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방주가 우리를 구원할까
한겨레 2014.11.13
한국관에서 우관 스님이 발우공양 시연을 하고 있다. 사진 박미향 기자 |
[매거진 esc] 요리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10월22~26일 열린 국제슬로푸드대회 ‘2014 살로네 델 구스토 테라마드레’ 참관기
이우고등학교 2학년 정민경양은 지난달 20일 학교 가는 버스 대신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음식이나 요리 관련 일을 하고 싶어요. 건강한 음식에 관심이 특히 많은데 이런 걸 공부할 수 있는 대회가 열린다고 해서 참석하러 가요.” 목소리는 낮지만 자신의 진로를 분명히 말하는 모양새는 야무지다. 이우학교 영양사인 어머니가 큰맘을 먹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일이다.
지난달 22일(현지시각)부터 5일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는 제6회 국제슬로푸드대회인 ‘2014 살로네 델 구스토(미각의 향연) 테라마드레(어머니의 땅)’가 열렸다. 2년에 한번 열리는 이 대회는 세계 175개국의 슬로푸드 단체들이 이탈리아에 모여 건강한 먹거리와 삶의 방식, 환경과 생태를 고민하는 음식문화 등에 관해 전시, 워크숍, 토론 등을 펼치는 음식축제. 올해 10년의 역사를 맞이했다. 2007년부터 한국에서 슬로푸드 운동을 펼쳐왔던 슬로푸드문화원은 올해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슬로푸드 코리아)로 승격됐다. 한국협회는 대회 쪽의 요청으로 100여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다. 정민경양은 대표단의 최연소 참가자다. 토종닭 종자인 연산오계 지킴이로 나선 이승숙, 매크로바이오틱 요리 연구가인 이명희, 팔당생협 대표 노재문, 울릉도 산채 생산자인 한기숙, 부산막걸리학교 교장 김단아, ‘어린농부’ 대표인 정금자씨 등 대표단은 먹거리와 관련된 일을 하는 전문가들이 대부분이다. “훌륭한 요리사가 꿈”인 대학생 차현동이나 고등학생 김광석 같은 이들도 있다. 사찰음식 대가들인 선재·법송·우관 스님 등 승려 11명도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제이미 올리버(사진 왼쪽 둘째)가 국제슬로푸드협회 카를로 페트리니 회장과 토론석에 앉아 있다. 사진 박미향 기자 |
대표단은 개막식 이틀 전 이탈리아 토리노에 도착했다. 밤 12시. 삭풍이라도 부는 걸까! 낙엽이 쉭쉭 소리 내며 구르는, 깜깜한 토리노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떠오른다. 때로 유럽의 고풍스러운 건물은 어둑한 밤의 장막을 만나 괴기스럽다.
다음날 대표단이 운동화 동여매고 나선 곳은 대회장이 아니다. 최고급 식초, 발사믹의 생산지인 모데나다. 모데나의 전통 방식으로 만드는 발사믹은 세월이 맛을 만든다. 람브루스코 와인 품종으로 즙을 내 오크통, 밤나무통, 뽕나무통 등에서 발효, 숙성시키는데 작은 통으로 옮기면서 숙성시키기에 12년 넘게 걸린다. 물론 12년산만 있는 것은 아니다. 4년, 5년, 8년산 등도 있지만 반짝거리는 윤기, 끈적거리는 점도, 은근한 단맛과 고급 초콜릿이 제공하는 차진 쓴맛 등의 조화 등은 12년산보다 덜하다. 요즘 우리 마트에도 발사믹 식초를 판다. 하지만 모데나 발사믹과는 다르다. 10년 이상 된 식초를 특정 비율에 따라 섞으면 ‘발사믹’을 붙일 수 있다는 이탈리아 법규 때문이다. 더러 와인식초에 색소와 캐러멜색소, 옥수숫가루 등을 섞어 2~3년 숙성시키고는 ‘발사믹’이라고 붙이고 비싼 가격에 파는 경우도 있다는 풍문도 들린다. 12년 이상 된 모데나의 발사믹에만 ‘전통’(Tradizionale)이란 글자를 박는다.
