기'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나마 살짝 걸쳐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면서도 공통된 바(결국 동물)를 함께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홀로 태어나지도, 홀로 존재하지 못 한다. 마치 모든 만물이 그러한 것처럼. 더구나, 인간은 중심이라기 보단 만물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속에 가깝다.

그래서 어렵다.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모를 만큼 한계도 없고, 기준도 없으며, 어떠한 선택조차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갈피를 잃기 일쑤다. 여기에 일상의 피곤과 회복, 감정이 덧붙은 삶에서 깊이 있는 통찰을 하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하게 되었고 하고 있으니 나는 단지 지루함과 한가함 속에서 앞으로의 향방을 정하고자 하는 것(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만이 아님을, 나의 존재 이유이자 곧 인류의 존재 이유, 없는 데서 있게 되었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기에 태생적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게 된 현 상황에 대해 어떤 결말을 맺을지라도 도전해보겠다 라는 의지로, 과연 기술의 진보가 우주개척을 이루어낸들, 또다른 형태의 텔레파시를 이루어낸들 세상 만물('우주 팽창'의 에너지원 = '있음'에의 생존욕구)이 한 편의 소설과 같다면... 물론 한 편의 드라마이자 여러 면의 차원 혹은 면면이 다른 평행우주라고 할지라도 그 어떤 상상 속의 쪼개진 삶의 편린을 떠올린다해도 그 근본, 그래서 뭐 할건데? 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기란 쉽지 않다.

'없음'으로부터 있게 되었다. (대전제)

이건 알겠다. '없음'을 모르니, 가히 상상조차 하기 쉽지 않으니 없다라는 걸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있음'으로 인해 수많은 변화가 생겼다. 앞으로 계속 일어난다. 이는 그저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뿐. 선악 개념이나 인과 관계의 개념은 아니다. 단지 느껴진다. 있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허투로 여기면 안 되겠다고. 하나 하나의 의미 없는 탄생은 없다. 누구도 어느 관전자도, 초월자도, 심지어 ('있음'으로 인해 생긴) 신조차도 주어진 기회가 있다. 우주 전체로 볼 때는 너무도 미약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여러 변수 중의 하나처럼, 나 또한 우주의 일개 하나의 먼지와 같은 부속품이긴 하겠지만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이러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마치, 당대에 못 풀어낸 것은 후대에 맡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다만, 성경이나 선각자의 말씀을 듣는데 일말의 거부감이 들었던 건 혹시나 그 속에 갖혀버릴지도 모르는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만큼 자유롭게 위기감과 긴장감을 넘나들고 있다. 무엇이 되건 무엇을 하건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더라도. 그저 있게 되었으니 있으면 된다.

아니하려고 해도, 가만 있으려고 해도 가만 두질 않는다. 

파스칼의 주장처럼 인간은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열중할 수 있는 기분 전환을 찾는다고 했는데, 왜 인간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가에 대해 인간의 본성, 혹은 정착을 버림으로 인한 태생적 한계로 문제를 풀고자 했으나, 그 이전에 인간의 본성을 중심에 둬야 했는지와 인간이 정착하기 전에 이동생활을 중심으로 정착함에 따라 변화된 성질로 풀어내려고 했으나, 과연 그 이전의 이전은 책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 중심 사상을 버려야 함을 앞서 말했으니, 인류의 이동생활이 정착생활로 바뀜에 따른 환경세계 변화 혹은 이동에서 그 지루함이나 한가함의 원류를 찾고자 하고 있으나 인간은 태생조차 본인의 의지로 택한 것이 아닐 뿐더러, 인간은 태생하는 순간부터 가만히 있거나 말거나 하는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못했다는 걸 인식하면 책이 풀어낸 인간 중심의 주장들이 덧없이 무너진다.

인간은 결코 세상 만물('우주' = '있음') 중심이 아니며, 그저 하나의 부속이다.

인간의 역할이 작다 크다의 문제가 아님은 알 것이다. 인간의 지루함은 인간이 가만있지 못하는데서 파생된 성질일 뿐, 크나큰 질병, 만병의 근원이 아니다. 괴로움의 근원조차 아니다. 태어나 가만 있지 못하는 우주처럼, 은하의 생성과 소멸, 별의 생성과 소멸, 생명체의 생성과 소멸, 이 모든 과정은 그저 태어나 가만 있지 못하는 숙명과 같이 있게 됨으로써 발생한 것일 뿐. 지루함 따위의 인간 감정에 치부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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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난 그저 누군가의 지시에 의한 것처럼, 그저 생각나는 대로 키보드를 두두린다. 당초 이런 생각으로 PC앞에 앉은 것 또한 아니다. 그저 막연하지만 어떤 실마리를 찾고자 바랐을 뿐인데. 도구로 용케 쓰이고 있음에 감사할 일로 보인다. 쉬이 피로해지고 뻐근한 몸은 아마도 용량 초과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머스크, 트럼프, 게이츠와 역할이 다를 뿐. 작디작은 먼지일 망정 이 모든 일상이 기록되어 관리되고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아마도 딸딸이 치는 자신을 매우 부끄러워 할지도 모를 일. 아무튼 처녀작이니 만큼 주장이 되었든 생각이든 뭐가 되었든 나올 것은 분명하다. 이로 인한 파장이 전 우주적이진 않더라도 우리네 삶이 조금은 겸손해지진 않을까 하는.)

이는 모두 "욕망이 향한 대상(토끼 사냥에서의 토끼)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원인(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욕망의 대상과는 별개인데도 말이다." 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욕망이 향한 대상과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은 별개다.

"스벤젠의 입장은 명확하다. 지루함이 사람들의 고민거리가 된 것은 낭만주의의 탓이다."

"낭만주의자는 보통 인생의 충실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래서 지루해진다. 인생의 충실함을 추구한다는 말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는 뜻이다."

지루함의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입장들을 가져온다. 그렇지만 역시 인간 중심이다. 모든 만물을 인간 중심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시초 또한 마치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었노라 하는 듯하다.

"우리는 낭만주의라는 병에 걸려서 존재하지도 않는 생의 의미와 충실함을 필사적으로 찾으려 하고, 그래서 심각한 지루함에 공격당하고 있다. 따라서 낭만주의를 버리면 된다."

"성경은 원죄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숙명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고뇌로 가득한 자신의 삶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석을 찾으려 했다. 인간은 이미 죄를 범했기에 땀 흘려 노동해야만 하고, 여성은 힘들여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식이다."

성경이 지닌 한계를 집어낸다. 아니, 어쩌면 성경을 통해 지루함이야말로 인간의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기라도 하라는 듯하다. 숙명이라, 만약 인간이 원죄를 지어 노동을 해야만 하고 아이를 낳아야만 한다면 노동과 출산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축복이 아닌 성사가 되어야 하리라. 이 또한 원죄 = 성사로 치유한다는 등식을 성립하려면, 원죄는 곧 노동이나 출산으로부터 지은 죄여야 한다. 태어난 죄, 곧 원죄는 태어난 죄를 뜻하는 듯하다. 태어났으니 평생 노동과 출산의 고통(?)을 반복하여라. 어쩌면 '있음'으로 된 숙명의 진실이 있게 된 순간 갖게된 할 일없어 한가하거나 지루한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서 가만히 있으려고 하는데서 오는 반작용은 아닐까!

있음으로 있어야 하는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으려고 하니 가만히 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차용된 개념이 인간에겐 한가함과 지루함은 아닐까! 마치, '없음'으로부터 '있음'이 태어났으니 움직여라 하는 듯이. 저자의 표현대로 한라면 파스칼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주장과 정반대 개념이다.

"인간은 유목생활을 영위해왔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대규모 사회를 구성하지도 않으며, 낮은 인구 밀도를 유지하고, 환경을 황폐화시키지 않은 채 수백만 년을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활양식이 크게 변했다. 인류가 한곳에 계속 머무르는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약 1만년 전의 일이다. 1만 년이라면 터무니없이 길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가령 한 세대를 20년이라 하면(즉, 평균적인 부모와 자식 사이의 연령차를 20세로 본다면) 1만 년은 500세대 전에 지나지 않는다."

"2족 보행을 하는 초기 인류는 늦어도 400만 년 전에는 출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인규의 역사 가운데 1만년 이란 어느 정도의 시간일까? 400만 년중 1만 년은 4미터 중의 1센티미터에 해당한다. 즉, 인류사의 시점에서 보면 인류가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사실, 본 글의 제목은 여기에서 탄생했다. 신박한 견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맞아. 인류가 유목생활을 버리고 정착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없던 병도 생긴 거구나 하는 생각을 저변에 두고 주장을 펼쳐 나간다. 중반까지. 그로인한 낭비사회가 아닌 소비사회를 지향하게 됨에 따라 더욱 더 무의식적 무개념적 생활로 인해 더 더욱 인류 태생적으로 본능적인 지루함 DNA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게 되었다는 논리. 맞다. 난 위로 받고 싶었나 보다. 나 만의 문제라고 여기지 않게 됨으로써 혹은 우리의 문제라는 인식으로 확장함으로써 지루함을 대하고 싶었나 보다. 난 환자야! 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목생활을 버리고 정착생활로 넘어와 없는 병도 생겼으니 한가함과 지루함을 극복하려면 다시 유목생활로 회귀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해법 마련에 빠진 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고심했더랐다. 그래, 여행자의 삶인 거여.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녀야 바짝 긴장하고 그럼으로써 재미를 느낄테고,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과 내몰림을 기대했었나 보다. 나를 외부요인 혹은 내적요인으로 내몰아서 일에 치중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지루함에서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래서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a, b, c.. 순서대로 이해를 넓혀가다가도 1+1= 2라는 등식과, 다시 거꾸로 A = B는 원래 같은 거였어 라거나 하는 식으로 뒤바뀌기 뿐만아니라 섞어쓰기, 합치기가 일쑤다. 동의하다가도 딱 맞아들지 않음에 반대하고, 반대하다가도 내 유리한 면에 대해서는 가져와 사용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임에도 일면 저자의 주장이 모두 틀렸다 거나 모두 옳다 라는 관념은 아니니 자유롭게 진행해 보자. 

