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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궁극에의

바람직하다와 그냥 그래의 사이에서 찾은 '나는 나이기에'

by 큰바위얼굴. 2022. 2. 8.

바람직하다와 그냥 그래의 사이에서 고민하다보니, 다면중심 세상론은 다시 한 번 파헤쳐진다. 내가 본 앞면과 다른 이가 보는 뒷면이 하나의 면을 형성한다. 각각의 단면들은 '나는 성자다'처럼 점으로 응축되어가면서 내가 본 면과 다른 이가 본 면이 동일하도록 만든다. 

 

1부. 바람직하다와 그냥 그래의 사이

 

1-1. 바람직하다. 좋은 게 좋은 거다. 과연 그러할까?

 

우리는 자주 접한다. 왜 그러지 아니할까? 라면서 그를 탓하는 자신을 마주한다. 적극 나서서 그에게 전하지 않으면서 그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라며 다른 이에게 묻기도 하고 그는.. 그는... 왜 그는.. 이라면서 그를 중심에 두고 생각한다.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밥 1번 사지 않는 그는 정말 몰염치 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알든 모르든 우린 누군가에 대해 말을 한다. 무심코 하건 의도를 갖고 하건 우린 나 보다는 그를 중심에 두고 말한다. 도대체 그는 왜 그럴까? 그는 알까? 알면서 그럴까? 알면서 그러면 그는 정말 나쁜 사람이야 라고 말하기도 한다.

 

1-2. 그냥 그래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가 아닌 내게 옮겨와 보자. 나는 과연 옳은가? 바람직한가? 좋은 사람인가? 혹은 나쁜 사람인가? 굳이 그에게 말해야 할까? 말하지 않으면서 그를 탓하거나 그는 왜 그럴까 라며 의문을 품는 것이 바람직할까?

 

나는 답을 알고 있다. 나 또한 부족하니까. 그냥 그래 라고 인정하면 되는데 그에 대해 염치가 없느니 사람이 말야 가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이를 당연하게 말하고 여론을 만든다. 그를 바꾸기 위함이었을까? 그저 내 바람을 말하여 공감을 얻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뭘 얻을까? 그래서 내게 뭐가 이로울까? 자연스레 생각이 이어진다.

 

그냥 그래.

 

그는 그런 사람이야.

나 또한 그런 사람이고.

 

1-3. 내가 본 앞면과 다른 이가 본 뒷면이 면을 형성한 각각의 단면들이 다면으로 '나'를 중심으로 한 세상을 만든다.

 

다면중심 세상론은 나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면서 전생과 후생, 차원 너머 혹은 이를 포함한 현생을 살아가는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말이면서 앞으로 이어갈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이어달리기 하는 중에 만나는 바톤을 넘겨주는 행위에 불과하다. 지우고 다시 시작할 지언정 지워지지 아니한 생각이나 이념이 남아있어 그에 대한 영향이 감당과 충만감으로 시작될 지언정 어쩌면 지우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이어감에 있어 자연스러운 것처럼, 이어달리기를 하면 할 수록 기억하고 기억해서 이어가려면 그 얼마나 누적되어 다시 그 힘겨움조차 누적되어 감당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어달리기를 할 때 계속 내가 뛰는 것이 좋을까? 비록 기억은 지워졌지만 또다른 '나'가 이어달리기를 이어가는 것이 좋을까? 이어달리기는 해야 한다. 이어달리기를 하지 않고 남들이 이어달리기를 하는 중에 나는 늦거니 앞서거니 기억을 이어가면서 한다손치더라도 시차의 차이일 뿐, 결국 이어달리기는 내가 하든 내가 아닌 기억을 잃었건 아니건 남이 하건 이어달리기는 이어달리는 그 순수함을 위해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다.

