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아들 영탁이가 군대에서 보낸 글이다. https://meatmarketing.tistory.com/8205
'강아지똥'
> 1단계. 저자의 시선에 동화하기
이 글은 권정생 작가의 동화 강아지똥을 모티브로 하면서도, 원작과는 다소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강아지똥 원작에서는 쓸모없다고 여겨지던 강아지똥이 결국 민들레꽃을 피우는 데 쓰이며 의미를 찾는 이야기다. 희생과 헌신, 존재의 가치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 글은 그러한 해석을 거부하는 듯하다.
분석 및 해석
-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는 사회적 메시지에 대한 반발
- “누군가의 거름으로 의미를 다하긴 싫은데”
- “숭고한 희생 아름다운 선택 다 필요 없는데”
→ 희생을 미화하는 가치관을 거부하는 태도가 보인다. 강아지똥이 민들레를 피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 주체적인 선택의 강조
- “누군가를 꽃 피우기 위한 내가 아니라”
- “누군가를 꽃 피우기로 내가 선택했다고 말해야지”
→ 타인을 위한 도구가 아닌, 스스로 의미를 찾고 선택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 모호한 경계에 대한 고민
- “분명히 ㅏ 다르고 ㅓ 다르지만 더는 모르니”
- “안타깝지만, ㅏ 와 ㅓ 중에 하나는 해야지”
→ 이 부분은 삶의 선택지 혹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듯하다. 모호한 중간 지대에서 고민하지만 결국은 선택을 해야 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 강아지똥이 아니라 민들레꽃이었다면?
“그 자체로 숭고하고 아름다웠다면 좋았을 텐데.”
→ 희생을 통해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치 있는 존재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강아지똥이 민들레꽃을 피우는 도구로서만 인정받는 현실에 대한 씁쓸함이 느껴진다.
저자의 의도와 숨겨진 뜻
이 글은 단순히 강아지똥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희생 미화를 비판하며, 존재 자체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만 의미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감상평
이 글은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반발과 함께, 자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강아지똥이 민들레꽃을 피우는 역할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강아지똥 자체로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 강하게 느껴진다. 희생을 숭고하게 포장하는 기존의 가치관을 비판하면서도, 결국 우리 사회가 여전히 선택을 강요하는 현실을 인정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짧지만 묵직한 울림을 주는 글이다.
> 2단계. 표현을 달리해보기. 여기에서 '시' 형식을 취했다.
꽃을 피우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거름이 되기 싫었다
숭고한 희생, 아름다운 선택
그 모든 말이 나를 감싸려 했지만
나는 한 번도 원한 적 없었다
나는 꽃을 피우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꽃을 피우기로 내가 선택한 것이라 말해야 했다
ㅏ 와 ㅓ, 분명히 다르지만
끝내 하나를 택해야 하는 세상
모호한 경계 속에서
나의 모양은 조금씩 깎여갔다
강아지똥이 아니라
처음부터 민들레꽃이었다면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면
나는, 나는 더 행복했을까?
> 3단계. 저자의 의도를 더 풍성하게 담아내서 종결짓기
강아지똥, 그 후
누군가는 말했다
강아지똥도 거름이 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누군가를 피어나게 해야만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왜 나는 나로서는 안 되는가
왜 나는 나의 모양 그대로,
흙 위에 남아서는 안 되는가
꽃이 핀다 해도
그 꽃이 나를 기억할까
내가 있었다는 흔적 하나 남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내 삶일까
강아지똥이 아니라 민들레꽃이었다면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도 빛날 수 있었다면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었다면
나는, 나는 기꺼이 흙이 되었을까
이제 나는 선택하려 한다
누군가의 거름이 아니라
내 몸으로 뿌리내리고
내 의지로 피어나는 것을
이대로도 충분한 나로,
흙 위에 남아보기로.
> 4단계. '아빠'로서 아들에게 메시지 전하기
영탁아, 세상을 길게 바라보렴
주어진 환경과 여건을 부정하며, 존재 그 자체로서 서고 싶지만, 현실은 늘 선택을 강요한다.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처음부터 가치 있는 존재이길 바란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부정이자, 존재에 대한 갈망이며, 저자 내면의 갈등을 그대로 투영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환경, 거부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었던 삶의 흐름 속에서 나는 대응했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해 왔다. 그 선택을 반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라고 해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환경은 변한 듯 변하지 않았고, 결국 문제는 선택이 아니라 내 마음을 바로세우는 일이다.
바라보는 차이는 '나'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냥 '나'다.
환경과 과거의 행적 속에서 나를 찾으려는 시도는 마치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부질없다.
가령, 재벌가에서 태어나 돈 씀씀이에 부담이 없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과연 다를까?