"몇백만 년 동안 유목생활을 지속해왔다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마치, 유목생활을 했으니 하루하루가 긴장되어 재밌고 스펙터클 했을꺼야 하는 듯이 유목생활이야말로 지루할리가 없는 생활로 여기도록 전개한다. 몸이 찾은 안정을 정착이라고 한정지어야 할지, 정신 없이 바삐 돌아가는데 있어서의 휴게공간을 정착이라는 범주에 포함해야 할지, 정착을 해서 한가해졌다 라거나 안정을 찾으니 지루해졌다 라는 걸 바탕에 두게 한다. 그렇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 나아가는 건 단지 정착이나 안정이라는 말로 대변할 수는 없다고 본다. 정착이나 안정이 태동하게 된 배경에는 생존욕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 살아가려 하니 필요해진 수많은 것들을 알아야 했고, 사용해야 하며, 그로인한 쉼터가 생겼을 뿐 바뀐 건 야생이냐 도시정글이냐의 차이일 뿐, 인간과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면면이 더더욱 얽히섥혀 들어가게 되었으니 그 긴장되어 재밌고 스펙터클함은 단지 유목생활이 아니니까 라는 말로 대변하기에는 부족하다. 또한, 유목생활도 터전이 있고 집이 있었으며 사회를 구성했으니 집에 돌아온 안정감이 곧 떠나야 하는 시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고 볼 때 어찌 정착감이 없었다고만 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인류는 정착생활을 바라고 있었지만 경제적 사정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유목생활을 유지하기가 곤란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착의 삶을 택했다 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유목, 정착, 발전, (우주)개척, 진보, 진화, 탈각... 이는 그저 나아가기 위해 나타난 현상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이는 인간 중심의 표현도 아닐 뿐더러 그저 나타난 현상을 표현한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치 과거 4백만 년을, 혹은 최근 1만 년을 기초로 하여 앞으로도 그럴 꺼야 라는 식의 과거 기반의 표현은 자꾸만 끼워맞춘다는 느낌이 든다. 그저 그랬다. 단지, 인간은 유목, 정착, 발전, (우주)개척, 진보, 진화, 탈각 등에 이르는 과정에서 인간은 더욱 소외되었고 큰 스트림(흐름)에 맡겨지게 됨에 따라 인간이 개미를 바라보메 무감동한 것처럼 그저 그런 처지에 처했을 뿐이라고 보는 건 어떨까? 태동 시점으로부터 인간이 활략하던 시기에는 인간 자체의 능력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인간을 위한,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표현하고 나누는 게 자연스러웠지만, 이미 우리가 느끼듯이 마치 거대한 흐름에 맡겨진 채 멈출 수조차 없는 현 시국을 보노라면 어느 한 사람이 멈춘다고 멈춰지지 않을지니 그저 거대한 우주의 공간 너머 저 구석진 한 곳, 태양계 중의 지구 라는 곳에 살고 있는 단지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만큼 소외감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우주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종국에는 별(우주의 세포 단위)의 생성과 소멸에 이르니 어쩌면 그런 과정에서 티끌 모다 작다하더라도 어찌 스치는 바람이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할 수가 있을까. 다만,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부자연스러움이 소외감으로 채워진 것이리니.

거대한 흐름에 편승하게 된 순간부터 인간은 안정감을 얻은 대신 소외감 또한 얻었다. 안정감은 한가함과 지루함을 낳았고, 소외감은 안정감의 대척점에서 균형을 잡아준다. 하나하나의 톱니바퀴가 중히 쓰이는 마차를 움직일 때를 지나 이젠 바퀴 정도야 시기 너머 움직임(교통, 이동수단 등) 자체를 내맡겨놓고 다른 걸 해도 되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볼 때, 톱니바퀴인 인간이 느낄 감정은 그 중히 쓰임에도 불구하고 조명받지 못하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낄 뿐, 거대한 흐름은 결국 소외감이니 안정감이니 하는 감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분명 또 다른 미션을 부여할 것이며, 이는 움직임 자체를 떼어놓고 생각해야 할 만큼의 과제일 꺼라고 짐작된다. 또는 인간을 톱니바퀴로 둔 채 인공지능이라 불리는 데이터 생성과 소멸 프로세스로 전환시킬 지도 모르고.

"왜 1만 년 전, 중위도 지역이었을까?"

"정착화의 과정은 인류에게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부과했다. 그때까지 인류의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능력과 행동 양식은 모두 유목생활에 맞춰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이를 과거형이 아닌 미래형으로 바꿔보자.

"(인공지능) 자율화의 과정은 인류에게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부과했다. 그때까지 인류의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능력과 행동 양식은 모두 정착생활에 맞춰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정착혁명은 인류사의 사건인 동시에 정착민이 자신의 인생 속에서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이다."

이 또한 미래형으로 바꿔보자.

"우주개척은 인류사의 사건인 동시에 정착민이 자신의 인생 속에서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이다."

우주개척의 원인이나 방향, 그 필요성은 두 말할 나위 없어 생략한다. 아니 하면 뭐 하겠는가. 관심 없이 나아갈 수 없기에 우주는 지구 탈출이라는 미션을 당대에 내준 셈이다. 돌리고 돌리면서 끊임없이 별을 늘리고 늘려 영역을 넓힌다. 과연 우주 팽창범위가 '없음'으로부터 시작된 힘과 균형을 맞출 수나 있을까? 무섭다. 도대체 없다는 건 얼마만큼의 무게일까? 별의 생성과 소멸은 말 그대로 이어짐에서의 용어일 뿐, 없음은 아니다. 여기 없을 뿐, 다른 곳(이생, 타차원, 평행우주, 상상, 생각의 저편)에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생각과 이념은 '있음'을 기반으로 한다. 열일하는 우주에게 응원을 보내자. 필히 살아남으라고.

생존욕구는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할 대상이다. 그 다음이 이어가기 위해 넘겨주어야 할 몫,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가는 방향에는 하등 상관없을 수 있겠으나, 가능하다면 서로 간의 소통과 정리, 번복을 없애기 위해서는 가능한 전달을 위한 남김활동은 열심히 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렇게나 지겹고 고통스런 건 내 하루의 일상을 다시 되돌리면서 기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만큼 고된 일인 만큼 자기의 존재감을 뚜렷이 남기자.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살았다가는 그저 별의 생성과 소멸 과정에 쓰이는 재료로 밖에 쓸모가 없을 지도 모르기 때문. 자아를 강하게 해야 미래에 아인슈타인이 탄생한다. 비록 내가 다시 나로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전생에 이어, 후생이 받아낸 것을 나중에는 과거로의 여행조차 변수에 포함될 만큼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참으로 인생사 어찌 1백 년 중 하루하루를 한가하다 할 수 있을까! 단지, 못 느끼거나 치중되어 있거나 인지하지 못했거나.

설국열차를 떠났고 멈추지 못한다. 설국열차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잊혀졌다. 마치, 인간이 태어나는 방식은 알아도 왜 인간이 태어났는지는 모르듯이. 설국열차 밖이 어떤 상황인지 깜깜하다. 아니, 없다. 무의 공간조차 아니다. 그런데도 설국열차를 달려야 한다. 왜? 왠지 모르지만 멈추면 잠식당할지도 모르기 때문. 무조건 달려야 한다. 에너지를 풀 가동해서라도 계속 달리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갈아넣는 에너지원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각자의 역할이 정해졌고, 해당하는 역할 외의 변수조차 설국열차를 달리는 재원으로 사용되기 때문. 모든 만물은 설국열차가 달리는 에너지원이 된다. 단지, 그 형태가 망원경으로 바라본 우주라는 형태일 뿐. 

"정착사회의 경우는 그럴 수 없다."

지루함과 한가함, 인류사, 소비사회, 관념의 확장... 어느 것 하나 주고자 하는 메시지에서 작을 수는 없겠지만, 너무 지엽적이다. 마치 지루함과 한가함 만 해결하면 인생사 거대한 과제를 하나 해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디 그런가? 

지루해 한다. 당연히. 그와 반대로 즐거워 한다. 재미를 쫓는다. 열중하기도 하고, 고꾸라져서 우울하기도 한다. 그저 돌고돌아가는 순환고리와 같다. 감정이 가만있지를 못한다기 보다 감정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는 태어난 순간 정해졌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배우는 순간부터 정해졌다. 사랑은 좋은 거야 라는 걸 느낀 순간 완전히 구속되었다. 각인되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기분 좋은 구속이요 순환이다. 거대한 흐름에 한 몫을 담당하니까, 기꺼이 기꺼움에 나서자.

"유목생활에서는 많은 재산은 지니고 이동할 수 없다. 아니, 원래 많은 재산을 가질 필요가 없다."

"정착사회는 식량의 저장을 전제로 한다. 이는 사유재산이라는 사고방식을 낳는다."

유목, 정착, 그 다음은? 인공지능에 기댄 자율화, 잡혀있지 않아도 되는 일터, 보다 자유로운 사고방식, 문화의 향유 보다는 문화의 추구, 시간이 남게 된 인류는 모두 예술가가 되리니 어떤 의미에선 기대가 크다. 모두 다 배우지 않아도 되며, 대충 알게 된 사실에 기반하여 관심이 가는 어떤 것을 해봐도 좋은, 충분한 시간과 여유로 인해 하고 싶은 건 할 수 있게 되니까. 다만, 지치진 말아야 한다. 과한 경험으로 인해 피폐해진 만큼 휴식을 추구할지니 이는 나이들 수록 몸이 쇠퇴할 수록 강하게 나타난다. 결국, 건강을 유지하면서 적당한 경험과 함께 하고픈 걸 하는 삶. 그래도 된다. 앞으로. 다만, 앞서 말했듯 무한 히 자유로워질수록 그에 상응하는 과업이 생기거나 만들어질 것이니 명석함을 추구하거나 인공지능 활용능력과 같은 기술을 스킬처럼 장착하거나, 혹은 환경세계 이동 능력처럼 현생 외의 여러 다면 세상을 각종 방식(소설, 꿈, 잠, 영상 등)으로 그려봐도 좋겠다. 하다보면 얻고 받거니 주거니 하겠으니 뭐라도 좋으니 낙서라도 하자. 여기에 너무 많은 걸 부여하진 말자. 지루하니 마니 그저 하고프면 하고 아니면 쉬고 딴 생각들면 딴 생각하고 눕고 싶으면 눕자. 

"이렇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동안, 사람이 가진 우수한 탐색 능력은 활성화되어 충분히 작동한다. 신선한 감각에 의해 모인 정보는 대뇌의 무수한 신경세포 사이를 격렬하게 이동할 것이다."