 

다면중심 세상론은 '나'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나'는 나와 나, 나아가 우리가 되기도 하며 우리는 지구이거나 혹은 우주로 확대해 보아도 무방하다. 관점의 차이일 뿐. 세상은 다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 쪽 면과 다른 쪽 면이 면을 형성하여 그 면면이 이어져서 나 혹은 우리, 또는 지구, 혹은 인류라는 어떤 중심축을 만들어낸다.

 

어떤 말을 했을까? 산책길에서. 글로 쓰다보니 그것에 집중하는 또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산책길에서 마주한 나와 지금 pc앞에 앉아 있는 나는 각각의 면을 그렸고 산책길에서 그린 면이 풀이에 가까웠다면 지금 pc앞에서 그리는 면은 풀어내기 위해 혹은 보여주기 위해 또는 나타내기 위해 정리하고 있는 면이 강하다. 그래서 일까? 부쩍 피로해진다. 피로해지면 느슨해지고 글의 이어짐이 더디다.

 

 

2부. 나는 나이기에 그는 그런 사람이야

 

바람직하다와 그냥 그래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그리고 그 고민을 풀어내다보니 그냥 그래 하는 인정이 결국 그에 대한 그냥 그래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자연스레 이어진다. 앞과 뒷 면이 하나의 면을 형성하여 각각의 면이 다면이 되어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만들었다고 했듯이 그 각각의 면은 면면이 이어져 각이 진 다면체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는 곧 다시 점을 형상화하여 나아갈 궁극을 밝힌다. 

 

'그는 성자다'

'나는 성자다'

 

나나 그는 모두 그를 혹은 나를 성자라고 칭한다. 다른 면이 있을지언정 그 면조차 '그는 성자다'라거나 '나는 성자다'라는 면에 덮혀 그저 '그는 성자다'라거나 '나는 성자다'라는 면을 강하게 할 뿐이다. 다른 말이 필요없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라는 것처럼 누가 보더라도 '그는 성자다'. 하나로 응축되어 간다. 각각의 다면체는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어 간다. 그러면서 그는 그 답게 누가보더라도 그는 그런 사람이 되어간다. 

 

그는 그런 사람이야.

 

응축된 점은 다시 말해 각 면이 매끄럽게 연결된 구체에 가깝다. 각 면을 따로보기 어렵고 한 쪽 면을 보니 다른 뒷쪽 면이 분명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한 쪽면을 말함에 다른 쪽 면이 자연스레 이어져 결국 말하다보니 그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만다. 

 

 

https://youtu.be/Q3EBNmrpQ9s 바람직하다와 그냥 그래 사이에서 찾은 '나는 나이기에' /산책길에서

 

 

3부. 정리 나는 나이기에

 

산책길에서 풀어낸 '나는 나이기에'에서 못 찾아낸 단락을 글을 쓰면서 보충한다. 그래서 2부를 그는 그런사람이야 라고 수정하니 문맥의 이어짐이 자연스럽다. 

 

그는 그런 사람이야 라고 했듯이 나 또한 각각의 단면들이 형성한 다면체를 모남이 없도록 매끄럽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연스럽게. 그래서 응축된 하나의 점처럼 혹은 구체처럼 나아간다. 그래서 나 또한 그는 그런사람이야 라는 말과 같이 듣게 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여기에서 나 또한 그와 같은 입장이니까.

 

하나의 응축된 점처럼 혹은 구체처럼 각각의 단면들이 매끄럽게 이어져 나를 중심으로 한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보자. 그는 성자다 처럼 나 또한 나는 성호다 라고 칭해질 것이다. 자연스럽게. 다만, 각각의 단면들이 매끄럽게 이어진 구체와 같이 누구나 보더라도 '그는 성자다'라고 외치는 것처럼 그와 같아야 할까? 그래야 할까? 과연 가는 길이 이어달리는 길이 과연 점을 만들어내고 구체를 만들어내는 길일까? 비록 울퉁불퉁하고 감추고 싶고 부끄러워 하며 슬픔과 아픔이 각이 진 단면들이 있는 다면체와 같은 모양이라고 할지라도 과연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일까? 그냥 그런 것일까?

