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아침 눈을 뜰까 말까 망설일 때까지만 해도 꿈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었다. 그런데 변기에 앉은, 양압기 코마개를 닦고 물받이를 씻고 대롱을 메달아놓고난 그 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어제와 엊그제 보다는 진전된 느낌이었는데 떠오르려해도 영역이 달라 그러니 헛수고 말게나 하는 말처럼 흐릿하다. 넘어서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위화감 마저 든다. 아직은 준비가 덜 되었으니 좀 더 수련해서 오라는 듯이.
곰곰이 생각한다.
생각이란 것 또한 느낌이나 체감과는 동떨어진 어떤 공간(표현상)에서 이러구저러구 말을,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건데 그렇다면 상상이랑 생각이랑 다른가? 그렇다면 생각이랑 꿈이랑 다를게 뭘까? 꿈 또한 뭔가로부터 동떨어진 어떤 공간(표현상)에서 한 편의 드라마를 찍는 것임을 볼 때 생각이 생각을 이어가메 불연듯 떠오른 것까지 포함한다면 생각이나 꿈이나 별반 차이가 없겠구만. 다만, 생각이 일부러 하는 거라면 꿈은 그냥 되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곰곰이 생각한다.
꿈과 현실을 연결한다는 것이 어쩌면 꿈을 현실에서 기억한다는 말은 아닐까. 기억 또한 때가 지나 흐려지듯이 꿈은 그 영역이 남달라 눈을 뜬 그 때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일 뿐 꿈을 기억해 낸다면, 나아가 꿈을 기억하여 경험처럼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남다를까? 일통된 느낌일까? 확장된 효과가 나올까? 보다 풍성해질까? 금단의 열매일까? 분명 이런 생각이 든다는 건 해볼만 하다는 것인데, 마치 누가 말해주기라도 하듯이 불연듯 떠오른 생각이 아주 큰 역할을 해내듯이 말야.
받아들이는 것인가?
꿈을 기억해낸다. 꿈을 현실에서 체감한다. 꿈이나 생각이나 상상이나 매 한가지다. 꿈과 생각과 상상이 지닌 공통점은 죽지 않는다는 것, 무한하다는 것. 물론 그 무한이 범위를 말하는 것일뿐 실상 꿈이나 생각이나 상상은 결국 그 바탕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어쩌면 무한한 우주를 탐험하듯이 항해를 떠나는 사람일망정 현실에선 우주선을 개발하는 중이며 당대에 과연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항해할지는 미지수인 것처럼, 꿈이나 생각이나 상상은 현실에 기반한 읽고 보고 듣고 느끼는 오감과 육감마저 동원된 입력값이 있어야 발동된다. 세상에 잠깐 스쳐지나간 기사의 제목이 말하다보니 인용이 될 때 자신의 기억력에 감탄을 토할 때 느낀 것처럼 불연듯 뜻하지 않게 입력된 값이 무심코 말하다보면 표현하다보면 쓰다보면 만들다보면 생각하다보면 튀어나와 무한히 커져가는 것처럼, 그래서 어떨 때는 실제 경험하지 않은 것조차 마치 그렇게 했던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듯이 꿈이나 생각이나 상상이 커지면 커질수록 실제와 구분짓지 못하면 엉망이 되어 버릴 수 있으니 아마 그런 위화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바탕이 소중함을 잊지 말라고. https://blog.daum.net/meatmarketing/5463?category=2005839
배경이 전부다.
경험은 배경이 달라질 뿐, 무한히 반복된다. 나와 너의 구분을 없애면 이는 더욱 뚜렷하다. 과거의 영웅들, 신화 속의 주인공들, 그리고 전쟁 중에 이름모를 사라진 이들, 질병에 휩쓸려 죽은 이들, 현재의 인물들, 그 모두는 배경이 달라졌을 뿐 살아가는 방식이나 인간이 만든 제도 속에서 경쟁하듯 살아가메 자신이 원하든 속한 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걸 최선으로 안다. 이제까지 배경과 동떨어진 경험을 중심으로 살아감에 배경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며 위로와 격려를 했다면, 오늘은 경험을 배제한 채 배경이 변화한 지금의 모습이 경험이라는 노력에 의해 탄생된 배경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산물로써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배경을 바꾸는데 일조하는 부속품 마냥.
우주를 항해한다.