환경이 달라진들, 상황이 바뀐들, 배경은 언제나 흘러가고 변할 뿐이다.
그걸 바라보는 나 또한 흐르고 흔들린다.
마치 오르내리는 파도처럼.
군대를 간 것도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갔다고 하자. 하지만 그것을 의무라고만 여길 것인가?
여긴다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다.
온전한.
그래서 다행이다.
아직은 아이 같지만, 어느새 훌쩍 자라 세상을 돌아보고 있으니.
영탁아,
세상은 아름답지도, 환상적이지도, 암흑만도 아니다.
그냥 하얀 도화지라고 봐도 좋다.
세상이 변화무쌍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너의 시선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욕심을 내고, 안타까워하고, 원하고, 피하려 하고,
혹은 가만히 있으려 하는 모든 감정들.
이 모든 것이 태어났기 때문에 가지게 된 것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세상이 존재하는 원인이면서,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일 것이다.
세상에 '내가 없다면' 세상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세상에 있기에, 그리고 다시 태어나 살아가기에,
세상은 의미가 있다.
이것은 독선이 아니라,
해석과 풀이의 문제일 뿐이다.
강아지똥이나 민들레꽃이 단순한 상징이 될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강아지똥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듯,
그것이 생기기 위해 먹고 싼 주체가 있었을 것이고,
그 주체도 태어났을 것이며,
그 부모도, 그 조상도, 같은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민들레꽃도 다르지 않다.
영탁아,
세상은 한순간을 정의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 같은 탐구자는 그렇게 하면 안 되겠지.
그러기에 길고 길게 바라보아야 한다.
세상을 이루는 조각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는 것도 좋다.
감상적이지만, 그 안에 직접적인 의미를 담아낼 수 있으니까.
마치 세상을 담으려 애쓰는 사진 한 장처럼.
그리고 아빠는 말하고 싶다.
너는 세상을 아주 길게,
그렇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그렇게 바라보면 강아지똥과 민들레꽃이 달리 보일 것이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처음부터 완전함을 꿈꾸는 대신,
어쩌면 낙담에 가까운 감정으로 현실을 담담히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길게 바라본 세상은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나는 하나의 작은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세상을 바라보되,
주어진 여건을 활용하고,
변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모든 것이 내게 주어진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둬진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처지일 수도 있다.
그래도 숙명을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그런 것일 뿐이다.
세상은 거대하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움직인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부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세상을 이루는 건
나와, 나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마치, 네가 존재하게 한 '강아지똥'처럼.
영탁아,
네가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아빠가 느낀 감동은 단순한 대견함이나 뿌듯함이 아니었다.
그건 '감사함'이었다.
봐라.
너는 '강아지똥'을 새롭게 존재하게 했잖아.
그것을 태어나게 했잖아.
그것이 네 탄생과 무엇이 다를까?
이건 숙제다.
응원한다.
- 미력하나마 보태고 싶은 마음을 담아, 아빠가. 김제에서.
> 습작
주어진 환경과 여건의 부정을 통해 존재 그 자체로서의 존립을 세우고자 하는데 현실을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음을 담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가치 있는 존재이길 바란다. 이는 현실 부정과 존재 존립에 대한 안타까움을 저자 내면의 갈등 상황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자라온 환경에서 거부할 수 없었고 거절할 수 없었던 마냥 주어졌던 상황에 대한 대응과 어쩔 수 없이 행했던 행적을 반성한다. 그런데 현재라고 딱히 다르지 않다. 주어진 환경은 변한 듯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선택이라기 보다 본인 마음부터 바로세울 필요가 있다. 바라보는 차이는 나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기 때문에 생긴다. 나는 그냥 '나'다. 환경과 과거의 행적을 통해 '나'를 찾으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마치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잡아보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가령, 재벌가에서 태어나서 돈 씀씀이에 부담이 없어졌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을까? 과연 다를까? 환경이 달라진들, 상황이 달라진들, 배경은 언제나 흘러가고 바뀐다. 그걸 바라보는 나 또한 심상이 계속 흐른다. 오르내리는 파도처럼 굴곡을 그린다. 군대를 간 것을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갔다손 치더라도 어찌 그걸 그렇게 여기고 말 것인가! 여김은 본인의 선택이다. 온전한.
