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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나의 이야기

연연 (戀戀)

by 큰바위얼굴. 2022. 5. 31.

코에 힘을 빡 준다. 숨을 크게 들이킬 때 코에 힘을 주어 평수를 넓혀야 해. 안 그러면 숨 쉬기가 곤란해. 가뜩이나 숨을 자주 멈춘다는데 코 평수라도 넓혀야 좋지 않을까? 그래서 일까? 아주 종종 코에 힘주는 놀이를 한다. 장난을 친다.

주식이 하염없이 떨어질 때면 에이 조금이나마 남겨놓을 껄 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물론, 주식이 쑥 쑥 올라갈 때 남겨진 돈이 있다면 아쉬워서 잠을 설칠 때도 있다.

 

아픈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아파하고 있다. 몸이 아픈 건 아프다고 티라도 내기 마련인데 마음이 아픈 건 참아내려는지 잘 티가 나지 않는다. 

 

생각 또한 쉬고 싶어한다. 끊임없이 반문하고 자문자답을 진행하면 버겁기 마련이다. 답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사실 답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어쩌면 받아들이는 감정의 문제일 수 있기도 하다. 

 

'연연할 필요가 없다'

 

떨어지면 그 만큼 오르기 마련이고, 다시 오지 않을 고점이라면 다시 목돈을 만들어 본전을 만들면 될 일이다. 아직 손절매가 익숙치 않다. 버림 보다는 복구가 익숙하다. 설마 하다가 더 떨어진 상황을 지나치고 다시 더 떨어지고 오르고 올라 어느 선을 그릴 때 우린 그때 살 껄 하기 마련이고, 미련스럽게도 설마 더 떨어지겠어 하다가 더 더 떨어진 국면에선 여력이 없어 지켜보는 관중이 된다. 주식이 이런 걸, 삶이라고 다를까?

 

가다보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 하거나 넘어져서 무릎이 까질 때가 있기 마련임에도 마치 절대로 넘어지면 안돼 하는 듯한 태도를 지향한다. 넘어져도 돼. 뛰어도 돼. 그런데 예티와 해나에게 지렁이를 먹어도 돼와 똥종이와 비닐, 씨앗들에 대한 먹어도 돼는 잘 되지 않지만 말릴 수 없다는 현실을 마주하고나선 내 감정에 국한됨을 알게 되어 추스린다. 엉키고 풀어내고 뭉쳤다가 떨어졌다가 킁킁 거리면서 가다가 어떤 냄새에 끌렸다가 팽팽해진 줄로 인해 걸음에 보조를 맞춘다. 그렇게 바랐고 교육을 시키고 있다. 산책길은 가는 것이 첫째요 코킁킁 보단 걷는데 초점을 두었으면 하는 바람인데 아직은 어쩌면 평생 저럴지도 몰라 하면서 걱정 반 우려 반 그렇게 섞어서 바람 속에 그러지 않기를 하는 기대 속에 계속 나아간다. 잠깐 딴 생각할라지면 딴 짓하는 아이들, 그러니까 그러게. 지금 난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생각인가?

사념인가?

바람인가?

반성인가?

 

이는 과연 현실이라 할 수 있을까?

최근 부쩍 상념이 많아짐은 어쩌면 아이들의 앞날에 대한 가이드, 아빠로서의 역할, 그로인한 내 삶까지 연결한 어떠한 직업까지 고려할 때 느낀다. 상당부분이 시작도 하기 전에 접어든다. 내 태도가 내 지나온 길에서 과연 텃밭을 가꿀까? 과연 임야를 가꿀까? "여보, 당신은 아마 잘 할꺼야. 당신이 하고자 한다면." 이란 말을 듣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과연 임야 두 동산을 구해 산책로를 만들어감이 내 노력이 아낌없이 투영되었을 때 과연 내 집앞에서 길 거리에서 도심에서 호수공원에서 아파트 단지에서 산책하며 느끼는 그 감정을 줄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다. 그래서 접는다. 마치 전원주택을 바라지만 막상 가본 전원주택의 삶은 굳이 살아보지 않아도 알게 된다. 교통은 불편하지 산책로는 부실하지 동떨어진 거리에서 굳이 그런 조금 평수가 넓을 뿐, 그런 공간에서 살고 싶니? 라고 물었을 때 아니. 그러니 두 말 하지 않고 우린 둘러본 전원주택에 대한 삶을 접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가계독립만세'

 

제1목표를 세웠고 과실을 수확할 날이 다가온다. 제2의 목표라기 보다는 수입이 꾸준히 이어지길 바라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고 그 방향에서 사업의 모습이든 제2의 직업이든 창업이든 뭐든 한계를 두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건 메이지 않는다 와 가능한 여유로움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원한다면 아이들의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 정도. 그렇다고 해도 딱히 그것조차 연연하지 않는다. 바라고바라는 몫에 인위적인 작위적인 강압적인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만들어준 그런 터전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살아가면서 온전히 느껴보기를 바란다. 어쩌면 가혹할지도 어쩌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삶은 경험의 연속이며 감정의 변주를 연주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나 업이나 연에 대한 경계를 세우지 아니하고 그렇게 여기도록 전달하고 있다.

 

'연연하지 않는다'

 

필요는 때에 따라서 혹은 공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필요가 없다 라는 말에서 선택형이라는 느낌과 함께 유보하는 듯한 태도를 엿본다. 연연하지 않는다 라는 말은 답에 가깝다. 연연할 필요가 없다 라는 건 연연하고 싶은데 연연할 수도 있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거나 선택한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까. 굳이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니까 라는 말처럼 마치 우린 어찌할 수 없이 마주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린 굳이 연연할 필요가 있니? 라는 말을 한다. 지운 것은 존재요 얽히고 섥힘에 대한 흔적, 그 경험은 남아있다. 그로인한 삶이 허허로운 가운데 외롭더라도. 더 열중한다. 가족에게. 그리고 가족이 될 이들에게. 그리고 조금은 확장된 지인까지 넓혀볼까 생각중이다.

 

살아오메 그와 난 피로 연결된 사이라네.

자식이 결혼한다네.

어! 살아오메 그와 마주한 적은 부모께서 돌아가신 그 날.

그래도 첫 발을 내딛을 때 너무 감사했다오.

그 마음으로 당장 서둘러 전화를 건다. 비결이에게. 그리고 한참을 반갑게 통화한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전한다. 알더라. 그래 잘한 일이다. 연의 맺음에 대해 굳이 판단치 말자. 가족이란 "저희집은 특히 친척이 없잖아요" 하는 말에, 다른 말이 필요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가끔 봐도 좋은, 소식이 들려 좋은, 잘 살기를, 즐겁기를, 그렇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삶을 살아가도 좋은, 어찌 될 것인지 모를 어떤 모모함에도 못 할 이유가 없듯이, 그렇게 해 주고 싶다 라는 마음에 하자.

 

마음이 머물도록 돈을 쓰자. 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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