우주를 항해할 때 잠이 든 승무원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목적지에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90년을 잠들어 있게 만드는 일이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https://blog.daum.net/meatmarketing/5453 훈련된 이들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듯한데, 삶은 배경을 만들어나가는 연속임을 받아들인다면 우주선에선 살아가는 사람들이 90년후에 도착할 그곳에서 역할을 할 이들을 키우는 것이 보다 바람직해 보이는 건 왜일까. 잠이 들어 90년 후에 깨어나 새로운 행성에서 새 출발을 한다. 다시 만난 사람들, 이웃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충분하지 않은가 묻는다. 이미 지구와는 통신조차 원활치 못해 우주선에 탑승하는 순간 동떨어진다. 마치 우주시대에선 우주항해에 따라 분리된 삶을 당연하게 그리고 있다. 내가 볼 땐 그건 너무 불행하다. 그래서 전파를 매개로 한 통신이라기 보다는 다른 방식의 소통채널은 마련할 것으로 본다. 90년 동안 잠에 든다. 어찌 될지 모른 채.
경험이 전부다.
배경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내가 하지 않아도 남이 하고 그 남조차 하지 않으면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결국 그걸 한다. 답은 변한다. 누가 할 지 내가 모를 뿐. 배경은 변해가는 게 자연스럽다. 내 선택이 아니다. 그러니 경험을 통해 배경을 변화시키는 노력은 내 몫이 아니다. 나완 별개로 움직인다. 만약 배경을 내 뜻대로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그 만큼 힘이 든다. 여럿이 힘을 합해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갈등에 직면하고 좌초할 수도 있으며 그 좌초한 때조차 멀고 길게 본다면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멈추었다고 할지라도 그 싹은 다시 틔기 마련이며 싹조차 자라지 못할 토양이라면 갈아업어지고 만다. 바로 여기 이 토양이 아니어도 좋다는 듯이. 경험은 배경을 그럴 듯하게 좀 더 멋지게 재밌고 신나게 라는 생각들이 모여 그렇게 바뀌게 한다. 경험은 쌓인다. 누적되고 이어진다. 내가 아니어도 남이 아니어도.
작은 노력들이 모여모여 큰 강을 만든다.
문일지십. 하나를 듣고 열을 안다. 이걸 바랐는데 아쉽게도 내겐 닿지 않았다. 하나를 듣고 하나를 알기 까지 오래 걸렸다. 나아가 둘을 알고 싶어지면 엉뚱한 생각이 든다. 때론 넷 만큼 나아갔다가도 나아간 만큼 되돌아오기 일쑤다. 튼튼하지 못한 널뛰기는 이처럼 감정의 기복처럼 들쑥날쑥 한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이젠 아니다. 널뛰기도 가능하니까 한 것이고 되돌아와서 되돌이켜 본 것 또한 필요하니까 그런 것일 뿐. 받아들임의 차이라는 걸 알게 되니 널뛰든 돌아오든 나아가든 뭘 하고 있는 지금 이순간이야말로 가장 값지구나 싶다. 하나하나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모여 큰 강을 이루듯이 내가 쓴 한 알 한 알의 글자들이 나를 휘감고 우리를 휘감아 어디론가 이끈다면 그 또한 환상적이지 않겠는가!
재테크에, 돈 모으기에, 일상에, 돈 바라기에 지친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갖은 것이 없으니 행복한 것이라고. 내게 말한다. 갖은 만큼 가지수를 늘려 감당해나가는 몫이 커졌을 뿐, 정작 소홀히 하지 말것을. 지금 파악된 외로움이 만약 진정으로 삶의 중추라고 한다면 그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투자로 사람을 사귀는 것이라면, 외로움 또한 감정의 변주에서 한 축일 뿐이라고. 외롭다. 그래서 쓸쓸하다. 그러니 외롭지 말아야 겠다. 사람을 사귄다. 사랑을 한다. 그래도 외롭다. 나를 온전히 내비칠 수가 없다. 부부도 싸운다. 온전히 이해해 줄 상대는 없다. 이를 받아들이니 서글퍼진다. 외로움까지 겹친다. 살아뭣해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마신 소주. 술에서 깨어 눈을 뜨니 해야할 몫이 남아 있어 다행스럽다. 뭔가를 하고 싶은데 할 것이 없는, 혹은 내가 선택해서 해야 할 무엇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면 허전하기 까지 하면서 내 삶은 도대체 왜 이러냐며 자책한다. 멀지 않은 때, A.I.가 사람들의 일을 대신하여 스스로 움직이고 알아서 하는 시대가 오면 이처럼 사람은 뭘 하나 하면서 생계가 아닌 할 일, 할 몫, 할 역할을 찾아 헤맬지 모른다. 게임이나 하자. 우주여행이나 갈까. 쓰임에 대해 일정 수의 사람이 역할을 다하여 나머지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우후죽순 재미나 즐거움, 혹은 보람을 찾아 움직일텐데 이 또한 정점에 이르러 사람에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을 맞이하면 쭈욱 이어져온 우주개척에 박차를 가할 것이고, 미지의 적과 마주치기 라도 하면 세계대전이 아쉽지 않다는 듯이 파리 목숨처럼 전쟁으로 향할 것으로 보인다. 전쟁중에 죽어간 군인들, 그리고 시민들. 그들은 그런 생을 타고 났을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까. 짜 맞춰진 세상에서 이 또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데 필연적으로 따라올 그림인가! 살아뭣해 라는 말을 없앴으면 좋겠다. 내가 할, 내가 하고 싶은 이런 생각들이 주어가 되니 내 안에 든 것이 일천하면 할수록 튀어나올 결과값이나 판단 또한 그저그런 봐줄만 하다고 여긴다. 그렇게 본다면 먼 미래 사람의 역할이 일자리에서 사라지고 태평한 세상이 열린다면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때에도 내가 필요하겠지?