그래서 다행이다. 아직은 아이마냥, 그렇지만 어느 새 부쩍 자라 세상을 돌아보고 있으니 말이다. 영탁아, 세상은 아름답지도 환상적이지 암흑도 아니다. 그냥 하얀 도화지라고 봐도 무방하다. 세상은 변화무쌍한게 아니라 바라보는 너의 시각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을 바라보며 욕심과 안타까움을 느끼거나 갖고자 원하고자 바라고자 피하려고 가만히 있으려고 하는 모든 행위는 어쩌면 태어났기 때문에 갖게 된 감정이며, 이는 세상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면서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세상에 내가 없다면 세상 또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에 있기에 그리고 다시 태어나 다시 살아가기에 세상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난 그렇게 여긴다. 독선이 아니라 해석과 풀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강아지똥이나 민들레꽃에 담은 심상이 어느 하나의 재료가 되거나 - 마치 사람이 죽어 원소로 재쓰임을 기다리는 것처럼 - 화려함을 상징한다손 치더라도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일이다. 강아지똥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강아지똥이 생기기 위한 과정은 먹고 싼 주체가 있겠고 그 주체는 다시 태어났을 것이며 그 주체의 부모 또한 다시 태어났을 것이며 그 전의 전으로 돌아가면 민들레꽃 또한 마찬가지의 경로를 밟았으리라고 본다.
영탁아, 세상은 한 순간을 정의내리고 싶어하게 만들지만 우리와 같은 탐구자는 이를 따르면 안되겠지. 그렇기에 길고 길게 바라봐야 한다. 세상을 이룬 단면 단면을 하나씩 바라보는 것도 좋아. 굉장히 감상적이며 직접적인 내용을 담아낼 수 있기에. 마치 세상을 담아내려고 애쓰는 사진 한 장처럼.
영탁아, 여기에서 필요한 건 - 어쩌면 아빠 라는 숙명의 고리처럼 역할이 고개를 든다 - 세상을 길게 아주 길게 바라봐봐. 그러면 강아지똥과 민들레꽃이 달리 보일테다. 현실 부정과 처음 바람을 희망하기 보다는 어쩌면 낙담 비스무리한 감정으로 현실을 담담히 마주보게 될 지 모른다. 아주 길게 바라본 세상은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가 항해하는 세상에서 나란 그저 하나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보되 주어진 여건을 활용할 의지와 상황 변화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또한 모두 내게 주어진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둬놓은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처지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찌 숙명을 싫다고 말할까! 단지, 그렇다는 것인데, 세상이 아주 길고 거대해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움직이고 있어서 마치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부질없다 여길 지라도 그건 착각이라는 거다. 세상을 이룬 건 나와 나의 집합체 이기 때문이다. 마치 너의 '강아지똥'이 존재하게 된 것처럼!
영탁아, 네가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아빠가 느낀 감동은 대견함이나 뿌듯함 너머 감사함이었다. 봐라. '강아지똥'을 새롭게 존재하게 했잖아. 흔히 태어나게 했잖아. 과연 너의 탄생과 뭐가 다를까? 이건 숙제다. 응원한다.
- 미력하게나마 보태고자 하는 마음을 전하며, 아빠가. 김제에서.
> 5단계. 앞선 의견들을 반영한 재탄생
강아지똥
바람이 차가운 어느 가을날, 길가 한쪽에 덩그러니 놓인 강아지똥 하나. 처음에는 더러움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그 작은 덩어리는 그 자체로 완전한 삶을 살고 있었다.
세상은 강아지똥에게 말한다.
“너는 쓸모없는 존재야.”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피해 발걸음을 옮기고, 비가 내리면 흙탕물에 섞여 형체를 잃어간다. 그조차도 운명이라면, 강아지똥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한 송이 민들레꽃이 다가와 말했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피어날 수 없었을 거야.”
강아지똥은 순간 깨달았다.
그 존재 자체로 의미를 찾으려 애쓸 필요가 없음을.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고, 세상의 한 조각이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존재의 가치임을.
강아지똥은 더 이상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흐름 속에서, 맡은 역할을 하기로 했다. 민들레꽃을 피워내는 양분이 되기로.
세상을 길게 바라보면, 우리 모두는 한 순간의 강아지똥일지도 모른다. 더럽다고 여겨질 수도, 보잘것없는 조각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먼 시점에서 다시 보면, 그 강아지똥이 없었다면 피어나지 못했을 민들레가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고, 햇살이 비추는 어느 날,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혹은 세상의 작은 변화 속에서, 강아지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곧, ‘나’이기도 하다.
- 세상을 길게 바라보며, 영탁이를 위해. 아빠가.
...
이렇게 보낸 시간이 참으로 값지다. 아들에게 전할 수 있음이 고맙고, 그 시간이 성장의 밑거름이 될 것을 떠올리니 비록 몸은 멀리 있어도 아쉽지 않다.
나는 강아지똥이다.
아들은 내게 민들레꽃이다.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세상을 탓하지 않는다. 다만, 알지 못한 채 흘려보낸 수많은 시간이 야속할 뿐, 세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세상은 곧 바탕이며, 환경이자 배경이다.
내가 세상 속에 있고, 세상은 나를 통해 의미를 갖는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이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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