새로운 환경은 장소 공간적 변경 뿐만아니라 일의 범위, 만나는 사람, 추구하는 사고방식의 전환, 나름의 생각, 새로운 도전 등 여러 다른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로 인해 여러 능력이 활성화 될 것이고, 소기의 목적(우주팽창의 에너지원)은 달성된다. 이름(별의 생성재원)을 남긴다. 그렇다면 엉뚱하게도 게이츠는? 머스크는? 너무 한 거 아냐 라는 말. 그래서 공평하다. 누구의 재원인지 모를 섞어 어디엔가 쓸모있는 이로 탄생하거나 곧바로 우주의 거대한 흐름에 쓰이거나 돌고돌아 순환된다.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현실, 이것이 다름 아닌 지루함이다."

맞다. 그렇지만 이 또한 인정된다. 모든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고 발휘된다고 한들 치중한 면 만큼 능력발휘가 되지 않으면 않은 만큼의 여유로운 면이 조화를 이룬다. 결국 능력을 발휘할 현실을 탓할 일이 아니라, 해당하는 곳이나 해당하는 것으로 이동하면 족한데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경우라고 보여진다. 아닌 곳과 아닌 것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다.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펼쳐질 세상, 펼친 세상에서 나 하나의 행함으로 인해 변화할 수많은 변수의 다채로움에 대해 어찌 지루함을 논할까! 아름답기 조차 하다. 

"파스칼은 인간의 불행은 모두 단 하나, 즉 방에서 잠자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 잠자코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잠자코 있으려면 태어나면 안 되는 거다. 따라서 잠자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불행이 아니라 숙명일 뿐, 그저 방향타를 움직이는 역할만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움직일 배조차 주어졌으니 어찌 배를 출항시킨 모태를 불행하다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서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것은 거주한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토대요 바탕이다. 고로, 거주한다기 보다는 한 세상 잘 놀다간다는 식의 말에서 보듯 놀이터나 풍미한 세상으로 보는 건 어떨까? 역시나, 인간 중심 사상이기 때문일까?

세상에 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태어났으니 움직인다. 행한다. 거기에 나아가면 더할나위 없겠다. 물론 퇴보나 우울도 가능하다. 어떤 방향이든 플러스든 마이너스든 가능하다. 태어났기 때문에 어떠한 모든 것이라도 가능하다. 세상에 살다 라는 건 그저 눈을 뜨는 행위로부터 시작한다거나 잠을 드는 행위로부터 이거나 한 발을 내딪는 행위로부터 이거나 마음을 굳게 먹은 행위로부터 이거나 그저 한 발 한 발 달려 나가는 행위로부터 이거나 쓸데없이 쓸데없다 말하는 뭐라도 하는 행위로부터 이거나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영향력의 차이일 뿐 세상에 산다는 데는 차이가 없다. 다음 생애에선 영웅이 되겠다 거나 재벌이 되고 싶다는 건 바람일 뿐, 바람이 모아져 그런 생을 사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 그저 현생 보이는 게 전부인 양 판단치 말자. 세상에 살다 라는 건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속한 티끌만한 움직임일 뿐, 거기엔 거창하거나 원대한 것 보다는 그저 하루하루 한 발 한 발 차분하게 나아가는 선택만이 중요할 뿐. 경중조차 움직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 새로 태어났다. 심지어, 지각까지 갖췄다. 무엇이 부러울까. 갖지 못한 재산 탓을 할까? 능력을 탓할까? 태어났다 라는 자체의 기회를 너무 얏보는 행위다. 태어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에너지원과 재원이 사용되었음을 알게 되면 그런 소리는 쏙 들어갈 텐데. 놀이라고 여겨도 좋다. 유희라고 여겨도 좋다. 당장 깨질 유리라고 해도 좋겠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라 해도 좋겠다. 상응하는 만큼 재미를 준다. 다만, 너무 휘둘리는 건 사양하고 싶다. 태어남 조차 정함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살아가는 것조차 정해진다는 건 너무 하다. 다행이라면 점 점 더 인간 개인 각자에게 선택할 기회를 무수히 준다 라는 점이다. 그만큼 주어진 바의 의미가 퇴색되기 마련이고, 주변에 바탕에 게임에 현혹되기 일쑤긴 하겠지만.

오늘 새로 태어났다. 심지어, 지각까지 갖췄다. 감사하다.

"한가함이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할 필요가 없는 시간을 말한다. 한가함이란 사람의 자세라든지 그 감정을 느끼는 방식과는 관계가 없다. 즉, 한가함은 객관적인 조건과 관련된 상태다."

"지루함은 무언가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감정이나 기분을 가르킨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자세나 느끼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즉, 지루함은 주관적인 상태다."

한가한 시간, 지루한 감정이나 기분으로 축약된다. 한가함이란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할 필요가 없는 시간은 가능하지만 아무것도 할 것도 할 필요가 없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필요라는 말은 주체에게나 가능하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 이미 운명의 수레바퀴가 되었다. 틈틈히 선택과 판단을 한다고 느낀다손 치더라도 태어나 죽기까지 과연 자기 본연의 의지로 얼마만큼의 선택과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그저 그렇게 여기고 싶다거나 그러고 싶은 소망일 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할 필요가 없는 시간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인간을 주어로 넣었을 때 성립한다고 여길 뿐. 굳이 인간이 주체나 주어가 아닌 인간은 객체거나 부속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한가함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한가함은 말 그대로 사치다.

지루함은 무언가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감정이나 기분을 말한다. 이는 무척 자주 발생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태어나 하기에 따라 능력에 차이가 생기고, 환경에 적응하기에 따라 발휘되는 능력이 같을지라도 보기에 따라 맡은 직무에 따라 달리 평가받는다. 누적된 다름은 결국 차이로 표현된다. 차이는 무언가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감정이나 기분을 일으킨다. 차이를 없애면 지루함 또한 없다. 무언가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감정이나 기분은 홀로 발생할 수 없다. 환경이 주어져야 하며, 해온 실적과 능력, 그리고 등장인물이 필요하다. 나 홀로 무언가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감정이나 기분은 아무것도 주어진, 과거 경험이 없다면 발생하지 못한다. 물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내쳐졌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빠질 일이 없다. 다시말해, 나 홀로 있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무언가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감정이나 기분은 매 순간 느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착으로 인해 인류는 어찌할 바 없는 '능력의 과잉'이라는 조건에 놓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또한 인지한 순간부터, 앞으로 뛰어넘을 순간에 이르기까지 어찌할 바 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이는 단순히 지루함과의 끊임없는 전쟁이 아니다. 지루함이란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 일부에 불과하다. 보다 근본적인, 인간이 처한 상황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행위를 요구받았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태어난 순간 정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못하기 때문에 행위를 하게 되었고 이는 후행적으로 나름의 발전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인류가 어찌할 바 없는 조건에 놓였다는 시각은 동일하다. 다만, 그 시점이 정착이나 지루함이라고 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정착이전에는 지루함이 없었다고 자신하는가? 유목생활 또한 일정기간 머물면서 한가함이나 지루함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으니 그 근원에 대해 질문하게 되고, 원류, 즉 풀리지 않는 지점에 닿는다. 

자루하다면 지루한대로, 한가하다면 한가한대로 나름의 이유가 있다. 있게 된 순간(태어난 순간)부터 가만히 있질 못하니 움직인다. 되돌아 갈('죽음'이 아니라 '없음'에 가깝다) 수 조차 없으니 쉬는 순간조차 쉬는 게 아니라 쉬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잠에 든 순간조차 꿈을 꾸거나 꾸지 않거나 꾼 사실조차 모르니 어쩌면 아바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오로지 의지로써 올곧이 나아가야 하는데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의지조차 어쩌면 환경세계에 속한 결과로 생성된 이미지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다시말해, 의지 또한 내것이라기 보다 생성된 후행적인 결과물이라는 것과 그 바탕이 환경에서 비롯됨에 따라 정처없이 흔들거리기 마련이라는 점, 그러니 의지라는 건 세우기는 어렵고 평생에 걸쳐 다짐과 행위를 통해 만들어야 할 몫이 됨과 동시에 어느 한 순간 놓아버리기 쉬운 감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령, 상상해보자.

의지가 없다면, 달리 말해 태어나지 않았다면, 새까만 밤, 어두운 방에 홀로 누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어둠 너머를 바라보면 어떠할까? 두렵다거나 살갛이 쭈뼛쭈뼛 곤두서는 느낌을 (의지로써) 이겨내고 어둠('없음') 너머를 주시하고 있으면 어디론가(자기상상 혹은 어둠동화) 빠져든다. 자기상상은 현생에서의 의지 극대화로 나타난 결과로 추측되며, 어둠동화는 '있음'에서 '없음'으로의 전이를 위한 접촉 정도로 여겨진다. 다만, 둘 모두 무척 생경하고 현생에 의지가 이를 거부해서 오래 머물 수는 없다. 솔직히 저 깊숙히 꽁꽁 감추고 육신이 죽는다는 시저미에 꺼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직은 현생에서 할 일('태어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는 행위')이 있다며.

'없음'은 '있음'과 대척점에 있거나 멀리 있는 거리 개념이 아니다. 시간이나 공간적인 개념도 아니다. 그저 여겨지는 느낌처럼 있게 된 순간 없음에서 벗어났지만 온전히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있게 된 순간 없음이 함께 한다는 개념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우주의 빅뱅이론처럼 우주의 시작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전환되었다고 여겨지기 쉽다. 이는 단편적인 사고과정일 뿐, 과연 없음은 없음인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만약 있음이 있음으로 생겼고 있음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면 없음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우주의 시작 전이 없음이라고 여겨지는가?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갑자기 있게 되었고, 이는 없는 공간을 찢어 발겨서 있기 위해 끊임없이 팽창을 하게 되었다는 것인가? 현재, 대부분 이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없음이 만약 있음의 토대가 되었다면 없음은 어떤 상태 혹은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정의를 내려야 비로소 접근할 권한을 얻을텐데, 내 옆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모르니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현생 인류처럼 신의 세계, 상상의 세계, 차원, 우주, 꿈... 이런 모든 표현들 조차 정의를 가지고 있다. 

