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肉日
1970년 국민 1인당 평균 1㎏ 정도였던 연간 소고기 섭취량은 2015년엔 10.9㎏으로 10배를 넘어섰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한우를 더 쉽게 사 먹게 하려는 '소고기 자판기'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육식을 억누르려던 옛 시절과 180도로 달라진 '고기 권하는 사회'다.
우리에게 육식을 억누르려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는가?
1주일에 하루 고기를 못 팔게 하면 소비량의 7분의 1이 줄어들 것이라며 시행했던 무육일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50년 전의 그 투박한 정책은 오늘 우리 식생활 수준의 향상을 새삼 깨닫게도 한다.
'고기 안 먹는 날'의 뿌리는 꽤 깊다. 6·25전쟁 중에 주 2일을 무육일로 정했던 이승만 정부는 전쟁 끝난 뒤에는 매월 25일을 '무주·무육일(無酒·無肉日)'로 선포했다. 비상시국이니 욕망을 절제하고 검소하게 살자는 것이었다. 이런 발상은 일제강점기 후반에 전시 체제라며 매월 8일마다 술과 고기를 금했던 것을 닮아 뒷말이 많았다. 게다가 1950년대의 무주·무육일은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았다. 대놓고 못 먹으니 뒷골목 요릿집에선 은밀한 술판이 오히려 더 극성을 부렸다. 일부 고위 공직자들조차 무주·무육일에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 지탄을 받았다. 흐지부지돼 가던 무육일은 1957년쯤 사라졌다.
1965년 6월, '매주 수요일은 무육일(無肉日)! 이날 하루는 소·돼지·닭 등 모든 고기를 일절 먹지 말고 식당·정육점에서는 고기를 사거나 팔지도 맙시다.' 1965년 6월 초 서울시가 내놓은 희한한 정책이다. 육류, 특히 소고기 공급이 부족해지자 내놓은 궁여지책이었다. 5∼6월 농번기엔 소에게 일을 시키느라 도축량이 줄어 소고기 파동이 일어났다. 근본적으로 고기 수요는 늘어 가는데 축산업이 근대화되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그 시절 정부는 소비를 줄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맛난 것 덜 먹고, 경제 건설에 힘쓰자는 생각이 깔린 정책이었다.
그러나 '고기 안 먹는 날'은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쌀이 모자란다고 분식만 먹는 '무미일(無米日)'을 제정했던 발상을 그대로 고기에 적용시킨 것부터가 난센스였다. 쌀은 매일 먹는 주식이지만 당시의 고기란 대중 밥상엔 어쩌다 한 번 오르는 귀한 반찬이란 걸 간과했다. 서울시는 하루 육류 소비량 통계를 근거로 '수요 무육일을 시행하면 1주일에 소 294마리, 돼지 30마리가 절약된다'는 식의 한심한 발표를 했다가 웃음거리가 됐다. 여성 단체는 "도대체 서민들이 고기를 먹으면 한 달에 며칠이나 먹는다고…'초식일(草食日)' 하루 제정으로 고기 소비가 줄어드나?"라고 비판했다. "고기를 상식하는 부유층에는 자극을 좀 줄지 모르겠다"고 이죽거리는 반응도 있었다. 그래도 정부는 '무육일'을 밀어붙였다. 1967년에는 매주 월요일로 날짜를 옮기고 이름도 '소고기 금식일'로 바꿨다. 특히 소가 모자라니 닭·돼지·토끼를 더 먹자는 정책이었다.
그런 실패의 역사가 있었는데도 1970년대 중·후반 극심한 소고기 파동이 빚어질 때마다 '무육일 부활론'은 고개를 들었다. 실제로 1978년 1월부터 대전시에선 매월 17일을 한때 무육일로 시행했다. 심지어 1977년 2월 충남도 경찰국은 음식점들이 내건 '암소등심구이' '암소갈비' '송아지고기' 등의 육류 소개 간판들을 철거키로 했다. '육류 소비를 부채질하는 광고'라는 게 이유였다(경향신문 1977년 2월 22일자).
서울시가 매주 수요일을 고기 안 먹는 ‘무육일(無肉日)’로 제정하자 ‘실효성 없는 정책’이란 비판이 일고 있음을 보도한 기사(위·경향신문 1965년 6월 5일자). 하지만 1976년 소고기 파동이 일자 ‘정부가 무육일 제정을 검토한다’는 보도가 또 나왔다(매일경제 1976년 3월 19일자).
지금까지 "고기 덜 먹자"며 수요일을 '無肉日'로 제정… 경찰, '암소갈비'등 식당 간판도 철거라는 보도자료를 토대로 내용을 재구성해 보았다(조선일보 2017년 12월 6일자).