 

나는 나이기에 의미가 있다.

 

나는 나이기에 의미가 있다.

 

전생을 살고 왔든,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지든, 나의 선택과 판단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가든, 내 과거의 한 일이 나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할지라도 그 과거의 한 일은 나를 위한 일임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나를 헤하거나 나를 고꾸라뜨리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굳이 과거에 한 일을 들추어 보는 일은 괴로우려고 나를 몰아세워 자책하려고 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 만큼 부끄러워 하거나 그 만큼 강박한 이념에 사로잡혔다고 보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과거의 한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된다. 단지 그 뿐.

 

부끄럽거나 아프거나 기쁘거나 행복하다 라는 건 일련의 경험에서 오는 감정이면서 삶의 동력일 뿐.

 

나아가거나 업거나 뒤지거나 앞서거나 하는 상대적인 것 또한 자기가 보고싶은 혹은 바라는 바일 뿐.

 

나를 편하게 한다. 나를 위한다. 나를 이롭게 한다. 나를 괴롭히는 일조차 나를 위한 일이다.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일 뿐.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다. 하나의 단면이 단면으로 이어져 있어 다시 그 단면이 겹쳐져 응축되어 하나의 점처럼 혹은 아주 작은 미세한 구체처럼 변하여 나는 그런 사람이야 라고 형상화되었을 때 그는 나일까?

 

깍고 모자란 부분을 버리고 지운 그 모습이 과연 사라졌다고 말할까? 잊은 혹은 잊혀진 기억이라고 해야할까?

 

연연할 필요가 없다. 그는 성자다 라는 건 그가 성자라는 말이고 나는 성자가 아니다 라는 말이다. 나는 나다. 나는 성자의 피 혹은 정신이 이어졌다. 나는 이어달리기를 하는 주자일 뿐.

 

어디로 가는지, 어디를 도는지,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이루는지 그 모든 일은 그저 하게 되는 '경험'일 뿐.

 

이어달리는 주자이기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주자로서 달리거나 혹은 걷거나 그 '선택' 혹은 '판단'이 내 몫이다. 달려야 이긴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걸어도 되고 달려도 된다. 이번 이어달리기에는 골인이 없고 상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잘 달렸다 라는 것이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어달리기의 핵심은 이어달리는 그 자체에 있다. 내가 주자가 되었다고 한 들 그는 나이면서 내가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이어달리는 주자일 뿐.

 

어쩌면 이어달리는 주자는 실험체에 불과하다. 왜 이어달리는 지, 어디로 이어달려야 하는지 조차 모른다. 그저 걷고 뛰고 이어달린다. 그게 나인지 나였는지 앞으로 나일지 내가 아닌들 그런들 이어달린다. 끝은 없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끝이 없이 이어달린다. 주자는 내가 아니어도 내가 기어도 좋다. 걸어도 걷고 걸어도 좋다. 잠시 멈춰도 좋고 뒤로 달려도 좋다. 어떤 것도 좋다. 반드시 앞이라 칭한 곳으로 가지 않아도 좋다. 위로도 혹은 아래로도 가도 좋다. 뒤는 우리가 칭하는 후퇴라는 말이 아니다. 이어달리는 방향은 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각의 단면이 다면이 되어 '나'를 중심에 두고 세상을 형성했듯이 각각의 단면은 이어달리는 중이다. 그리고 그 '나'는 나이면서 우리이면서 지구이면서 우주이기도 하고 기록되면서 기록이면서 경험이면서 경험하고 흐르면서 흘러넘치기도 하는 혹은 피폐해지고 충당되고 없어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그저 형상일 뿐.

 

실체는 실체라고 보는 면일 뿐.

상상을 상상이라고 칭했을 뿐.