'없다'의 뜻은 (1)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오늘날 살아 있는 공룡은 없다. (2)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음식 솜씨가 없다. (위키낱말사전)

없다라는 뜻을 자세히 보자.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 되어 있다. 대상이 주어다. 마치 지루함의 원인과 대상이 인간이라고 봐서 해석하고 있듯이, 인간조차 세상을 이룬 하나의 부속에 불과하다는 점을 볼 때 객체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은 없이,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개념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셈이다.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 대상, 즉 있음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 이를 있음이란 기준으로 말하듯이, 만약 없음 입장에서 보면 할 말이 많을 듯하다. 이 세상은 없었어. 그냥 존재하지 않았다고. 그러다가 생긴게 우주일 뿐이야. 없는 건 무한대, 있는 건 꼴랑 우주. 너의 상상 범주 안에 머물거나 인간이 이름 붙인 모든 것들이 아무리 많다할지라도 그건 무척 적디적다. 우리가 먼지 개수를 세지 않는 것처럼 인간은 우주에서 먼지와 같고 우주는 없음에서 먼지와 같다. 그러니 주객을 바꿔 바라봐야 이 논의가 원류와 결론 사이를 연결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지루함은 인간을 위해 인간이 탄생시킨 개념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인간이 느낀 수동적인 감정일 뿐이다. 인간의 탄생 또한 우주를 구성하고 생성과 소멸을 통해 살아남기 위해 일으킨 하나의 작용일 뿐이다. 우주 또한 인간의 탄생과 맥을 같이 한다. 인지능력 또한 이와 같다. 우주를 구성해서 온갖 있는 것들을 총집합해서 이 난국을 헤쳐나기고자 구상해 낸 결과물일 뿐이다. 

지루함, 인간, 우주, 있음... (1안) 어쩌면 없음과 있음이 양면이 아닐 지도 모른다. 없음은 그저 환경세계처럼 바탕일 뿐, 여전히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지워져 없어질 수도 있는 것처럼 없음은 있음의 바탕일지도 모른다. (2안) 없음으로부터 있음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과관계로 풀어내기 에는 한계 또한 뚜렷하다. 마치 빅뱅이론처럼. 없는데 갑자기 변덕을 부려 있게 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에 의해 있게 되었다고 봐야 하기 때문에 또다른 존재를 논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없음은 존재조차 없는 상태를 말한다. 아니, 존재라는 용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 없음은 없음이다. 그런데 어떤 작용이 있어 없음으로부터 있게 되었다는 가설은 틀리다. 어떤 작용조차 없다. 따라서 2안인 빅뱅이론은 기각. (3) 착각처럼 있는 것이 있는 것대로의 착각이라면 어떨까? 인지조차 상상조차 모두 착각이다. 참과 거짓의 거짓이 아니라 있다는 착각이라면 어떨까? 실제는 없는데 있다고 여겨진다면 어떨까? 인지부조화가 찾아온다. 난 있다고 여기니 없다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이를 대입해볼 수 없다.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을 논할 수 없다. 단지 그렇지 않을까 하는 짐작만 가능하다. 마치 어두 컴컴한 밤에 홀로 누워 눈을 말똥말똥 뜨고 전방을 주시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 이와 가장 흡사하다. 마치 현생과 멀어진, 동떨어진, 쐐한,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두드러기가 날 것만 같은 감각. 있다는 건 없다는 걸 인지하기 위한 착각은 아닐까? (4) 없음은 있음과 대칭되지 않는다. 없음은 없음이고, 있음은 있음일 뿐, 없고 있고는 가능하다 여기면서 있고 없고는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과 유사하다. 왜 나는 없고 있고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없던 것에서 있게 되었다. 존재조차 없다라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여겼을까? 없었어야 있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반대의 경우처럼 왜 나는 있다가 없어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까? 이는 이제까지 써온 바와 같이 있음은 있음으로 순환된다 라는 걸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모든 있는 것들, 현생, 사물, 감정, 의지, 인지, 차원, 우주, 상상, 꿈.. 모든 있는 것들, 즉 존재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현생 환경에서 그 몫을 하기 때문으로 여겨지고, 그 몫이 목적이나 지향점이라기 보다는 생존을 위한 순환이라는 생각이 타당하다고 여긴 까닭이다. 가령, 우주 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유지하고 팽창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에너지는 파장으로써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이는 우주력, 은하력, 태양력, 지구력, 행성간 힘, 지구 내 중력조차 힘의 작용이 곧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원리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필요한 이유는 생존 때문이다. 물론 발전은 생존을 바탕으로 한다. (5) 그리고 만약 있게 된 존재가 없게 된다는 상상을 해보라.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죽음이 아니라 소멸이 아니라 없게 되는 것이다. 원소조차 남기지 못한다. 기록은 두말할 나위 없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아니,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 끔찍하다. 아마 그래서 있음이 없음으로의 진전은 배제하고 싶기 때문에 논리를 강박하게 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6) 혹은 있게 된 존재로서의 한계 때문에 그저 그 정도 수준에서 논할 범주 내에서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 정도 선에서 충분해 라고 마치 없음이 견지하고 있을 수 있듯이. 먼지조차 쌓이면 힘이 되니까. 어쩌면 한계를 뚜렷히 해서 시험 아닌 시험을 통해 무궁한 가능성은 부여하되, 육신의 한계, 정신의 한계, 하루의 한계, 인생의 한계처럼 무척 많은 한계점을 부여했음을 볼 때 참으로 냉정하다. 그렇지만 현생 인류가 육신의 한계, 정신의 한계, 하루의 한계, 인생의 한계를 넘어섰었다면 어떠할까? 이런 상상을 하게 된 순간부터 이미 다른 차원에선 가능하다면 이또한 그 나름의 실험공간에서 펼쳐지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하게 된다.

결국, 논하여 닿고자 하는 바는 없음의 정체를 아는 것. 그럼으로써 있음의 존재의미를 찾는 것. 그렇지만 이는 절대적이지 않은 것. 유한함 속에 즐겨도 좋다는 것. 몫은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모든 만물의 태생적 비밀과 원대한 목표를 내가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것. 그저 유리알 유희처럼 여겨져도 한쪽 가슴이 두근대는 감정만큼 살아있고 피로하며 지치고 나아가며 성취하고 느끼고 주고받는 삶으로써 살아가는 그 자체의 기회를 그저 수긍하는 것. 그리고 깝죽대듯이 들이댄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풀어보는 유희를 즐기는 것. 아니어도 좋은 것. 아니 아니어서 더 좋은 것. 어쩌면 아니어서 더 좋은 것처럼 없음은 아니어서 더 좋은 상태를 말할지도 모르겠다.

있음은 있어서 더 좋은 상태. 주어진 마냥 살아가는 것과 끊임없이 갈구하는 것. 궁금해하고 파고드는 것.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고로, 있음은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는 상태를 말할지도 모르겠다.

"한가로움을 독점해온 계급이 지혜로웠다는 사실만큼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악착 같이 살아야 하는 계급은 지혜롭지 못하거나 지혜로울 시간이 없거나 지혜로움을 쓸 일이 적거나 지혜라는 자체에 관심을 줄 수 없거나 지배를 당하다보니 지혜라기 보다는 순응에 가깝게 비춰진다. 만약 계급의 나뉨이 부의 척도가 아니고 생존에의 집중도가 아니라면, 가령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생존욕구로부터 조금 벗어난다면 해당 계급은 어떠할까?

지혜를 얻을까? 한가로움의 척도로 지혜로움을 판단케 하는 게 맞는가? 한가로움을 독점했으니 지혜롭다는 말에 강한 거부감이 드는 건 아마도 동등관계( '=' )로 표현해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처럼 마치 정해진 것처럼 받아들이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일텐데, 한가로움이 지혜를 추구하기 에는 유리했던 것일까?

한가로워 생각하고 생각되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지혜를 얻는 길인가에 대해 곰곰이 빠져들게 한다.

"개성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죽음이 인간성의 완성이 아니듯이, 개성은 인간이 평생에 걸쳐 만들어진 성질일 뿐 그런 류의 사람이라는 말로 지칭될 수는 있더라도 딱 이거다 라는 개성이라고 정의내리기 어렵다는 말로 이해한다. 개성은 완성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비는 항상 실패하게끔 되어 있다."

"소비에 의해 개성을 추구할 때,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 소비는 도달점이 없는데도 어딘가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소비자는 선택의 자유마저 강제당한다."

논조에 동의한다.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 만족이란 완성체가 아니라 개인별로 받아들이는 순간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크게 성공했든, 많이 벌었든, 어떤 시점에서 누군가와 비교를 하든 본인이 받아들인 바에 의해서나 외부로부터 받은 바에 따라 만족이 결정지어진다. 또한, 소비자는 선택의 자유마저 강제당한다 라는 책의 논지에 동의한다. 소비는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살아가기 위한 필수품이라는 측면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선택하는 순간을 자유로 지칭한 듯하나, 소비가 필요해진 이유를 선택이 아닌 소비 라는 자체를 놓고 본다면 생산자가 만들어서 소비자에게 강제하든, 소비자 지향의 생산품을 만들어내든 그건 너무도 생산과 소비라는 단계적인 구분일 뿐, 큰 의미의 사회현상 측면에서 본다면 흘러가는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만들었는데 안 팔린다거나 굳이 만들었는데 잘 팔린다거나 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 또한 해당 범주에 속한다. 생산이 되어 소비가 된다. 태어나 행위를 한다. 마치 유기적인 흐름처럼 돌고 돈다. 

어제(2024.4.18.) 샀던 주식이 오늘 크게 폭락하고 있다. 5일 연속 하락한 만큼 반등의 기회를 노렸다. 계속 기다려도 좋았다. 그렇지만 폭락해도 좋다는 생각도 했던 듯 하다. 몇 개월을 기다리며 보낸 시간이 재촉한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전량 매수를 실행하면서 신났다. 그리고 오늘 폭락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메모한다.

"얻는 게 아니라 얻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한다."

"목표 라기 보다는 주어진 자체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맞추기 위해 주식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다. 벌기 위한다기 보다는 벌어 들이는 순간과 잃은 순간에 느끼는 지독한 감정에 휘둘려, 그럼으로써 휘둘리지 않으려는 마음과의 균형잡힌 태도를 형성하면서 실행과 사후반응을 살피는데 주안점을 둔다. 현재까지 얻었다. 손절매하지 않으면 얻는다. 절대 원칙처럼 작동한다. 시간이 걸릴 뿐. 고로, 순간 순간의 자기판단과 실행, 그리고 사후반응 간에 일어나는 일련의 애씀이 한가함과 지루함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만, 이 또한 무한에 가깝도록 반복한다면 짜릿함과 냉철함 사이에서 익숙해지는 만큼 지루함에 빠질 지도 모를 일이긴 하지만, 돈 자체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는 한 지루함에 빠지기 보다는 치우친 면을 바로세우는데 들인 균형감과의 관계에서 왔다갔다 할 것으로 본다.

