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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알기/경제기초

능력주의 경보

by 큰바위얼굴. 2021. 7. 16.


‘머리와 가슴과 손’의 균형 잡힌 능력주의
이진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2021.07.14 03:00 경향신문

‘머리와 가슴과 손’의 균형 잡힌 능력주의

코로나 팬데믹은 사회의 긴박한 문제에 강제로 거리를 두게 만듦으로써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전 세계를 하나의 공급망으로 얽어맨 세계화는 앞으로도 가능한가?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을 그래도 견디게 만든 디지털화는 지속될 것인가? 세계적 전염병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사회의 양극화는 완화될 것인가?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코로나 이전의 ‘정상 상태’로 돌아가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인가? 코로나 팬데믹이 폭로한 문제들이 많지만, 정의로운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능력주의’의 문제로 압축되는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 전염병이 능력주의 논쟁에 불을 붙인 대선과 시기적으로 맞물려서만은 아니다. 팬데믹은 그동안 감춰졌던 능력주의의 민낯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전에도 우리는 이미 지독한 전염병을 겪고 있었다. 그 원인은 바이러스가 아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외국을 빈번하게 드나드는 여행자나, 취미와 성향만 비슷하다면 거리를 두지 않고 서로 잘 어울리는 젊은이들에게만 이 전염병이 퍼진 것이 아니다. 마스크를 쓰고 소독제를 사용해도 감염을 늦출 수 없고, 어떤 백신도 전파와 감염을 예방할 수 없는 전염병이 코로나 이전에 이미 만연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능력주의라는 전염병이다.

오늘날 능력주의가 뭇매를 맞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와 자원을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분배해야 한다는 능력주의는 사실 아무런 잘못이 없다. 능력주의는 상황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가장 매혹적인 약속을 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비판하는 사람조차 능력주의의 매력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운명이나 신의 섭리, 사회적 신분에 따라 나의 몫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고 열심히 노력하면 정당한 자신의 몫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쉽게 부정하겠는가.

많은 사람은 능력주의를 트럼프 정권과 같은 신권위주의 출현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하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는 신자유주의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능력주의를 때리는 것을 진보적인 것처럼 여기는 지적 유행에 거리를 두면, 능력주의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능력주의를 왜곡하여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정당한 몫을 얻을 수 없게 만드는 사회구조가 문제다. 능력주의를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 오히려 능력주의의 병폐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 거리 두기 훨씬 오래전부터
능력주의는 사람 간 사이 벌려 놔
육체노동과 돌봄노동의 가치
팬데믹 겪으면서 재인식될 때
지식노동의 고평가 바로잡아서
균형 잡힌 능력주의로 가길 기대

능력이 사회의 지배원리가 돼야 한다는 데 하층계급이 상층계급과 뜻을 모은다면, 능력주의의 병폐는 도대체 무엇인가? <메리토크라시>라는 책에서 능력주의의 디스토피아를 설득력 있게 묘사한 마이클 영에 따르면, 능력주의의 가장 커다란 병폐는 능력에 따른 사회의 양극화이다. 능력을 사회 분배의 결정적 기준으로 보는 인식 때문에 아무 능력도 없는 다수는 무기력한 절망에 빠진다는 것이다. 승자에겐 열렬한 갈채를 보내면서, 동시에 패자를 조롱한다. 자신의 실패가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패자 역시 이러한 인식의 덫에 걸려 있다. 성공한 사람은 마땅히 받아야 할 노력의 대가를 받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실패한 사람은 스스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며 모욕감을 느낀다. 우리가 팬데믹으로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작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능력주의는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사이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

코로나 팬데믹은 이런 능력주의를 의심한다. ‘거리는 멀지만, 마음은 가까이!’라는 방역 캠페인은 우리가 전염병으로 물리적으로는 거리를 두지만 사회적 연대는 강화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전염병이라는 비정상적 상황에서도 비교적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눈에 잘 띄지 않았던 ‘육체노동자’와 ‘돌봄노동자’들 덕택이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장에 가지 않고도 필요한 생활 물품을 얻을 수 있었던 데는 택배노동자들의 힘이 컸다. 열악한 조건에서 검역과 방역에 헌신적으로 종사한 의료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코로나를 이 정도로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병원과 요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 그리고 등교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돌봄노동’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균형을 잃고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가 ‘손’으로 하는 육체노동과 ‘가슴’으로 하는 돌봄노동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되어 ‘머리’로 하는 지식노동을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는 왜곡된 능력주의를 균형 있게 바로잡을 것이라고 말한다. 개인의 건강한 삶에 ‘3H’, 즉 ‘머리’(head)와 가슴(heart)과 ‘손’(hand)의 균형이 필요한 것처럼, 정의로운 사회 역시 지식노동과 육체노동과 돌봄노동의 조화를 요구한다. 우리가 육체노동과 돌봄노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정당하게 보상했다면, 능력주의가 사회적 양극화를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노동을 담당하는 계층이 전염병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데 사회적 보상은 가장 적게 받는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역설이다.

우리는 손과 가슴보다는 머리에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과도한 보상을 해왔다. 누가 가장 능력이 있는 자인가?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영어 낱말의 라틴어 뿌리 ‘메리툼’(meritum)은 칭찬할 만한 가치를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능력을 칭찬하는가? 우리는 머리 좋은 사람을 칭찬하면서 ‘스마트’(smart)하다고 말한다. 일상화된 이 영어 단어는 능력이 ‘지능’(IQ)+‘노력’이라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대변한다. 오늘날 가치 평가의 절대적 기준이 된 ‘능력’은 우리의 교육시스템이 인지적 능력이 높다고 인정한 사람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시험을 잘 보고,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정보와 데이터를 잘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다. 시험을 잘 친 사람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대학을 나오면 높은 연봉의 직장으로 보상을 받는다. 스마트한 사람들이 권력을 갖는 사회가 바로 능력주의 사회다.

손과 가슴은 작고 머리만 큰 것은 기형이다. 손으로 하는 육체노동과 가슴으로 하는 돌봄노동은 인정하지 않고 머리로 하는 지식노동만 높이 평가하는 사회는 기형적으로 불공정한 사회다. 국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대신 엘리트 계층에게만 정책적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는 기형 사회다. 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임금 격차가 너무 커서 육체노동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복권에 당첨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주택을 가질 수 없다면, 사회가 건강할 수 없다. 머리와 가슴과 손의 균형을 깨는 왜곡된 능력주의는 ‘절망’이라는 병을 야기한다.

절망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다. 소득의 불평등도 문제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꺾어버리는 모욕감이 더 큰 문제다. 일자리와 함께 존엄성을 상실한 사람들이 절망으로 인해 자살, 약물 과다복용, 알코올성 간질환으로 사망하는 것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Angus Deaton)은 ‘절망의 죽음’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죽음은 팬데믹으로 인한 사망보다 덜 극적이지만 사회에는 훨씬 더 치명적이다. 우리가 머리만 중시하고 가슴과 손은 경시하는 왜곡된 능력주의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지고 우리의 삶이 정상화되면, 우리 사회는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을까? 코로나로 극명해진 능력주의의 병폐를 인식하고, 우리는 손의 육체노동과 가슴의 돌봄노동을 존중하는 사회로 발전할까? 아니면, 코로나 이후에도 머리의 인지적 노동을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고 보상하는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더 강화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가 머리와 가슴과 손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존중받지 못하는 것보다 참기 어려운 것은 없다. 건강한 몸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 머리와 가슴과 손의 균형 잡힌 능력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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