유기농 가축 사육하는
협동조합 농가 방문
“얼마나 버나” 물으니
“돈 질문 말고 삶이 어떠냐 물어달라”
국제관 가운데에는 ‘맛의 방주’가 설치돼 있다. 승선한 우리 먹거리 연산오계, 강경 어육장 등을 관람객이 보고 있다. 사진 박미향 기자 |
모데나 지역의 한 발사믹농장에서 운 좋게 12년 이상 된 발사믹을 시음할 기회가 왔다. “음!” 대표단들의 외마디가 터진다. 오크통 숙성실에서 70년대에 발사믹을 넣은 통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태어난 연도를 수선스럽게 찾는다. 어찌 보면 모양만 다를 뿐 우리네 장독대와 다름없다. 논산 윤증고택의 씨간장은 200년이 넘는다. 버스 안에서 펼쳐지는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 김종덕 회장(경남대 사회학과 교수)의 강연은 약방의 감초다. 생산물의 이익으로부터 농부가 소외되는 지금의 우리 농촌 현실과 다국적기업들의 치밀한 침략 사례들을 알려준다. 움직이는 슬로푸드 학교다. “즐거움은 우리 식탁에 있습니다. 그 식탁에 오르는 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가족농을 살리는 일이 중요하지요.” 올해는 유엔이 정한 ‘세계 가족농의 해’다. 개막식은 22일 오후 6시. 대표단은 개막식 참석에 앞서 와인, 소시지, 치즈 등을 생산하는 협동조합 농가를 방문했다. 30여년 전 3명으로 시작한 이 농가는 항생제와 성장촉진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 사료만을 먹이는 소, 돼지와 닭을 사육하고 있다. 그 부산물로 소시지를 만들고 농가 맛집을 운영한다. 현재 조합원은 30여명. 대표단의 한 명이 조합원에게 “1년에 그렇게 해서 얼마를 버나요?”라고 묻자 예상 못한 답이 돌아왔다. “잘 모른다. 그렇게 물어보지 말고 삶이 어떠냐고 물어봐 달라.”
오미자로 만든 와인 ‘오미로제’를 김종애씨가 시음행사를 하고 있다. 사진 박미향 기자 |
토리노의 어둠이 서서히 찾아든다. 130여개국에서 3000여명의 슬로푸드 운동가들이 개막식장에 속속 도착했다. 유독 한국대표단이 카메라의 세례를 받았다. 아름다운 우리 한복으로 갈아입은 대표단과 스님들의 회색 승복은 외국인들의 눈에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번 행사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친필 서신을 회장에게 보내왔다. “기아를 물리치기 위해 결핍을 극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발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익이란 이름으로 가격 투기를 하는 것을 중지시켜야 한다.” 강한 어조로 이어진 장문의 편지 중 일부 내용이다.
한국관에는 11명의 스님들이 총출동했다. 23일 오후 3시쯤, 정관 스님이 외국인 20여명과 함께 발우공양을 시연하자 실소가 터질 만한 장면이 연출됐다. 양반다리로 앉는 게 힘든 외국인들이 이리저리 다리를 꼰다. 천으로 싼 공양그릇을 풀고 밥, 김치, 콩나물, 시금치무침 등을 천천히 담는 순서가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진행된다. 마지막에 물을 부어 공양그릇을 씻고 그 물까지 마시는 단계에 이르자 외국인들의 표정에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한다. 150g 정도의 음식을 다 먹는 데 30분이면 족하지만 한 시간이 넘어 끝난다. 행사에 참여한 이탈리아인 라우라 메를리니는 “우리는 급하게 먹는 습관이 들었다. 무엇을 먹는지 보지 않는다. 인생의 뭔가를 발견한 기분이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국제관에서 한국관은 유독 인기가 많았다. 35유로(한화 약 4만7000원)나 하는 사찰음식 밥상은 조기에 마감됐고 우관 스님의 김치 시연도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이번 한국관 운영에는 주이탈리아대사관의 지원이 있었다. 다음날 열린 ‘아시아&오세아니아의 풍부한 음식문화’를 주제로 한 콘퍼런스에서 선재 스님의 강연도 큰 호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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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관에서 발견한 사탕봉지처럼 예쁜 파스타면들.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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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대표단의 스마트폰에 띠링, 정보 하나가 떴다. 오후 3시 영국의 스타 셰프 제이미 올리버와 국제슬로푸드협회 카를로 페트리니 회장 등이 만나 토론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표단의 20대 젊은이들이 부지런히 달려간다. 건강한 먹거리로 만드는 급식을 주제로 한 토론장에는 수백명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다. 스타는 어디서든 사람들을 몰고 다닌다. 국제관 가운데에는 거대한 ‘맛의 방주’가 설치됐다. 인류가 지켜야 할 소멸 위기의 토종 종자와 음식이 방주에 승선했다. 여기에 한국의 연산오계, 울릉도 산채, 제주 푸른콩, 장흥돈차, 강경 어육장 등도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행사장은 이탈리아관이 3곳, 국제관이 1곳, 워크숍, 맛 테이스팅이 열리는 곳 등으로 구성됐다. 1만명이 넘는 인원들이 행사장 곳곳을 누비면서 프로슈토(이탈리아 햄), 치즈, 와인 등을 맛봤다. 거대한 맛 제조장이다. 이웃처럼 친구처럼 가까워진 대표단들은 삼삼오오 모여 늦도록 개별 신청해 들은 맛 워크숍 얘기를 나눴다.
농산물 유통업을 하는 박희찬씨는 첫날 자기소개에서 “가난한 이들도 슬로푸드를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세계인들이 모여 조금씩 그날을 앞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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