"낭비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풍요한 사회다. 장래를 염려하지 않는 결여와 낭비성은 진정한 풍요함의 증거이자 사치스러움의 증거다."

낭비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낭비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지향해야 할 사회상이다. 절약 보다 낭비를, 규제 보다 자유를.

"소비는 오히려 사치를 멀리한다. 철저하리만큼 소비를 추진하게끔 만드는 소비사회는 우리로부터 낭비와 사치를 빼앗고 있다. 단순히 빼앗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소비를 계속해도 만족은 얻지 못하지만, 소비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소비는 아주 길게 반복된다."

소비에는 한계가 없다 라는 정의에 동의한다. 한계가 있어서도 아니된다. 계속 흘러가야 한다. 마치 태어나 가만있지 못하고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소비는 인간이 움직이는데 필요한 방법으로써 도입했다. 생산과 소비를 굳이 나누지 않더라도 좋은 사회를 지향한다. 일자리 감소를 걱정할 일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의 경계 구분이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인가에 초점을 둔다. 우리 인류는 아직도 의식주를 해결 못하고 있는 셈이다. 벗어나질 못하니 더한 진화를 꾀할 수 없다. 앞서 밝힌, 한가로움을 독점해온 계급이 지혜로웠다는 주장과 일맥이 통한다. 굳이 벗어던져야 한다거나 진화를 해야한다거나 하는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이나 성과측면에서 다룬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우주의 팽창이 빨라진 들 삶의 연속이 달라져서 빨라진 들 수명이 늘어 담아내고 축약하는 기능이 발달한 들 지금 살아가는 현생 인류와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구석기 시대의 인류와 산업혁명 전과 후의 시대, 그리고 현대의 사회, 앞으로 닥칠 기술집약적 미래사회 혹은 우주시대에서 인류가 담아내어 향할 가치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그때 그랬어 라는 잔재처럼 여겨지는 기록들이 한 면에 모두 담길 만큼의 축적된 힘이 향후 펼쳐질 미래의 동력으로 작동한 들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이런 의문은 생존을 배제했을 때의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살아남아야 할 숙명이라는 인식이 크면 클 수록 당대에 할 수 있는 범주와 역량, 그리고 후대에 이어갈 몫에 대해 미련(= '지루함'이나 '한가함'과 같은 위치)은 없어야 한다. '생존', '감상', '미련' 이란 용어가 곧 없는데서 생겼고, 필요에 의해 정의된 것처럼 어쩌면 없음이란 토대는 수많은 변수의 연속 진행과정에서 탄생되어야 할 수많은 정의의 집합체를 추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무한 반복되는 용어가 지루해질 때 쯤엔 굳이 살아있을 이유를 찾지 못하여 자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 우리 인류는 느끼지 못한다. 흩날리는 먼지를 보질 못하고, 먼지의 양조차 가늠하지 못하면서 우주를 말하고, 시초를 말한다. 엉성함이 있기에 가능성과 의외성에 기대를 건다. 너무 스마트한 나머지 컴팩트화 된 지식이 곧 진리라는 의미를 찾게 되는 순간 벗어나거나 벗어날 여지가 그 만큼 사라진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당해 인류는 무척 피곤한 일이 될 테니까. 

진리를 추구한다 함은 지식을 정리하여 가둔다 라는 지향성을 지닌다. 그 만큼 획일적이고 일관됨을 요구 받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사회상을 고려한 나머지 인류의 탄생배경을 놓쳐버린 경우다. 이 세상에 인류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기술 발전을 통해 우주개척을 통해 우리 인류가 도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주 팽창의 종착지를 보고자 함인가? 빅뱅이론에서 말한 태초 혹은 시초의 지점을 파악하여 되돌아가거나 원류를 분석하여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함인가? 

인류가 필요해졌고 만들어졌고 태어나 돌아가는 순환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만물의 주인인 듯이 보이면서 주인을 닮아서 인지 인지능력과 되물림능력은 이어가기에 용이하도록 진화해 왔다. 가야 하고 가고자 하는 방향은 모른다. 태어나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인류에게 주어진 당면과제는 풀어내지 못할, 풀어봐야 뻔 한 내용일 지도 모른다. 그저, 우주 팽창의 자양분이 되어라 거나 하는. 그런데 우주는 인류와 같은 위치에 있다. 우주가 태어나 살아야 하는 것처럼 우주에게 주어진 당면과제는 풀어내지 못할, 풀어봐야 뻔 한 내용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뮬레이션 세계관이 대두된 듯 하다만 완성되지 못했다. 사고의 확장 측면에서 도움이 될 뿐, 아직은 더 한 개념과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해야 한다. 아마도 인류나 우주의 탄생 배경과 존재의미에서 중요한 건 탄생배경이나 존재의미 자체 보다도 태어나서 하고 있는 행위 자체에 있을 지도 모른다. 개미의 일생을 궁금해 하지만 개미가 되지 못하듯이 우주의 일생을 궁금해 해도 그저 거대한 흐름 속에 닿을 그 목적지 보다는 향하는 자체에 의미를 부여함이 보다 마땅할지 모른다. 내가 곧 우주를 품고 있고, 우주가 곧 나의 연장이요, 인류의 내면과 외면은 우주를 빼어 닮았다라는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중에 만날 창조주에게 물어볼 때의 해당 인류는 그래서 어떤 답변을 듣게 될 지언정 수없이 많은 반복한 생을 1만년 너머 400만년을 이어, 앞으로도 1000만년을 이어간다고 했을 때 어느 한 지점, 혹은 어느 면의 단면에 대해 어떠한 의미를 부여한단 말인가!

추억은 찰라에 담긴다. 지난 생은 순간 떠올릴 수 있다. 핵심은 이거다. 담아내야 할 건 찰라와 같은 힘의 크기. 어떠한 방식이든 끊임없이 이어감의 행위에는 그 만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 '태어났으니 살아야겠다' 라는 지상명제를 가벼이 여기지는 말자. 하나가 안 되면 하나와 하나를, 둘이 부족하면 둘과 둘을, 면과 면을, 이어붙이거나 겹쳐붙이거나 포개어 끼거나 아예 합쳐버리거나 하는 일련의 힘의 작용은 정과 기와 신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고, 이 세상 만물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육신이 정신과 합입을 이루고, 감정이 정신과 합일이 되는 경지를 말하기도 한다. 옷을 입거나 혼연일체를 이루거나 수정을 통한 생식활동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모든 행위는 자연스런 움직임이다. 인류에게나 우주에게나, 닿을 곳이 어디인지 알거나 모르거나. 

찰라에 담아내야 한다. 진리라는 이름이거나 추억이라는 이름이거나 상상이거나 어떠한 한계의 구분 없이. 왠지 필요하다고 느낀다. 경험치를 찰라에 담아낸 힘이야말로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활동과 행위의 의미에 가까울 수 있다고.

"여가란 더 이상 노동이 정지하는 시간이 아니라 비생산적 활동을 소비하는 시간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제는 여가에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가든 소비든 지루함이든 모든 행위나 감정표현은 모두 태어났기에 하게 된 작용이다. 있게 된 순간부터 있기 위해 하는 행위다. 여기에서의 경중은 없다. 고저조차 가치척도 조차 무의미하다. 잘나고 못남은 바라보는 차이일 뿐, 태어나 있게 된 존재로서 자각을 한다 함은 행위 자체에 치우치지 아니함을 말한다. 행위는 행위일 뿐, 만들어가거나 만들고 있는 모든 행위는 홀로 있지 못하니 결국 함께 하는 수단이 될 뿐 행위 수단의 우열은 없다. 행위에 담아내는 감정의 깊이 혹은 작품의 정도가 그 나마 가치 있게 여겨지지만 이 또한 사회 생활을 이끄는 세력에서 의미가 있지, 태어나 있게 된 가치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니 성공이나 실패니 하는 말은 덧없다. 태어나 있게 되어 하게 된 행위 자체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행위를 하고 있는데에 쓰이는 감정이나 이성, 생각, 사상, 사고력, 생각, 연상과 같은 감정을 담아내는 정도에 차이를 두되, 이 또한 태어나 있게 된 면에 앞서진 않으니 마당을 쓰는 행위에서 안방이거나 마당이거나 거리거나 강당이거나 운동장이라는 차이 또한 구별하지 않는다. 행위에 감정을 담는다. 여기에서 행위 자체의 우열은 없다고 했다. 감정 또한 기쁨과 나쁨의 우열은 없다. 있어 하게 된 행위, 갖게 된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만 한다면, 아니 휘둘려도 좋다. 균형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시작은 뭐니뭐니 해도 태어나 있게 된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 외의 행위나 감정은 현상일 뿐, 세상을 구성하는 환경일 뿐, 배경이 될 뿐, 살아가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루고자 하거나 목표를 세우는 일련의 다짐이나 행위는 그저 이를 지향할 뿐 정답은 아니다. 좋고 나쁨은 없다. 누워 있어 지루하면 일어나면 된다. 누워 있어 편하다면 가만히 있어도 된다. 아니해도 좋다. 왜냐하면 아니어도 좋은 것이 태어나 있게 된 순간 갖게 된 '없음'에의 모태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없음'에의 없다라는 것이 의미가 있듯이 '있음'에의 있다라는 것에 의미를 좇을 일일 수는 있으나, 돌고돌아 한 세상 풍미한다 하는 말처럼 '없음'에로의 귀의가 '없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손 치더라도 어미를 찾는 병아리처럼, 빅뱅이론을 좇는 인류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향할 뿐이라고 여겨진다. 

"오늘과 어제가 구별된다면 그는 자신의 죽음조차 꺼리지 않을 것이다."

두렵다. 태어나 있게 된 가치를 지루함에 빚대어 죽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행위)은 싫다. 반복에 감정을 담아야 하는 이유다. 반복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렇게 감정이나 의미를 담거나 부여하는 순간 다시 반복의 굴레에 속해 돌아간다. 다시 말하자면, 반복에 감정을 담아야 한다거나 의미를 부여한다 라는 입장이 아니다. 태어나 있게 되었다 라는 표현과 태어나서 있다 라는 표현이 다르듯이, 반복에 감정을 느껴야 하고, 좋고나쁨, 행복과 불행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느끼는, 외부에서 오든, 내부에서 오든, 생각에서 오든, 상상에서 오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를 뜻한다. 거기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 맥락을 좇아 과거를 되집는 건 아니함만 못할 뿐더러, 있지도 않은 앞날을 생각해 보는 것 또한 그러하다. 반복에는 있는 그대로 느껴보는 게 답이다. 의미는 찾지도 좇지도 않는다. 