 

바람직하다와 그냥 그래라는 사이에서 생각이 머물다 보니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만든 각각의 단면을 나로부터 보게 되고 또다시 다른 이로부터 보게 되더라. 그리고 각각의 다면은 이어져 다면체가 되어 각각의 면들이 매끄럽게 만드는 방향으로 움직여 누군 성자가 되고 누군 성호가 되더라. 그걸 바로 이어달렸다라고 칭하더라. 그리고 이어달리기는 이제 실체를 너머 단지 칭했을 뿐인 상상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더라. 보는 것이 보는 것이 아니요 생각한 것이 생각한 것이 아니더라. 본 것을 믿고 믿는 것이 보게 된 것이 된 것처럼 생각한 것이 상상한 것이 믿는 순간 '의미'를 갖더라.

 

결국 '의미'라고 칭한 그 말이 존재, 다시말해 이어짐의 실체인 '있다'로 정리가 되더라. 이름을 주는 순간 그는 그로써 있게 되었다. 그 말이 와 닿는다.

 

다면이든, 각각의 단면들에 얽힌 경험이든, 이어달리든, 과거든, 미래든, 시간이든, 칭하든, 뭐라 말하든 결국 모든 것들은 그저 하나의 의미들에 불과하더라. 잃고 지우고 없앤들 사라지지 않는다. 의미가 없다 라는 말이 의미가 없다 라는 말이 아니라 싫다거나 아니라는 부정에 가깝다. 사실 없다 라는 말은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는 말에 가깝다. 부정하는 말이다. 다시말해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없는 것이 아니다. 즉, 있다. 모두 있고 있다. 있어야 (의미가) 있다. 이어달리다보니 이제 '공'의 영역에 닿았다. 이 또한 자연스럽다.

 

바람직하다와 그냥 그래에서 출발한 놀이는 결국 '공'의 영역에 닿았고 그 놀이는 다시 출발한다. 없이 시작한다는 말이 아니라 있기에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저 하나의 형상에 불과 할 뿐을 알았다면 그 놀이의 주자는 주자로서 충분하다 할 만하다. 상처나 부침이 기쁨이나 극치는 하나의 형상에 불과하다. 형상조차 나를 살찌운다. 형상이 '공'과 다를 게 무어냐. 결국 마주한 것이 돌고돌아 '공'이 되었든 '형상'이 되었든 그게 무어라고.

 

이어짐이 어쩌면 전부일까.

 

굳이 찾아 헤메지 아니하면서 좇고 있으니 말 다했다. 이어짐을 놓는 날, 아마 주자가 바뀌겠지 한다. 다시 만날 그 날을 위해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이다지도 씨유(See you) 라는 다시 보자 라는 말을 정겨워 하나 보다. 것봐라, 나는 이미 알고 있잖느냐. 이어짐이 어쩌면 전부라도 되는 양 이미 주자라고 인식한 양 실험체이면서 것도 아무것도 아니면서 잘도 씨부리는 건 어쩌면 그 투박하고 토속적인 말조차 이제 담아내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살고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더라. 찰라에 말문이 막히더라. 뭐랄까? 형용할 수 없다 라는 말조차 그걸 표현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저 말문이 막혔고 할 말을 잃고 떠오르는 태양에 그 찰라가 평온하더라. 

 

말하지 않아도 좋아 라고 하더라. 조금 많이 피로해진다. 9시반을 갓 넘어섰다. 6시부터 몰입했으니 이 또한 참으로 가련하구만. 알아주길 바라지 않듯 알아봐주길 바라듯 뜻이 이어지길 간절히 원하면서도 아닌척 하듯 아닌것을 받아들여 마음이 평온하듯 아니어도 기어도 좋듯 그저 좋다. 모두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주자로서 전하고 싶다. 

 

바라고바라다보면 이루어진다.

 

맞든 그르든 너무 연연하지 말고 정진해보자. 나는 성호다.

 

 

 

 

  • 스스로 `自`2022.02.08 17:27

    그래. 나는 성호다. 성호답다. 그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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