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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어떻게살것인가

어~찌합니까

by 큰바위얼굴. 2021. 6. 18.

어~찌합니까

어~찌합니까

 

앞날이 두려워서, 불안해서 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내가 해 온 일들이 미흡하고 부족해서 자책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을 때 하는 말에 가깝다.

닥친 현실이 버거울 때 내 뱉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처한 지금 상황과도 같을 만큼 두루 쓰이는 말이다.

 

 

오늘 아침을 시작한다.

 

어제 매일 산책로에서 만난 소음을 줄이고자 전달한 결과, 라디오 소리는 뚝 끊겼고 띠~ 하고 울린다.

이런 결과를 원한 게 아닌데 말을 너무 길게 적었나 보다.

 

다른 소음인 길가에 매어놓은 개 짓는 소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잠시 지나가는 걸 같구 그러세요?" 라는 주인의 말투와 표정에서 기나긴 싸움(?)을 예상했다.

1번 더 마주한다면 시청에 민원을 넣을 겁니다. 그 전에 옮겨주십사 하는 청을 해볼 생각이다.

제3자의 판단이 필요하다.

 

매일 매일 산책하는 길, 

개 짓는 소리,

잠시 지나가면 족하다는 말,

그런데 시끄럽고 신경을 쓰이게 한다.

 

이는 예전 도축장에 매어놓은 개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에 매어놓으니 볼 때마다 지나칠 때마다 짓더란 말이다.

그런데 자리를 저쪽 한 적한 곳으로 옮기니 짓는 소리는 없어졌고 쓰담쓰담 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니 그 또한 보기 좋더란 말이다.

 

이런 얘기를 차근차근 전해볼까 한다.

물론 그래도 통하지 않으면 반 협박(?)을 하고야 말겠닷!

 

다음 번에는 여기에 그 상황을 적나라하게 찍어서 올리겠다. 이해를 돕고자.

 

 

 

< 길가 개 짓는 장소 사진 >

 

 

 

 

 

이처럼,

하루에 마주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감정이 일고 사라지고 남기고 지나간다.

어떤 감정은 묵직하게 남아 계속 괴롭힐 때가 있고, 어떤 감정은 소소한 즐거움을 여운처럼 남겨두고 잔잔한 바람처럼 산들거리는 속삭임을 건낸다.

 

망망대해,

1척의 배가 갖는 의미는 애써 앞에서 구구절절 설명했듯이

 

오늘은 '한다' 라는 의미에 대해 풀어보았다.

왜 감정인가?

왜 감정이 중요한가? 혹은 필요한가? 혹은 감정만한게 없는가? 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한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은 '한다'에서 보듯이 완전무결하다. 한다 는 말은 어떤 꾸밈없이 정갈하다. 단, 그게 다다.

한다 라는 말에서 보듯 이는 지극히 이성적이면서 딱부러지는 말이면서 간결하다.

여기에 덧붙인 수많은 언어들은 '나는 재밌게 한다', '나는 그것을 하니 좋더라', '나는 뭐뭐 때문에 있다' 라거나 하는 꾸밈이 붙는 순간 되살아 난다. 풍요롭고 다채로워 진다. 감정이 붙으니 살이 찐 듯하다.

 

'나는 산다'

 

그래 살지, 살지 않겠어?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 '나는 ... 산다' 라거나 '나는 살아서 ... ' 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풍성해지고 다채로워 진다. 문장이 살고 살아있는 문장이 다시 내게 다가오며 긴 여운을 남긴다. 

 

'나는 산다' 처럼 정이 없는 말도 드물다.

나는 살지, 그럼 죽어? 라는 반문조차 생긴다.

 

내가 살아 뭐해? 하는 말조차 감정이 실린다. '나는 살다' + '뭐하다'의 합쳐진 말이면서 '뭐하다'의 꾸밈이 붙는 순간 의미를 더한다. 이처럼 1척의 배가 선착장을 출발하였고 그럼 나아가야 한다. 되돌아 갈수도 있다만 굳이 역행하는 혹은 되돌아보는 혹은 깊숙히 파고드는 성찰 보다는 앞날을 헤쳐나가면서 함께 하는 삶 또한 멋지다.

1척의 배가 나온 이유를 궁금해 하기 보다는 1척의 배인 지금, 배로서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필요하다.

 

나는 산다. 살아 뭐해? 라는 말에서 한탄과 비난, 아픔, 고통이 물씬 담겨있다.

어~찌합니까? 하는 말이 이와 같다.

 

내가 사는 건,

내가 있는 건,

내가 하는 건

모두 그런 감정에 충실하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내가 사는데,

내가 있는데,

내가 하는데

아무런 꾸밈이 붙지 아니한다면 이처럼 삭막하고 정이 없을 수 있을까?

 

 

https://youtu.be/7Zshi5Z6HvU

 

 

 

그래서 내가 할 건 감정에 충실하고 그 감정을 이겨내려 하기 보다는 그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 감정의 파도에 듬뿍 젖어 그 반대의 감정이 용솟음치도록 하는 거, 태우고 태우다 남은 잿더미에 산들바람이 불꽃을 되살리듯이 매말라버린 감정이 아닌 그 이상의 아픔, 고통, 용서, 희망, 속죄, 미안함, 상실, 우울 이라는 색이 칠해졌다면 그 위에 입혀보자.

 

빨강색, 파랑색, 노랑색, 보라색

다채로운 색깔을 입혀보자.

 

때론 의미를 부여하고 때론 그냥 무심코 때론 가만히 있어도 좋겠고

내가 사는 건, 내가 있는 건, 내가 하는 건 모두 이런 감정들이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갖기 때문에 이를 감사히 여기자.

기꺼이는 아니더라도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굳이 찾아온 감정을 배척하고 밀어내기 보다는 그래서? 그렇구나 하는 맞장구를 치면서 한껏 놀아보자. 신명나게 놀아볼까 라는 우리네 전통 모습은 그래서 여운이 깊다.

 

신명나게 얼쑤

어기여차 얼쑤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

 

우리네 조상들은 참으로 지혜롭구나

남길 만한 걸 남겼으니 그것은 바로 '신명나게', '어기여차', '덩실덩실' 이라는 표현이면서 모습이다.

마치 내 눈 앞에서 어깨를 들썩들썩 춤을 추면서 시장바닥을 생각나게 만든다.

 

죽음을 몰랐을까?

두렵지 않았을까?

죽음에 내몰리고, 두려움에 휩싸이고, 주변에서 뭔지 모를 이유 때문에 죽고 죽어 나가는 상황들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지 않았을까? 지금의 판데믹은 과거에는 일상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판데믹이라는 말을 붙여서 그렇지 사실 원인모를 죽음은 비일비재 했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였고 죽음조차 당당히 맞서는 기상을 보여주었다.

 

이는 다시말해 1척의 배는 나아가면 그 뿐이란 걸 말해주고 있고,

산다, 있다, 한다 라는 말에 덧붙은 꾸밈이 삶을 표현해 준다는 걸 알게 해준다.

 

자아성찰도 좋고 자기반성도 좋고 뭐든 '스스로' 자 자가 붙은 말은 좋다.

다만, 덧붙은 꾸밈이 붙어 의미를 갖듯이 내 주변을 내 앞과 뒤를 두루두루 채색하면서 나아가자. 1척의 배는 그렇게 의미를 갖는다. 김성호.

 

 

그리고, 아내의 답변 중에 덧붙인 꾸밈을 찾는다. 고마워~

 

 

 

  • 스스로 `自`2021.06.18 10:13

    사실 맹 하든 멍 하든 띵 하든 마음만 달리 먹으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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