태어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해 한다. 차라리 이 마음 하나 만으로도 족하다.

태어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해 하고, 사랑할 수 있어, 아픔과 슬픔을 느낄 수 있어 그 지독함에 몸서리 치더라도 있는 받아들인다. 슬프면 울고 소리치고 울분을 토해도 좋다. 너무 아파 소리없이 흘러내려도 좋다. 어떠한 행위나 이어지는 일련의 모든 어떤 보여짐은 그저 있는 그대로 펼쳐질 뿐, 어떠한 의미도 어떠한 영향도 없다. 여기에서 두번째 키워드를 얻는다. 태어나 있게 되었으니 (반복행위에) 어떠한 의미도 어떠한 영향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류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타일러도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 있게 된 순간부터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고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해도 그 만한 반작용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뭐라도 할라치면 그 여파는 무궁무진하게 퍼져나간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될꺼야 라는 말은 무척 생소하다. 심지어, 난 커서 이런 사람이 될꺼야 라는 말조차 모르고 자랐다. 더욱, 난 커서 의사가 될꺼야 라는 숙명론자를 부러워 한 적도 많다. 그러지 말자.

'자기답게' 살자.

그 출발은 태어나 있게 된 순간부터임을 분명히 하고나서.

"무서운 사실은 소비사회는 타일러 마저도 이용한다는 점이다."

"본래성의 개념은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는다."

원래부터, 본래 그런 말은 하지 말자. 쓰지도 말고. 어제와 다른 오늘이니까. 그게 정말 정말 싫다면 땅 위에 돌을 차라. 내 발이 아프거나 튕긴 돌이 다른 파장을 만들테니 그 이후는 정말 정말 지루하지 않을테니.

"소유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타인을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사슬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2024.4.22. 인간성을 버려야 신이 될 수 있다 라는 말이 생각을 움직였다. 선을 넘기 위해서는 광기가 필요하다는 말. 

"이기심은 사회상태에서만 존재한다."

사회상태는 인간이 모여살면서 필요해진 형태이며, 이기심은 인간이 모여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감정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철학은 항상 근본적인 기분에서 나타난다. 철학을 하는 주체는 인간이며 인간은 항상 어떤 기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지금 자신의 역할을 찾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지금 스스로에게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태어나게 되었으니, 가만 있을 수 없으니 찾게된 것이 역할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금 흥미로운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스스로에게 더욱 관심을 갖게끔 하려 한다."

이는 단지 지루해졌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앞서 등장한 자기애와 이기심처럼 자유와 지루함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일 뿐 자기애와 이기심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범주일 뿐 명확히 구분지어지지 않는다. 구분이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태어나게 되었고, 가만 있을 수 없으니 자유로움으로 움직이든지 지루해졌기 때문에 움직인다는 건 그저 움직일 이유나 바탕을 찾을 때 필요한 감정이지, 움직인다는 행위 자체에는 하등 영향이 없다. 물론, 감정과 행위는 맞물려 돌아간다. 여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감정은 후발로 나타난 결과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태어났으니 움직인다 라는 대명제 앞에서 어쩌면 상황에 따라서는 참으로 가당찮은 게 감정일 지 모른다. 특히, 감정이 내몰린 전시상황 같은 곳에서는 더욱 더. 아니면 전시상황이든 아니든 감정에 내몰리려 치우쳐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태어났으니 움직인다 라는 대명제 앞에서 감정은 결코 먼저 발생하지 못한다. 태어난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다시말해 감정은 환경과 바탕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마치 인간의 삶처럼)이지 움직이는 행위 자체를 좌우할 수 없다. 들게 된 감정에 따라 행위의 멈춤, 유보, 방향에서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행위 자체의 움직임 여부를 좌우할 수는 없다. 물론, 이 또한 행위와 감정을 따로 떼어 무엇이 먼저 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세운 기준일 뿐, 행위와 감정이 따로 뗄 수 없는 것임에야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하니 상황, 환경, 바탕에 따라 들인 감정에 해당하는 지루함이 연속된 삶의 행위 반복에서 오는 착각에 빠지더라도 그 원류인 태어났으니 꿈틀거린다 라는 것에 감정을 담기 위해서는 감정에 대한 인지의 선을 넘어서는 나이를 고려할 수도 있겠고, 태어나서 모르는 감정에 응애 하고 치는 소리를 본능이라 말한다치더라도 응애 라는 소리를 감정이 아니라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태어나 세상에 알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본능, 혹은 습관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태어났으니 움직인다 라는 대명제 앞에 이후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는 단지 엮여들어가는 사회생활의 단면일 뿐, 본능과 같은 태어났으니 움직인다 라는 의미가 적은 행위에서 얻어지는 결과물이 적다손 치더라도 이후의 사회생활에서 맺은 찰라와 같은 경험치들이 그 보다 더 중하다고 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하겠다.

의미를 부여할 뿐, 행위의 차이는 없다. 부여된 의미에 따른 감정이 향방이 달라질 뿐 (살아가는) 행위 자체에 변화는 없다.

"지루함이란 무엇일까?"

지금 느낀 감정이 지루함은 아닐까 해서 탐구를 시작했더랐다. 그렇지만 역시 원류를 파고드는 집요함 때문일까 이젠 지루함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단내를 풍기는 상황에 처해졌다. 지루함이란 무엇일까? 지루할 여지를 둬야 할까? 마치,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한가함이야 말로 지혜의 원천이라고 칭했던 결과론에서 찬양 너머 어떠한 여지를 봐야 할까?

해석은 결과물을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일 뿐, 해답에서 벗어나기 일쑤다. 한가함과 지루함은 인간이 느낀 감정이다. 감정은 상황에 따라 후행적으로 행해지는 행위의 일종이다. 태어났으니 움직여야 한다 라는 대명제 앞에서 감정은 살아감에 있어서 부수적인 산물일 뿐, 의미를 부여하는데 쓰이는 도구이거나 소통을 위해 필요해진 부속물일 뿐, 감정이 살아가는 이유는 아니다. 태어났으니 움직인다. 감정은 이를 달리 받아들이거나 해석하게 하는 착각마저 일으킬 변수일 뿐, 움직이는 행위나 살아가는 이유나 목적이 되지 못한다. 단지 빠져지내는, 혹은 빠지지 않는 선으로써 작동한다. 

감정이 필요해진 이유는 단지 지루함으로 표현할 수 없다.

감정은 살아가는데 필요하다. 필수적이진 않다. 동물을 봐도 그렇다. 감정이 없는 건 아닌데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어쩌면 해석에 따라 거세된 감정이라 칭할 지도 모를 일이지만, 보기에 따라 달라진다. 살아가는 행위는 반드시 필요하다. 반드시 라고 할 만큼 하는 것에는 필요에 의해 여러가지 장치들이 후행적으로 태어났다. 감정이 그것이요, 상상이 그러하며, 꿈 또한 그러하다. 우주시대를 앞둔 현재, 상황에 내몰릴 변수는 지구계가 아닌 태양계에 이를 것인데 이는 그 만큼 현실이나 현상에 치우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는 걸 의미한다.

무대는 확장되고 인류는 거기에 목숨을 건다.

태어났으니 움직인다. 움직이는데 상황이나 환경, 바탕에 의해 감정이 발생되었고, 감정에서 비롯된 정체성 모색을 겸하던 중 인지와 함께 의미를 찾기 시작했고, 의미를 찾게 되니 살아가는데 집중하게 되었다. 인류는 원초적으로 태생적 근원을 궁금하게 되니 양방향으로 탐구를 시작했다. 안으로는 세포(생명체 단위)를 쪼개 DNA 염기서열 너머 원자핵을 분리 확인하는데 이르렀고, 밖으로는 우주로켓 민간 개발이 활발하다. 현재 상상으로만 가능한 워프나 텔레포트 등은 조만간 실현될 하이퍼루프의 중간 단계를 거쳐 점차 도달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해당하는 영역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한 차례 큰 홍역을 거칠 수 밖에 없으니 전쟁의 형태일 지, 반란의 형태일 지, 대변혁의 시기가 될 지 가히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발생해야만 한다 라는 짐작이 강할 뿐.

우리는 평화를 바라건데 정작 평화는 전쟁을 통해 진한 향수를 남긴다. 이처럼 어떤 형태의 대변혁은 다음 사회로의 진입 창구 역할은 할 것이다. 짐작 가능한 혹은 상상 이상의 일임은 분명하다. 다만 해당하는 싹이 어느 누군가의 혹은 거대한 세력에 의한 변화 라기 보다는 우후죽순 '추진'되던 일 중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보다 크다. 행하다 보니 놓쳤거나 소홀히 한 면, 가령 줄기세포 복제기술, 인공지능 자율부여기술, 진공상태 환경구현기술, 인공 기후변화 기술 등 어느 것 하나 무시무시하지 않은 것이 없을 지경이다. 하다보니 나이가 들었고 나이가 들어 몸이 쇠약해지니 안주 혹은 받아들이게 되더라 하는 일련의 생명주기를 마치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 중에 있다. 초월자로의 도약이 마치 시뮬레이션 세상에서 전직 개념에 해당될 뿐, 궁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있게 되어 하는 모든 행위는 결국 없는 곳으로 향하든 없는 곳으로부터 벗어나든 없고 있고의 경계가 없든 그저 자연현상에 불과할 뿐, 나아가는 방향에서 어떠한 거짓된 행위(가령 '없음'에의, '궁극'에의 항해)가 없거나 용납이 된다 할지라도 육체에 머문 한계로 인한 정신에 영향을 끼치듯, 태어나 움직여야만 하는 생명체로서 그 외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행위조차 놀이에 불과할 뿐, 살아가야 하는 숙명 자체는 바꿀 수 없는 한계라고 여겨야만 하는 것인지 의문에 꼬리를 문다. 아니어도 좋다. 마치 '없음'의 본질처럼.

