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정부, 좋은 국민’의 덕목
경향신문 2018.9.17.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토스카나 지방에 시에나라는 도시가 있다. 1995년 도시 전체가 유엔에서 세계문화유적으로 지정될 정도로 토스카나 지역의 보석으로 불린다. 인구 5만의 작은 도시이지만 시청을 중심으로 펼쳐진 광장은 연간 수십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명소다.
특히 시청 내부의 벽화는 14세기 서양 미술사 그 자체라 해도 좋을 정도의 걸작들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에서도 ‘9인의 정부’방이 흥미롭다. 한때 시에나 공화국을 통치했던 정부 이름을 인용한 이 방에 ‘좋은 정부’ ‘나쁜 정부’ 알레고리가 있다. 정의, 절제, 화합 등은 좋은 정부의 덕목으로, 폭정, 탐욕, 허영의 사회를 만드는 건 나쁜 정부의 모습으로 의인화했다. 그리고 ‘좋은 정부의 영향’을 활기찬 도심과 평화로운 농촌 모습으로 시각화했다.
엊그제 농민들이 여의도에서 집회를 하며 ‘밥 한 공기 가격 300원’ 보장을 주장했다. 올해는 향후 5년간 적용할 ‘쌀 목표가격’을 결정하는 해이다. 쌀 목표가격은 농가 최저소득 보장을 위해 지급하는 ‘변동직불금’의 기준금액으로, 5년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기준가격에 따라 결정된다. 농민들에게는 ‘5년간의 연봉’이 결정되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현재의 80㎏ 기준 18만8000원은 2013년부터 적용된 가격이다. 농민들은 2017년 산지 쌀 가격이 1998년과 같다며, ‘정권이 4번 바뀌는 동안 밥 한 공기에 200원을 받으며 버텼다. 이제 한 공기 쌀값을 300원으로 올려달라’고 호소한다. 농민들의 주장대로라면 80㎏ 기준으로 24만원 정도다. 지난 13년간의 물가 및 생산비 상승률을 반영했다면 올해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농업은 매우 혼란스럽다. 쌀값만 문제가 아니다. 농업생산인구 감소로 농업·농촌의 지속 가능성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위기 극복을 위한 백화제방의 처방이 제시되지만 충분한 논의와 국민적 합의 과정은 더디다. 워낙 누적된 문제가 많고, 사회·경제적 구조와 연계된 복잡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기가 맞는지, 위기라면 어떤 위기인지,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실태 파악이 먼저다.
특히 농업의 근간인 농지이용실태와 전업농가에 대한 전수조사가 필요하다. 산업화와 개발시대를 거치며 많은 농지가 훼손되고 변용되었다. 또 농촌에 거주하는 이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거나 전업 농민인 것도 아니다. 축산업의 빠른 성장과 농업생산의 집약화로 환경이 악화하고, 농가의 농업외소득 의존도가 갈수록 커지는 등 농가소득구조가 바뀌고 있다.
농가의 양극화도 문제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00년 이후 대농과 영세농이 증가하고 중농그룹의 비중은 크게 줄고 있다. 농축산물 판매액 기준으로는 연 3000만원 이상 농가와 500만원 미만 농가가 늘고, 나머지 구간은 줄었다. 가뜩이나 기본소득이 낮은 구조인데 그 내에서 다시 양극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어느 나라나 농업은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고, 농촌은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정보통신기술(ICT)과 인공지능 기술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에서도 농업·농촌의 역할은 작지 않다. 국민건강, 식량주권, 국토환경보전과 유지, 공동체의 전통과 역사성 등 사회문화적, 경제적 역할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농업정책은 개발연대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 아직도 생산성을 절대시하는 농업정책 모델이 작동 중이다.
농산물 공급이 부족하고 소비가 단순했던 시절 ‘산업’으로서의 농업정책의 타당성은 이미 약화되었다. 경쟁력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산업’을 농업정책의 유일한 비전으로 설정하는 한 지금의 복잡한 농업·농촌·농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것은 199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지속한 농업구조조정의 미미한 성과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돈만 버는 농업에서 지속 가능한 농업으로의 농정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농업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농민-국민 사이에 충분한 논의와 합의가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처럼 정부 중심으로 중앙에서 아래로 관철하는 방식으로 될 일이 아니다.
기업의 역할도 중요하다. 지금 우리 농업의 현실은 한국 자본주의 전개과정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한국 농업은 지난 고도성장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버텨왔다. 그에 비해 대기업은 큰 혜택을 입었다. 따라서 대기업은 농업·농민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이 2017년부터 조성하고 있는 농어촌 기금이 있다. 농어촌 개발 및 활성화, 농어촌 주민복지, 농수산물 생산·유통·판매 등에 사용할 기금이다. 1년에 1000억원씩, 10년간 총 1조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현재 출연금액은 475억원으로 목표액에 턱없이 모자란다. 그런데 기금 출연처를 보면 공공기관이 372억7763만원으로 약 98.6%를 차지하고, 대기업은 4억1090만원으로 전체의 1.1%에 불과하다. 과거 오랫동안 수혜를 본 수출 대기업들이 정작 기금 출연에는 인색하다는 것은 기금 조성 목적을 생각해 볼 때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매년 가을추수가 끝나면 농민들은 또 다른 농사를 지으러 서울에 모인다. 농민 스스로 ‘아스팔트 농사’라 말하는 시위를 하기 위해서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지만 그들은 ‘아스팔트 농사’를 그렇게 매해 한다. 정부와 국회는 물론 국민에게 ‘우리도 있다고, 관심을 가져달라’는 절박한 소리로 들린다. 시에나 시청 벽화의 ‘좋은 정부’ 덕목은 ‘좋은 국민’의 덕목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약자나 소외계층을 보듬는 일은 정부의 역할도 크지만 국민의 관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농업은 국방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배워왔다. 그것은 세상이 빛의 속도로 바뀌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2007년에 일어난 세계자원전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정부와 국민 모두가 농업, 농민, 그리고 농촌의 어려운 현실에 배전의 관심을 갖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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