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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세상보기

Liar

by 큰바위얼굴. 2025. 3. 6.

    *  Outlier: 다른 데이터와 크게 벗어난 값 (이상치)

동반자, 항상 고마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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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이네. 집으로 가는 날. 전주에서 김제로, 김제에서 세종으로. 이번 주는 장모님이 계시고 처남도 내려온다. 회를 사다 먹고, 아이들은 두고 2차로 나갈 분위기인데, 그래서 배드민턴을 치긴 어려울 것 같아. 시간이 안 맞더라고.

신호등과 마주했네. 06:01
정면에 신호 하나가 있고, 신호를 받아야 빠르게 갈 수 있지. 그런데 기다리느니 좌측으로 꺾어서 가는 샛길이 있어. 그 길로 가면 신호를 기다릴 필요 없이 기역(ㄱ)자, 니은(ㄴ)자 형태로 돌아서 가면 돼.

사거리에서.
오늘 내 앞에 차가 두 대나 있네. 보통은 잘 없는데, 오늘은 웬일로 많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누군가가 누군가를 욕하면, 그 마음이 존재감을 갖게 되고, 그 존재감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잖아. 욕하는 것조차 어떤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 법이지.

존재의 필요성은 당연한 거고, 그렇기에 호불호도 갈릴 수밖에 없어.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싶은 일들도 많아졌지. 하지만 결국, 한 사람의 성향이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 나타나느냐의 차이일 뿐이야. 사실 이해 못할 일이 많지.

이익을 추구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이익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면 문제야. 이게 전형적인 서구적 사고방식일지도 몰라. 기부도 마찬가지 아닐까? 순수하게 남을 돕는다기보다는, ‘나는 남을 도울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인정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개념처럼 보이기도 해. 반면, 옛 품앗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돕고 대비하는 형태라면 상하관계 없이 더 자연스럽겠지.

희한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이유는 뭘까?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희한한 일을 이해하려고 하면 그건 정말 어려운 숙제야. 통계에서 라이어(거짓말하는 사람)는 선처리 대상이지, 고려 대상이 아니야. 그런데 현실은 다르지. 사회에서 돌출된 사람들은 영웅이 되기도 하고, 때론 의문을 던지게 하지.

문제는,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자기 이미지와 캐릭터를 우선한다는 거야. 길게 보고 가면 서두를 필요가 없는데, 대부분은 당장 이루려 하다 보니 조급해지는 거지. 믿음이 있다면 서두를 이유가 없겠지만, 세상은 당대에 다 이루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어.

이 세상이 누군가의 실험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린 그 ‘누군가’를 의식하게 돼. 하지만 만약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기대와 기도가 생기고 동시에 혐오와 비판도 생기겠지. 결국, 어떤 존재든 드러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어.

맹목적으로 믿고 따른다면 이해할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결국, 백 명이 한 명을 이해해야 하는지, 한 명이 백 명을 이해해야 하는지가 문제야. 방향성이 잘못된 거야. 그런데도 한 명이 백 명에게 영향을 끼쳐. 선거가 대표적이지. 사람들은 “쟤는 우리와 다를 거야, 우리를 위해 애써줄 거야”라고 기대하지만, 결국 그 ‘우리’는 이기적인 집단에 불과한 경우가 많아.

이런 흐름이 퍼져버리면 자연스럽게 정화될까? 아니면 또 다른 영향을 끼칠까? 결국, 라이어(거짓말쟁이)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존재인 거야.

결국, 우리가 언제 한결같이 평화로웠던 적이 있었던가? 지겨울 정도로 평온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변화를 원하게 돼.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무언가가 생기는 거지. 그게 결국 투표로 이어지고, 선출되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돼. 그 안에는 조작과 음모, 집단주의가 얽혀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변화는 계속될 거야.  김성호.




되돌려 찍어보았다. 다행히도,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래서 알았다. "앗, 보안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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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차에 올라타고 나의 어설픔에, 멋적음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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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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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ar = Outlier

어떤 방향이 잘못됐다고 해도, 한 사람이 백 명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을 선거를 통해 뽑고, "쟤는 우리와 다를 거야, 우리를 위해 애써줄 거야"라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라는 개념은 공동체 전체가 아니라, 결국 각자의 이익을 좇는 집단의 연합에 불과하다. 이는 인류 전체나 지구를 위한 선택이 아니다.

그러한 행위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 자연스럽게 정화가 이루어질까? 결국 그 영향은 우리에게 교훈을 남긴다. ‘라이어’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배워야 할 교훈을 상징하는 존재다.

결국 인간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자아를 세우는 것은 본능이며, 나 자신이 없으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 아닌 세상을 더 큰 가치로 여기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평화주의자든, 자신이 행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이롭다는 사실을 모르고 행동하진 않는다. 핍박받고 희생하는 경우라도, 그 선택의 과정에는 자발적 신념과 포부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이어’의 존재를 생각해보자. 라이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회가 그것을 필요로 했다는 의미다. 그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교훈이 있다. 하지만 그 교훈이 "더 열심히 살아라", "서로 사랑하라", "평화롭게 지내라"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늘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때로는 변화에 대한 갈망이 우리 안에 틈을 만든다. 그 틈이 선거를 통해 현실화되고, 권력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조작과 음모, 집단주의 등이 얽혀 있다. 이런 흐름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지금의 시대는 완성되지 않았으며, 완성의 개념이 반드시 선(善)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지구의 멸망조차도 하나의 완성이 될 수 있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의 존재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하나의 실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원소들이 모여 생명을 탄생시켰고, 그 생명은 의식을 가졌으며, 점차 발전해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양한 성격, 집단, 역할이 생겨났다.

만약 단순한 생성과 소멸만 반복했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의식적 존재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라이어는 단순한 변수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아웃라이어가 아니라면, 인류와 같은 생명체는 우주에 무수히 많아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예외적인 존재다. 우주는 무수한 반복을 통해 더 이상의 발전이 어렵다고 판단했고, 새로운 실험으로 ‘의식’을 등장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라이어가 등장한 이유는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인류가 우주에서 하나의 실험이라면,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우리가 잘해야만 인류가 우주로 확장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이어가 사회를 움직이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평범한 사람들의 의지와 삶의 패턴이 점점 단조로워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 비슷해지고, 끼리끼리 어울리며, 안전한 루틴을 추구한다. 하지만 단순한 반복 속에서 의미 없이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을까?

삶이란 루틴 속에서도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는 것이다. 성공이나 성과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에 대한 본질적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보통 사람들에 불과할 것이다. 라이어의 존재는, 그런 의문을 던지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성과 선택의 문제인 이유다. 김성호.

 

 

아침 운동 이후, 오늘은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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