그저 왔다가는 세상, 흔적 만이라도 아니라해도 좋다. 한 순간의 꿈이어도 좋겠다. 다만, 알고자 하는 것이 비록 감정 너머 인지와 이상이 어우러진 더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손 치더라도 살아있다는 자체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심이 기록을 이어가게 만든다. 한낮 거짓부렁이여도 좋다. 구분 짓고 구별하고 나누고 쪼개며 접근하는 자체가 이미 행위에 속하니까. 그저 태어나 있게 되어 움직이듯이 단지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그 움직임에 어떠한 의미라기 보다는 이런 일련의 모인 모든 에너지가 향해 나아간 궁극에는 어떤 혹은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함. 없어도 좋다. 마치 '없음'의 본질처럼.

"기분 전환을 통해 지루함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란 어떤 것일까? 말할 필요도 없이 시간을 빨리 흘러가게끔 하는 것, 시간이 더욱 빨리 지나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시간의 차이가 발생한다. 시간을 상대적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는대서 오는 차이. 시간이란 인식의 범주에 속한다. 절대 시간이란 없다. 기준을 세웠을 뿐. 태어나 있게 된 순간 얻은 건 시간이다. 유한함을 알게 됨에 따라 발생한다. 행함에 있어 시간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라서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사회 생활 중에 시간을 자유로이 사용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태어나 주어진 시간이 내 시간이 아닌 것마냥 주어진 각종 숙제는 시간을 저만치 멀리 두게 한다. 느낌 상.

시간은 상대적으로 여겨질 뿐, 마치 기분처럼. 시간은 그저 주어진 것을 따라가면 되는데 여기에 어떤 의문이나 감정을 남게 되는 순간 이질적으로 변하고 만다. 시간 또한 객체이면서 인간 또한 객체임에도 인간이 다시 시간에 종속되고 만다. 시간은 태어나 있게 된 순간 발생한 개념에 불과하다. 몇 분의 몇으로 나눈 값일 뿐, 절대적이지 않다. 그저 알기 쉽고 편리를 위해 도입한 개념에 불과하다. 시간을 바라보메 자유와 지루함을 논할 이유는 없다. 태어나 있게 되어 하게 된 순간 시간 또한 종속되어 나아가는데 달리 바라볼 여지를 둔 것 또한 인간이 만든 후행적 개념일 뿐, 태어나 하는 어떠한 행위의 우열은 없고 하게 된 순간 순간이 모여 압축되어 나타날 찰라를 이룰 경험이야말로 시간이 마법처럼 쓰이게 된다. 

시간은 살아가는데 필요하기 보다는 살아간 흔적을 되돌이켜 볼 때 인식의 범위를 찰라에 두되, 흩어지지 않고 정렬되어 가지런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하나의 유희에 지나지 않을 지 모른다. 굳이 되돌이킬 필요는 없다.

이미 지난 시간에 존재는 없다. 

태어나 살아가게 되어 행한 모든 것들이 하는 순간 존재를 잃고 만다. 태어나 '있게' 되어 행하니 '없게' 되는 셈이다. 

"기분 전환을 위해 우리들은 무언가 해야 할 일을 찾는다."

"해야 할 일이라고 해도 내용은 상관없다."

기분 전환이 필요해진 이유는 지루함 때문이다. 지루함은 인간이기 때문이고, 인간은 태어난 순간 가만 있지를 못하니 움직여야만 했다. 움직이는 자체, 행위에 대해 어떠한 내용이라도 상관없다 함을 받아들이면 움직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지 모르겠으나, 이처럼 매순간 의미를 찾게 되는 순간 움직임에 이유를 붙이게 되는 순간 행위 라기 보다는 행위로 인해 발생된 감정에 휘둘린다. 그저 하면 되는 일은 단순하다. 태어난 가정, 이웃, 상황에 따라 그저 하면 된다. 해야 할 일이라고 해도 내용은 상관없다. 만약 조금 더 높은 봉급을 기대하려면 그 만큼의 행함을 하면 된다. 그에 필요한 행함이 필요함에도 하기 싫어하면 할 수록 심란해진다. 원하는 바와 하는 바의 차이는 결국 문제로 나타난다. 어디 쉽게 얻겠느냐는 입장에 처한다.

우리들은 무언가 해야 할 일을 찾는다. 마치 우리가 찾으면 모두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은 대부분 처음 시도되지 못한 만큼 허들이 있다. 그만한 유경험자가 있어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다. 찾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놓여진다. 그냥 하면 된다. 하다보면 성공을 할 수도 받아들임에 따라 성공이 아닌 다른 열매를 맺을 지 모르겠지만, 행하는 건 다르지 않다. 

"해야 할 일 없으면 인간은 무엇도 하지 않는 상태, 즉 허무한 상태에 방치된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무엇도 하지 않는 상태는 없다. 허무라 칭하는 상태조차 하는 행위에 속한다. 어떠한 표현조차 모두 행하게 됨으로써 발생한 개념일 뿐, 무엇도 하지 않는 허무한 상태는 그저 인식의 범주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지난 시간에 존재는 없다. 태어나 살아가게 되어 행한 모든 것들이 하는 순간 존재를 잃고 만다. 태어나 '있게' 되어 행하니 '없게' 되는 셈이다. 없었던 곳에서 있게 되었든 아니든 있게 되었기에 행하니 이미 지난 시간에 존재는 없다. 존재가 아닌 찰라에 지나지 않는 경험, 흔적, 기록이 남게 된다. 원천에 가깝다. 왜 살아가야 하느냐는 물음에 이미 답을 낸 셈이다. 끊임없이 행하고 원천을 남긴다.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을 제고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차역이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지루한 것이다."

"18분의 1초 내로 일어나는 현상은 인간의 감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18분의 1초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인간의 시간이란 18분의 1초의 연속이다."

 

"지루함은 인간이 자유롭다는 증거다."

"인간은 각각의 환경세계를 살아간다. 단, 인간은 환경세계를 상당히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인간보다 느리게 살아가는 생물도 있다."

"모든 생물은 각각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인간은 하나의 환경세계에 머물러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계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지루해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상당한 자유를 가지고 환경세계를 이동할 수 있기에 지루해 하는 것이다."

인간은 상당한 자유를 가지고 환경세계를 이동할 수 있기에 지루해 하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만 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습관을 창조하고 환경세계를 획득한다."

"사람은 습관을 창조하고 환경세계를 획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위를 신호 체계로 변환한다. 생각하지 않고도 문제가 해결되게끔 하기 위해서다."

"늘 새로운 것과 대면하여 그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면 살아나갈 수 없다."

늘 새로운 것과 대면하여 그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면 살아나갈 수 없다. 생각 만 해서는 살 수 없다. 늘 새로운 것과 대면하면 살 수 없다? 늘 새로운 것과 대면하여 그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면 살아나갈 수 없다? 점차 기술이 발전할 수록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생각 자체가 곧 살아가는 방식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측면에서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나 움직이게 되었고, 움직임은 여러 감정과 생각, 상상을 발생케 했다. 움직인다는 자체에는 필요 없는 것들이지만, 인지하는 순간 이후 움직임 자체 보다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고, 의미 중에 으뜸은 생각이다. 움직인다는 신체적인 활동에 국한된 것이 아닌 한, 태어나 움직이게 되었고 움직인데는 생각하게 되었다고 봐야 한다면 생각이 곧 움직임이 되는 시대는 열릴 것이고, 생각의 집합과 상상의 실현이 가상세계를 통해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구현된다고 본다면 생각 자체는 곧 인공지능의 논리적 사고와 대비를 이룰 것이다. 인공지능이 생각하게 된다면 인류는 생각 너머 다른 움직임을 찾아낼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아니하면 인간은 태어나 움직이게 된 육체에 종속되어 사육되어질 것이고, 그 방향에서 도태는 필연이다. 인간이 필요한 이유는 세상을 움직이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주 또한 그러하다. 모든 움직임은 있게 되었기에 발생한다. 이 모든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 인간 뿐만아니라 우주 또한 멈추게 되는 순간이 된다. 즉, 움직이지 않으면 멈추고 멈춘 순간 '없게'와 '있게'의 순환고리는 끊기게 되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멈춘상태가 되고 만다. 

있게 되어 행하니 생겨나 찰라의 힘을 얻었다. 찰라의 힘이 겹겹이 쌓이고 쌓여 우주를 이루어냈고, 나아가는 만큼 팽창하기 마련이니 그 끝을 모르게 되었다.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다. 닿아서도 아니된다. 수평선 너머 끝이 아니라 이어짐의 연속인 것처럼 우주의 단면 또한 그 경계는 있을 지언정 그 끝에 닿을 수는 없다. 무한 고리인 셈.

태어나 있게 되어 행하니 찰라와 같이 나아간다. 우주가 팽창한다. 생성과 소멸이 반복됨에 따라 최근 일어나 발생된 움직임이 별의 생성과 소멸에 나타남을 알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무한 괘도처럼 순환을 이어가니, 있게 된 순간 움직이게 된 순간 발생된 일이다. 이미 지난 시간에 존재는 없다. 태어나 살아가게 되어 행한 모든 것들이 하는 순간 존재를 잃고 만다. 태어나 '있게' 되어 행하니 '없게' 되는 셈이다. 없었던 곳에서 있게 되었든 아니든 있게 되었기에 행하니 이미 지난 시간에 존재는 없다. 존재가 아닌 찰라에 지나지 않는 경험, 흔적, 기록이 남게 된다. 원천에 가깝다. 왜 살아가야 하느냐는 물음에 이미 답을 낸 셈이다. 끊임없이 행하고 원천을 남긴다. 반복이라 함은 살아가는 것을 표현한 말일 뿐, 절대 시간이 없는 것처럼 반복은 없다. 반복이란 표현에 따라 어제와 같아 보이는 오늘을 인식 할 뿐, 반복이란 없다. 

반복이란 없다. 고로, 시간에 존재는 없다. 이미 지난 시간에 존재는 없다. 어떠한 움직임조차 없다. 찰라로 남겨질 뿐, 그 찰라 또한 개개인이 지닌 바가 다를 뿐, 결국 사라진다. 흘러가고 없게 된다. 반복이 아니라 그저 나아갈 뿐. 나이듦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 있게 되어 소리친 바와 같이 행함 만이 남는다. 없는 것을 있다 라고 하는 오류를 범하는 이유다. 