필요한 일을 한다. 지금은.
먼 미래 사람들의 일자리가 사라졌음에도 살아가는데는 큰 불편이 없는, 돈벌기나 돈모으기조차 의미를 상실한, 먹고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없는 시대가 열린다. 그러면 잊지 말자. 사람에겐 입력값이 풍성할 수록 결과값이 다양해진다는 것을. 읽고 듣고 보고 느끼고 나누고 대화하는 입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함을. 그게 첫 단추임을. 심지어 결과값에 대해선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우선 읽고 듣고 보고 느끼고 나누며 대화하며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나서 이를 바탕으로 '생각나는', '상상하는', '꿈에 그리던' 걸 하면 된다. 생각이나 상상이나 꿈이 그래서 필요하다. 우린 지금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건 생각이나 상상이나 꿈 그 자체일 지도 모를 일이다. 쓰이고 쓰이다보면 내 몫이 내 할 일이 생긴다는 걸 50년은 먼저 말했나 싶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실수를 두려워 말라. 하지 못함을 나서지 아니함을 책망하라. 그럼 된다. 뭐든 그냥 한다. 하다보면 다 쓸모가 있기 마련이니 그걸 돈이란 걸로 메기지 말 것. 하다보면 든 생각이나 상상이든 꿈이든 그걸로 매길 것. 배경으로부터 얻은 경험이 값진 건 경험 그 자체에 있기 보다는 그로인해 연결되어 발생한 생각이나 상상이나 꿈 그 자체가 에너지원으로 최고라고 것. 구리선에 연결된 전기를 전달하는 전깃줄 마냥 살것인지, 전기의 파장을 이용하여 바람이라도 불게 할 것을 생각할 것인지. 앞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어쩌면 이런 잣대가 갈림길에서 선택이란 이름으로 마주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그래야만 덜 불행하니까. 그래야만 헤매는 것이 덜어질테니까.
하긴, 불행이나 헤맴이 딱히 거부할 대상이라기 보다는 자연스레 찾아든 감정의 변주에 불과할 뿐이니. 그 또한 경험을 통해 살아가는 삶 자체의 모습으로 본다면 어찌 피할 대상일까. 왔다 가는 인생길에서 찾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죽지 못해 살아가는가? 살아가메 생생하게 체감코자 하는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욕심 때문에 힘들지는 않은가? 바라고바라는 바가 돈이 되어버린 것이 자연스런 일일까? 생각이란 걸 하는 것이라면 돈벌기나 돈모으기에서 조금은 동떨어진 걸 체험해도 좋겠는데, 생각 만큼 주변에 순수하고 착한 이들이 많다는 걸 아는가? 감성을 키우면 어떠한가? 예술이 실제를 표현해낸 거짓몸짓이란 말처럼, 사람다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연극인들 어쩔까? 어쩌면 모든 이를 예술가로 육성하는 것을 고려해봄직하다. 세상을 그림으로 글로 숫자로 영화로 영상으로 소리로 매체로 게임으로 가상으로 그 어떤 방식으로든 남기고 전달하여 여럿이 공유하면서 동시대를 살아감에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소속감을 갖도록. 부러워하면 지는 거다. 믿고 가자. 성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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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自`2022.07.14 12:14
기술 발전을 통한 풍요로움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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