본 기사를 접하면서 50여년이 흘러 다른 상황이지만 같은 해법을 놓고 고민중이라는 아이러니한 생각에 빠져든다. 지금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무육일’과 유사한 육식을 억누르려는 시절을 보내고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 가는 요즘 같은 환절기에는 쉽게 피곤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옆에서 “고기를 안 먹어서 그래. 내가 살 테니 고기 먹으러 가자”고 하면 갑자기 기운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가 생기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눈치를 보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단적으로, 생태학자들이나 기후학자들은 세계적인 육류 소비 증가에 대해 마뜩잖은 눈길을 보내고 있다. 육류 소비의 증가가 지구온난화를 부추긴다는 생각 때문이다. 현대 문명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가 인간의 식생활 변화이고 그 핵심에 육류 소비가 있다고 비판하면서, 미국의 경우 곡물의 70% 이상이 소를 비롯한 가축들에 의해 소비되고 있다는 사례까지 든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제러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한편,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신생기업 멤피스 미츠는 2017년 3월 맛 감별사들을 초청해 배양육 치킨 요리 시식회를 열었다. 시식에 참가한 이들이 실제 치킨과 같은 맛을 느꼈다는 소감을 전했다고 회사 쪽은 밝혔다. 농장에서 가축을 길러서 얻은 ‘전통 육류’를 대신할 ‘육류 대체식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육류 대체품 가운데 연구가 활발한 분야는 배양육과 식물성 고기다. 배양육은 세포공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등장한 제품이다. 동물 조직에서 분리한 세포를 실험실에서 배양해 얻은 고기를 말한다. 실험실에서 기른 근육세포에 고기의 색을 입히는 이 기술을 이용하면 6주 후 고기를 얻을 수 있다. 최근에는 기름이나 뼈, 피 등 고기 맛을 낼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기술에 대한 연구도 이어지고 있다.
식물성 고기의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 실리콘밸리 벤처기업인 임파서블 푸드가 지난해 내놓은 ‘임파서블 버거’다. 고기 맛의 핵심은 헤모글로빈의 구성 물질인 헴(heme) 성분이다. 콩과 식물 뿌리에서 헴의 복제 물질을 추출해 사용한다. 또 다른 회사 비욘드 미트는 식물 단백질로 유사 닭고기를 만들어 팔고 있다.
핀란드 식품 벤처 ‘골드 앤드 그린’이 출시한 가짜 고기(Fake meat) 제품인 '풀드오츠(Pulled Oats)’는 귀리와 누에콩으로 만들어져 돼지고기의 맛과 식감을 재현해낸 것이 특징이다. 건강과 맛을 동시에 추구하는 소비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제일 먼저 헬싱키 중심가 스톡만 백화점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고 100개를 시범적으로 팔았는데, 불과 11분 만에 매진됐다. 탐페레, 요엔수 등 다른 대도시에서도 풀드오츠를 판매하는 수퍼마켓에 주부들이 오전 8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육식하는 사람들도 고기 대신 먹고 만족할 수 있다”는 평이 이어지면서 풀드오츠는 육류 대체 산업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도 가짜 고기를 먹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핀란드 대기업인 파울리그 그룹이 작년 8월 골드 앤드 그린의 지분을 51% 인수하면서 안정적인 생산 라인을 갖추게 됐고, 전국의 대형 마트에 풀드오츠가 납품된 데 이어 최근엔 스웨덴과 호주 등으로 수출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핀란드에서 ‘올해의 상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금의 공장식 축산이 정말 바람직하고 우리 양심에 거리낌 없는 사육 형태라면, 왜 축산현장은 일반인에게 결코 공개되지 않는지. 배추밭도 볼 수 있고, 당근밭도 볼 수 있는데, 고기와 달걀이 생산되는 곳은 왜 볼 수 없는지. ‘자식 같은 가축을 묻는 농민의 심정’이라 말하는 축산기업들에 묻고 싶다. 자식을 진정 그렇게 키우시는지.”라고 필자는 묻는다(경향신문 2014년 2월 12일자).
고기를 먹으면 수명을 갉아먹는다?
이런저런 상황에 대해 축산인들은 탄식하는 경우가 늘어만 간다. 요즘 같아서는 고기를 먹으면 자기 수명을 갉아먹는 것마냥 느껴지기도 한다. 고기 먹자고 권하기라도 할라지면 이런저런 잡스런 생각들이 앞서기도 해서 머뭇거린다. ‘마블링의 음모’로부터 ‘육식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축산의 허점을 파고든 넘쳐나는 기사들, 이러다보니 진실은 멀고 거짓은 가깝다.
육식? 시장은 이미 커질만큼 커져서 농림업 생산액의 50%에 육박하는 이 때, 그에 비례하여 어떤 의미의 ‘무육일’(고기 먹지 말자는 주의) 또한 점점 커지는 모양새다.
無肉日
우리에게 육식을 억누르려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는가?
지금, 우리는 또다시 무육일을 하자고 하는 것은 아닐까?
진탕에 빠진 듯한 현 세태를 마주하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이 때,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식량안보의 최우선 가치인 육류에 보내는 시각이 좀 더 따스해지길 기대하면서, 세종시에서. 감사를 드린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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