시간에 존재 따위는 없다. 기록물처럼 흔적 만이 남을 뿐, 어떠한 생명체든 무기질이든 어떤 형태의 살아있다 라고 여긴 모든 것은 없다. 있다 라고 여겨질 뿐, 있게 되어 태어났으니 움직인다 라는 말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없다. 없이 없어져 사라져 간다. 매 순간 순간 사라질 뿐, 존재는 단지 경계선 마냥 닳고 닳아 사라지는 지평선 마냥 경계를 이룰 뿐, 시간에 존재는 없다. 무수히 많이 보낸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시간 속에 존재는 없다. 상상 속에 존재한다 말 할 수 있던가?

생각 만으로 존재한다 말할 수 있던가?

존재라는 건 보여야만 인정되는가?

살았던 사실 자체가 그 흔적이, 그 기록이 살았다 라는 걸 나타내 주는 때까지 살아있다 라는 존재로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살아간다 함은 행함에 따라 없어지는 존재감이라 할 수 있다. 남겨진 건 쓰이기 마련이나 그렇다고 지난 시간의 흔적을 존재라 칭하지 않듯이 앞에 살아갈 생각이나 상상을 존재라고 칭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존재라는 건 지나 없고 앞으로 없는 사이의 현 상태에서나 가능하다. 태어나 있게 되었으니 살아간다 라는 말처럼 연속되이 표현하는 것은 그렇게 여기고 싶은 마음일 뿐, 사실 태어나 있게 된 연속촬영된 18분의 1에 지나지 않아 그렇게 인식될 뿐, 우리는 단면의 연속 선상에 흐름을 연속이라 칭해 바라볼 뿐, 연속이 아니라 면면이 펼쳐진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단편의 집합을 바라볼 뿐이다.

있어 행하니 없이 남아 이어간다. 행하니 나아간다 라기 보다는 이렇게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살아간다 라기 보다는 있어 행하니 없이 남아 이어진다.

있어 행하니 없이 남아 이어진다. 어디든 무엇인지는 있게 되어 시작되어 볼 뿐 아직은 찾지 못했다.

"인간은 쉽게 하나의 환경세계에서 이탈해서 다른 환경세계로 이행하곤 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환경세계에만 빠져 살 수는 없다."

환경은 곧 바탕이요 토대이면서 배경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수놓는 그림판일 뿐 환경은 그저 주어진 상황과 같다. 인간을 환경과 동일하게 보게 되는 경우 해석이 어렵다. 인간 또한 환경에 속하니 환경이 태어나 있게 되어 환경 자체가 돌아가는 우주의 순환원리처럼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그저 환경에 속한 부속일 뿐이라는 시각이 그래서 필요하다. 다만, 인간으로서 태어나 환경 속에 살아가게 된 그 면면이 인간으로서 해석하고 남기고 행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이 만약 인간에게 주어진 몫이거나 역할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간다. 다만, 푼다 라는 사실과 같이 없이 있어 하게 된 행위를 함에 따라 없이 남게 되어 이어지게 된 순환고리에 대해 없고있든 있고없든 파고듦은 무의미하다. 이미 출발했기 때문이거니와 이 세상 만물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못 보면 못 본대로 보게되면 본만큼 있어 행하니 없이 남기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습관 없이는 살 수 없다."

"인간은 기분 전환과 지루함이 뒤섞인 삶을 살아야 한다."

우주는 인간 없이 살 수 없을까? 우주는 기분 전환과 지루함이 뒤섞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우주 또한 있어 행한 객체에 불과하니 살 수 없는 조건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의 습관처럼. 그렇지만 습관을 반복에 의해 형성된 행위의 연속이라고 하면 이는 마치 프로그래밍된 입력과 결과값처럼 대응할 뿐, 습관으로 일어난 일이 과거 일어난 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습관처럼 여기고 습관이라 칭할 뿐 이미 없이 남긴 흔적에 지나지 않으니 인간이 습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전제는 인간의 삶이 단편이라거나 면 면의 집합이라는 시각과 대치됨을 볼 때 불완전하다.

새로운 생각을 끊임없이 할 수 없다 라는 전제 또한 마찬가지의 경우다. 아니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지 않았을 뿐이다. 고로, 인간은 습관 없이 살 수 있다. 인간은 새로운 생각과 습관, 혹은 둘 중의 하나만으로도 살 수 있다. 이는 모두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이나 환경에 속한 인간이 선택할 수 밖에 없이 내몰렸을 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이 여럿 대치되거나 인간 중심으로 기술된 종전 철학자들의 주장들이 불완전한 이유이기도 하다.

"수학 공식의 내용이나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수식을 대입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공식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알았다 라는 감각은 얻을 수 없다."

"단지 들은 것을 들은 대로 수행할 뿐이다."

앞으로 이리 될까 두렵다. 그렇지만 이는 환경이 변화됨에 따라 속도에서 뒤처진 인간이 처한 상황이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연산과 속도, 인공지능이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낫다. 단지, 인간이 인공지능과 달리 행함에서의 생명력을 중시할 지, 생명력의 범주에 대해 생각, 사상, 의지, 의미, 상상, 꿈과 같은 영역으로 확장되는 인공지능과 대치하면서 내어준 '단지 들은 것을 들은 대로 수행할 뿐인 세상'과 마주함이 자연스러워질 것임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현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있어 행한다. 있게 되니 움직이게 되었다 라는 말과 같다.

 

"인류는 기분 전환이라는 즐거움을 창조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인류는 상황이나 환경에 대한 인식이 날로 뒤떨어져서 안정감을 얻었다는 착각 속에서 지루함에 대한 기분 전환이라는 즐거움을 창조한다는 지혜라고 칭하는 놀이에 빠져있다고 보는 건 어떨까?

인류는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 그렇게 여기고 그렇게 길들여졌을 뿐, 야생에서 홀로 살아남을 수 없다. 인류는 사회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안주하게 되었고, 지루하게 되었으며, 기분 전환하게 되었고, 즐겁다 라는 걸 하게 되었다. 홀로 살아남기 위해서 라면 달리 바라봐야 한다. 그럴 일이 있겠어 라는 설마 하는 생각을 배제한다면 우리 인류는 홀로 있기 라는 있게 되어 행하기와 있어 행하니 없이 남겨 이어지기를 할 수 있어야 하건만 인류의 가장 큰 맹점은 홀로 존재하기 어려워 하고,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된 집단화 혹은 사회생활에 있다. 어쩌면 저출산이 발생하는 것은 인류가 단종되어야 하는 이유 중에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라지게 되는 수순으로 생각되어지기까지 하다. 여기에 인공지능이 대체된 세상에서 인류가 할 일이 없겠냐마는 무수히 많은 인류의 대부분이 훈련되지 못한 채 있어 행하게 된 이면을 탐구하여 스스로 존재감을 찾을 일이 아니된다면 때늦은 자괴와 자멸은 불보듯 뻔하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다가올 세상은 인간성을 찾자는 것이 아니라 있어 행하니 행하는 객체로서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이나 이성, 혹은 상상, 기대, 의지, 의미 등 여럿 부여되어 만들어낸 개념들로 인해 정작 있어 행해야 하는 바를 포기할 지 모를 일이다. 어찌 해야 할까?

있어 행하니 없이 남겨 이어지게 한다. 이를 이해하고 행할 인류는 과연 인공지능 시대, 기술과 물자, 우주 개척시대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험과 시험,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휩쓸려 갈지 모를 일이다. 만약 이 모든 일들을 생명을 중시한 나머지 인공지능에게 모두 맡겨 버린다면 우리 인류는 우주시대에서는 인공지능 다음으로 쓸모를 인정받게 되어 점차 개체수나 하는 역할, 그리고 온갖 기술로 도배된 기계화된 몸이나 가상현실화된 뇌로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진화를 논할 지도 모를 일이다. 있어 행하니 없이 남겨 이어지게 한다. 대체될 것은 대체되어 있어 행하니 아무런 어떠한 것도 제약이 없다. 

인간은 무엇이라고 정의될 것인가? 

아니, 인간은 무엇이라고 정의할까? 과연, 세포로 구성된 유기체? 혹시, 감정과 이성, 신체로 구성된 정신체?

잊지말자. 인간이란 있어 행하는 주체가 아닌 객체이며, 환경세계를 구성하는 면 면의 단편에 머물러 행하게 되는 부속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철저히 내려놓고 인간 중심이 아닌 그렇다고 우주 중심이 아닌, 어떠한 환경적 요소나 요인, 바탕이나 배경이 아닌 그저 있어 행하게 된 객체로서 바라볼 때 드러나는 인간성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즐기는 것과 사고하는 것"

인간이 마치 주체라도 된 양 말한다. 인간은 높은 환경세계 이동능력을 갖고 있다고도 말한다. '있어 행하니 없이 남겨 이어지게 한다'에서 행하니에 해당하는 것일 뿐, 그 이상('없이 남겨')도 그 이하('있어')도 아니다. 이어지기 위해 남길 때 보다 의미를 부여하거나 의의를 삼는 건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즐기는 것과 사고하는 것 등 상대적인 것들은 진실에 가깝지 않다. 있다와 없다(근원) 조차 구별하지 못하는데, 있어 행한 것들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감정이 육신에 앞서고, 이성이 감정을 이겨낸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상상이 마치 현실 너머에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다.

모든 것들은 있어 행해지는 산물일 뿐, 육신, 감정, 이성, 상상, 현실은 그저 있어 행해지는 산물일 뿐이다.

 

2024.4.24.

"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경쟁사회에서는 혁신성이나 창의성이 발휘되기 어렵다."

"다양한 형태로 사고하고 협력하는 신뢰사회에서 혁신적인 선도기술이 나온다." 

- 문승현 교수(과학기술의 발전, 경험에서 데이터 과학까지)

나 또한 이와 같은 의견이다. 경쟁 보다는 신뢰가 앞으로 미래, 펼쳐질 세상, 무수한 변수가 넘치고, 면과 면이 보여주고 있는(합쳐지고 병합되며 뒤집히고 꺽이는 등) 세상에 필요하리라고. 같은 목표나 하나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선장'이 되기 위한 경쟁사회 보다는 각자의 역할이 모여 배가 스스로 움직이고 향해가는 신뢰사회가 기술발전에 힘입어 현재 만연한 5:5 정쟁 보다는 타협과 협의, 토론의 의사결정 사회로 진전할 것으로 본다.

부속(인류)이 제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 마치 우주 만물이, 지구계의 생성과 소멸 과정이 그러하듯이 인류의 있어 행하는 모든 활동이 정반합이라는 과정을 거친다손치더라도 그 바탕에는 경쟁>신뢰 or 경쟁+신뢰 or 경쟁<신뢰 중 어느 형태가 아니어도 좋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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